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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오늘 우리 어디 좋은 데 갈까?"

지난 14일 모처럼 하루 쉬는 아내가 나에게 제안을 한다. 갑자기 웬 좋은 데? 어리둥절한 나뿐만 아니라 방학이라 쉬고 있는 막둥이 아들도 아내가 부추긴다. 이 집 남자 둘은 막강한 식권(밥 주는 권력)을 가진 여성에게 고분고분하게 순종한다.

이게 오늘 아내와 아들과 함께 수확한 냉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 수확 이게 오늘 아내와 아들과 함께 수확한 냉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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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우리가 사는 마을이 아니다. 옆 마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4년 전 우리가 살던 마을이다. 호미 두 개, 비닐봉지 몇 개, 모자와 장갑 등을 전광석화같이 챙기는 아내. 차 시동을 걸었다. 출발이다.

옆 마을 뒷동산에 도착하자 아내가 차에서 내린다. 우리는 차에 타고 있다. 아내가 옥수수 밭(지금은 추워서 빈 밭)을 살핀다. 마치 전쟁터의 척후병 같다. 바로 아내가 돌아온다. 아내의 얼굴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여보! 많아."

뭐가 많을까. 그렇다. 냉이다. 지난 해도 아내와 가끔씩 여기 왔다. 올해도 있을까 했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와, 냉이 밭이다."

그랬다. 냉이 밭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원래는 옥수수 밭인데, 지금은 냉이들이 점령하고 있다. 아내는 호미를 들고 전장(?)으로 속히 뛰어간다. 나와 아들은 느릿느릿 뒤따라간다. 아내는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몇 뿌리나 캤다. 아들과 나는 보조인 셈이다.

아내는 냉이를 캐고, 아들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냉이를 털어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다. 남편인 나는 뭘 할까. 그렇다. 사진이나 찍고 있다. 하하하하
▲ 냉이 캐는 중 아내는 냉이를 캐고, 아들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냉이를 털어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다. 남편인 나는 뭘 할까. 그렇다. 사진이나 찍고 있다. 하하하하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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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보니 자리 잡았다. '냉이 캐기 대작전'의 역할분담말이다. '아내는 캐고, 아들은 털고, 나는 찍고'. 이것이 오늘 작전이다. 아내는 냉이를 캐고, 아들은 캔 냉이를 털어 비닐봉지에 담는 거다.

그럼 '찍고'는 뭘까. 그렇다. 사진을 '찍고'다. 이런 좋은 광경을 두고 그냥 못 넘어 가는 나란 걸 아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아내는 아예 사진 각도가 잘 나오도록 자리까지 잡아준다. 이래서 우리는 완벽한 팀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사진만 찍으랴. 찍는 건 잠시뿐. 나의 역할을 이내 찾아낸다. 아내의 냉이 캐는 속도가 빠르니 아들이 냉이를 터는 게 못 따라가면 나도 냉이를 턴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나도 냉이를 캔다. 말하자면 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된다.

우리의 '냉이 캐기 작전'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아내는 캐고, 아들은 털고, 남편은 멀티 플레이어'.

"아들! 이게 겨울을 난 냉이라 튼튼하고 몸에도 좋아."
"아, 예."

냉이는 겉으로 보이는 잎보다 속에 있는 뿌리가 탄탄하고 크다. 내실 있고, 내공 있는 사람이 향기와 맛을 낸다는 철학을 떠올려 본다.
▲ 냉이 냉이는 겉으로 보이는 잎보다 속에 있는 뿌리가 탄탄하고 크다. 내실 있고, 내공 있는 사람이 향기와 맛을 낸다는 철학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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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야심찬 강의(?)에도 아들은 영혼 없는(?) 대답을 한다. 소위 최소한의 '리액션'이다. 아들도 열심이고 나도 열심이다. 아내는 물론이고. 쉴 새 없이 냉이를 캐다 보니 금방 한 봉지가 찬다.

이때 아들이 어디론가 뛴다. 어디로? 바로 차다. 뭐 하러? 비닐봉지 가지러. 캐기 시작한 지 10여 분 만에 한 봉지가 가득 찬다. 아들은 다른 비닐봉지를 즉시 대령한다. 아들도 적잖이 신이 난 모양이다. 처음엔 그저 그랬던 '냉이 캐기 몰입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진 게다.

신기한 건 일어서서 보면 냉이가 있는지 없는지 잘 보이지 않다가도 일단 캐겠다고 맘먹고 앉으면 냉이가 "나 좀 캐어가세요"라고 말해오는 듯이 잘 보인다는 거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던 시처럼 자세히 보니 보인다는 거다. '자세히 보아야 냉이다'로 바꿀까 싶다. 하하하하.

열심히 캐다 보니 한 봉지, 두 봉지..... 어느새 네 봉지가 가득 찬다. 이쯤 되니 아들부터 말이 나온다. "엄마 우리 언제 가요?" 나도 뒤따라 말이 나온다.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아들은 언제 가느냐를 물었지만, 나는 차마 말은 못하고 애먼 내 허리를 말한다. 아내도 눈치를 챈다.

"안 그래도 이것만 하면 갈라고 그랬어."

그래도 기념이라며 들녘에서 냉이캐기작전을 수행한 사람들 셋이서 셀카 사진을 찍었다.
▲ 기념사진 그래도 기념이라며 들녘에서 냉이캐기작전을 수행한 사람들 셋이서 셀카 사진을 찍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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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원망을 한 마디의 말로 잠재우는 아내의 통솔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아들도 나도 반쯤 만족한다. 하지만, 반은 왜 남겨둘까. 아직 가려고 일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도 한 번 더 "지금 몇 시지. 갈 때 안 됐나"며 띄워 준다. 나는 거기에 맞춰 "아이고, 아이고 다리야"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그제야 아내는 자칫 폭동(?)이 일어날 백성들의 상황이란 걸 감지한다.

"자기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과 해야 되니까 하는 일의 차이 아니겠소."

내가 웃으며 민란(?)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어서 현명한 아내의 대답이 돌아온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가자고."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도 비닐봉지를 챙긴다. 나는 아들의 행동에 묻어간다. 아내는 차로 향하면서도 발에 밟히는 냉이를 하나라도 더 캔다. 아내는 '이렇게 늘려 있는 냉이를 그냥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라는 맘이지 싶다. 우린 '다른  뒷사람을 위해 다 캐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라는 맘이다.

사실 아내도 지쳤다. 한 시간 가량을 쉴 새 없이 냉이를 캤다. 네 봉지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서 철수를 명령한 거다. 그렇게 말한 건 아들의 친구가 집에 놀러 오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들이 집에 가자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린 만선의 기쁨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아내가 말한다.

"'냉이 캐기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헉!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실컷 캐왔는데, 지금부터라니.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당신은 '냉이 캐기'에 대해 뭘 좀 아는 당신이다. 그랬다. 지금부터 냉이를 씻고 다듬는 대장정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냉이를 야외 수돗가에서 몇 번이고 씻는다. 흙과 잡풀을 조금이라도 더 없앤다. 씻은 냉이를 방안 거실로 데려가 다듬는다. 일일이 하나하나를 다듬는다.

새삼스럽게 느꼈다. 냉이를 캐는 건 금방이고, 먹는 건 쉬운 일이지만, 다듬는 건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시간으로 따져보니 캐는 데 1시간 정도, 다듬는 데 5시간 정도가 걸렸다. 헉! 5배다. 최소한 6시간 정도 걸려야 겨우 냉이를 먹어보는 거다.

냉이를 캐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하지만, 씻고 다듬는 시간은 5시간 정도. 캐는건 금방이지만, 다듬는 시간은 5배나 들어 간다. 먹는 건 쉬워 보이지만, 그 냉이가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이런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 냉이 씻기 냉이를 캐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하지만, 씻고 다듬는 시간은 5시간 정도. 캐는건 금방이지만, 다듬는 시간은 5배나 들어 간다. 먹는 건 쉬워 보이지만, 그 냉이가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이런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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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듬던 아내가 말한다.

"이거 다듬어서 직장동료들과 마을회관 어르신들에게 나눠 먹어야 겠네."
 
아내의 속셈(?)이 그랬구나. 어쨌거나 냉이 하나 캐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 이제 봄이 오는가 보다.


태그:#냉이, #봄, #송상호, #더아모의집,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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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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