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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위령비.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탁금으로 만들어졌다.
 하미위령비.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탁금으로 만들어졌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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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대리석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호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미마을이 있다. 한국군들에 의해 세 번이나 학살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그들이 거기에 살고 있다. 비포장길로 들어서니 조그마한 가게들과 그 옆에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 보였다. 아이를 업고 장사하는 모습이 낯익게 느껴졌다.

차에서 내려 샛길을 얼마 걷지 않았는데 우리가 가야 할 그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평한 논밭 사이에 커다랗게 솟아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만났던 그 어떤 위령비보다 규모가 커보였다.

위령비는 넓은 담장안에 쌓여있었다. 담장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역 인민위원회 관계자가 열어주었다. 이 위령비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1967년 12월 미국이 전략적으로 만든 주민수용소에서 거주하던 하미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한국의 해병대인 청룡여단은 하미마을 사람들의 재정착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인들과 마을주민들과의 관계는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2월 25일 오전 9시 30분경 한국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았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인들이 식량이나 물품을 나누어 주는 줄 알고 아무런 의심없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군인들을 따라 나섰다. 지휘관의 지루한 연설이 종료되자 수풀속에서 중화기가 등장했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135명의 마을 주민이 희생되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은 한국군인이 떠날 때까지 숨어있다가 시신들을 수습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제 정신이 아니었기에 땅을 깊이 파지 못하고 겨우 시신을 덮을 정도로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다음날 한국군인들은 불도저를 끌고 와 무덤과 미처 묻지도 못한 시신들을 갈아 엎어버렸다. 마을사람들은 총탄과 수류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첫번째 학살 그리고 시신들을 불도저로 갈아버린 것을 2차학살이라고 부른다.

1999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언론에 통해 알려진 그 다음해인 2000년 5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마을에서 위령비 기공식을 진행하였고 2만5천 달러를 기탁한다. 이 위령비는 그 기금으로 조성된다.

불도저로 인해 갈려버린 시신 부위들을 모아 함께 매장한 묘
 불도저로 인해 갈려버린 시신 부위들을 모아 함께 매장한 묘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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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안으로 들어가니 양쪽에 당시 불도저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신체부위들을 모아 합동으로 매장한 묘가 위령비 양 쪽으로 있었다. 위령비에는 135명의 희생자 이름들과 출생년도가 새겨져 있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노인, 여성,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중에는 젖도 못 떼었을 아이들도 상당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그렇게 좋은 관계였던 한국군이 하루 아침에 돌변해 자신들을 죽였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한다. 그 만큼 분노도 컸으리라. 바닥 한 켠에 돌로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korea' 그들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하미 위령비 뒤편에는 어색한 연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원래에는 위령비 뒤편에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바닥에 누군가 'KOREA' 를 새겨놓았다.
 바닥에 누군가 'KOREA' 를 새겨놓았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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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를 기리다. ……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하지만 이 비문의 내용을 알게 된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지속적으로 비문의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을주민들은 4차례의 회의 끝에 비문을 절대 수정할 수는 없고 대신 대리석으로 덮어놓겠다는 결정을 했다. 마을 주민들은 역사의 진실을 묻기 위한 한국군인들의 비열한 행위를 3차 학살이라 부른다.

위령비 뒷면. 진실을 덮고 있는 대리석. 연꽃 그림을 그려넣었다.
 위령비 뒷면. 진실을 덮고 있는 대리석. 연꽃 그림을 그려넣었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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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 아이가 내게 와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창피하고 부끄러워 못살겠어요. 이거 그냥 우리가 떼어버리면 안되나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대리석을 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위령비가 만들어진지 15년이 다 되어간다. 마을주민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입구에는 한국국기와 베트남 국기가 걸려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국기를 부러뜨려 버렸다고 한다. 깃대꽂이마저 부러저있어 마음이 아팠다. 10여년이 지나도 대리석을 걷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했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덮으려 하는 모습이 화가났다." (고1, 방소정)

아저씨의 따뜻한 눈물

우리는 다시 샛길을 걸어 나와 팜티호아 할머니댁으로 향했다. 당시 학살의 생존자인 할머니는 2013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저씨는 학살 당시 다른 곳에 있어 화는 면했지만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양쪽 눈을 실명하였다.

아저씨는 담담하게 당시의 이야기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복잡한 감정과 눈물이 올라와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어려웠다. 잠시 진정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니 아저씨가 아이들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들 한명 한명을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했다. 찾아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한 동료교사를 아저씨는 미안해 하지말라며 안아주면서 위로해주셨다. 아저씨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 역시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히 그 눈물의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할머니 댁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팜티호아 할머니댁, 할머니는 2013년 돌아가셨다. 아드님과의 만남
 팜티호아 할머니댁, 할머니는 2013년 돌아가셨다. 아드님과의 만남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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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여기에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꿈에 어머니가 와서 춥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다 같이 와서 향을 피워줘서 할머니가 따뜻하게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음번에 방문할 때에는 아저씨의 마음에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선물을 드리고 싶다 " (고1, 방소정)


태그:#의정부, #청소년, #베트남, #평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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