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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면 꼭 배알하는 곳이 있다.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냐고? 폭포다. 관광객이라면 천지연폭포나 정방폭포가 제격인데 공부하러 온 나그네에겐 이 폭포가 '딱'이다. 그렇다고 나이아가라나 이과수처럼 웅장한 모습을 떠올린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이고 박연폭포처럼 로맨스를 연상한다면 허무하다. 폭포는 폭폰데 물이 없는 폭포다. '엉또' 폭포

제주에 가면 한국 사람이되 한국말을 못 알아듣고 한글세대이면서 한글 난독증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론 통역이 필요하고 해설이 필수다. '엉또'가 딱 그렇다. '엉'은 바위 그늘 집(Rock Shelter)을 의미하고 '또'는 입구를 의미한다. '바위 그늘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제주도 방언이다. 바위그늘로 들어가는데 웬 폭포?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표지판
▲ 엉또폭포 표지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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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넜다. 메마른 개천에 굳어버린 용암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한라산이 폭발하던 화산시대.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면서 굳어진 것이 제주 해변이다. 중 산간 지대에서 용암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폭포 입구에 들어섰다. 방부목으로 길을 다듬어 놓았다. 헐! 30여 년 전, 처음 찾았을 때. 난대림 사이에 동백꽃 피어 있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는데... 있는 그대로 놔두면 안 되나? 새것으로 바꾸고 분칠하면 좋은 줄 아는데, 자연속의 인공구조물. 이건 자연보호가 아니라 자연훼손이다. 지자체의 근시안이 아쉽다.

폭포에 도착했다. 장쾌한 폭포수는 보이지 않고 밋밋한 절벽이다. 꼭 사기당한 기분이다. 폭포도 아닌 것이 폭포 행세를 하면서 사람을 유혹할 것만 같다.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시라. 이걸 누가 폭포라 하겠는가?

절벽
▲ 엉또 절벽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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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자리에 그대로 평범하게 있고 싶었는데 폭포라는 이름을 붙여준 인간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폭포다.

자격도 없는 선조가 왕 노릇하면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왕으로 밀어 올린 신하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능력도 안 되는 인조가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정치가 오버랩 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의 오만일까?

폭포엔 물은 내리지 않고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말라버린 물줄기에 상처받은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처연하다. 열아홉 처자가 알몸으로 서있는 것 같다. 비가 내려야 치부를 가릴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늘이 할 수 있는 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비애. 한남대교 난간에 올라섰던 아버지의 참담함. 밀려오는 바닷물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눈동자. 바다 속으로 잠기는 배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눈 눈 눈.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큼 큰 슬픔은 없다.

어느 정신분석학자가 우리 인간에겐 '편집 분열적 자리'가 있다고 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에어리어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심리의 근저란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 길에 만주벌판을 지나면서 '사나이 대장부 발 뻗고 울어볼 만한 자리'라고 했듯이 모든 것엔 자리가 있다. 절망과 좌절을 겪어본 사람과 상대가 미워 분노가 이글거리는 사람이 이 폭포 앞에 서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 같다.

인간은 위를 바라보았을 때 적막감을 느낀다. 저 새는 날아다니는데 왜 나에겐 날개가 없지? 동창은 판검사에 장, 차관하고 있는 데 내 꼬라지하고는... 친구는 좋은 신랑 만나 잘 사는데 나는 왜?-<돌싱녀>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왜?-<노숙자> 이런 사람이 '엉또'를 보면 위안을 느낀다. 그래서 제주를 치유의 섬. 힐링랜드라 부른다.

인간은 붙박이 생물이 아니다. 그래서 동물이라 한다. 움직이는 DNA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쳇바퀴 생활할 때, 여행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렌다. 소풍날이 정해지면 잠 못 이루는 이유다.

섬이든, 육지든, 해외든 발을 내딛는 순간 힐링은 시작된다. 그래서 여행을 삶의 비타민이라 하지 않은가. 올레 길을 걸어도, 천지연 폭포를 봐도 힐링 플러스다. 힐링은 힐링이되 효율이 문제다. 효율백배 '엉또'다.

제주의 폭포들이 그렇듯이 한라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바다로 향하는 곳에 있다. 헌데 '엉또'는 중 산간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악근천 상류 월산마을 안쪽이다. 행정적으로 얘기하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강정1587이다.

강정 일대는 안산암 지질이다. 경사급변점(傾斜急變點) 아래에서만 지하수를 용출시킨다. '엉또' 폭포는 시간당 70㎜ 이상의 폭우가 쏟아질 때만 폭포의 제 모습을 보여준다. 얄미운 녀석.

비가 내렸을 때 모습. 무인카페에 있는 동영상 캡쳐
▲ 엉또폭포 비가 내렸을 때 모습. 무인카페에 있는 동영상 캡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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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돌려 내려오는데 무인 카페가 손짓한다. 잘 가꾸어진 카페에 외로운 나그네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역시 '엉또'는 외로운 사람들의 은밀한 친구다.

외로운 나그네들의 흔적
▲ 무인카페 외로운 나그네들의 흔적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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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태그:#엉또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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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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