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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명의 항일열사가 투옥된 곳으로 알려진 여순감옥의 모습. 높이 4m, 길이 725m의 붉은색 담벽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2천여명을 수감할 수 있는 큰 규모로 감방 275개가 있다.
 700여명의 항일열사가 투옥된 곳으로 알려진 여순감옥의 모습. 높이 4m, 길이 725m의 붉은색 담벽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2천여명을 수감할 수 있는 큰 규모로 감방 275개가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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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주년 3.1절을 맞아 3.1운동을 3.1항쟁, 또는 기미년독립항쟁, 기미민중항쟁으로 정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소설가이자 정치평론가인 김갑수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SNS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김갑수 평론가는 '3.1운동' '민족대표' '기미독립선언서'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우리는 흔히 '3.1운동'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운동이라니?"라고 되물으며 "운동이란 캠페인(campaign)과 같은 뜻이다"라면서 "이는 대표적으로 독립항쟁을 축소, 왜곡하는 용어"라고 지적했다.

3.1항쟁, 운동에 빗댈 사안 아니다

에이즈예방운동, 물산장려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어떤 목적을 위해 지속적으로 벌이는 활동은 '운동' 또는 캠페인으로 불러야 하지만 '3.1항쟁'은 운동에 빗댈  사안이 아니라는 것.

3.1항쟁 당시 일제의 희생자에 대한 왜곡과 은폐도 문제를 삼았다. 그는 1919년 4월 17일, 하얼빈 발간 <노워스 치즈니>지 재 경성 통신원의 보도 기사를 인용하며 "일본 정부의 왜곡, 은폐로 3.1항쟁시 한국인 희생자 수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당시 통신사의 보도를 종합하면 총살된 사람, 찔려 죽은 사람이 3,730여 명, 부상 후 사망자는 4,500명 이상, 또 감옥에서 죽은 사람과 체포 수감자가 2만이 넘는다"라면서 "일본 군대의 잔학상은 극에 달했다"라는 기사문을 소개했다. 

그는 "수백만 인구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석 달 이상 처절하게 항쟁하다 공식집계로만 7,500명 이상이 학살 당한 역사를 '3.1운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3.1항쟁은 결코 만세운동이 아니었다, 기미년독립항쟁, 기미민중항쟁 등으로의 정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의 '민족대표'도 문제 삼았다. 이들은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하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말이다.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로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오후 3시, 요릿집 태화관(구 명월관)에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일제 간담 서늘케한 3.1항쟁..."민족대표, 과소평가한 것"

소설가이자 정치평론가 김갑수씨의 모습
 소설가이자 정치평론가 김갑수씨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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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평론가는 "그들은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면서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다른 이례적인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꼈던 조선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해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이것이 바로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라며 들불처럼 번진 3.1항쟁의 큰 의미를 부여했다. 글에 대한 댓글도 뜨겁다.

장**씨는 "네 그러네요. 항쟁이라고 우리가 먼저 불러야겠어요. 그런 다음 집권하고 명명! ㅋ"라고 댓글을 달았다. 또 박**씨는 "옳습니다, 왜 우리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국민들과 자기 자신들을 과소평가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습성이 있을까요"라면서 "'동학 농민운동'을 <동학 농민항쟁> 또는 <혁명>으로, '3.1운동'을 < 3.1 독립항쟁>으로, '부마사태'를 <부마 민주항쟁>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5.18 시민항쟁> 등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다음은 그가 쓴 글의 전문이다.

3.1운동' '민족대표' '기미독립선언서' 유감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왜곡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3.1운동'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운동이라니? 운동이란 캠페인(campaign)과 같은 뜻이다. 에이즈예방운동, 물산장려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어떤 목적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벌이는 활동을 '운동' 또는 캠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독립항쟁을 축소, 왜곡하는 용어다.

 "한국인 희생자 수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가 왜곡,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 통신사의 보도를 종합한 우리 숫자는 진실에 가깝다고 여긴다. 소요는 범위가 광대하고, 일본 군대의 잔학상은 극에 달했다. 총살된 사람, 찔려 죽은 사람이 3,730여 명이며 부상 후 사망자는 4,500명 이상이다. 또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다수일 터이다. 체포, 수감자가 2만이 넘는다.

학살당한 한인들은 전혀 무장하지 않은 채 태극기로 만든 종이 모자를 쓰고 독립만세를 불렀을 뿐이었다. 죽은 사람 중에는 부녀자도 있었고 100명 또는 1,000명이 집단 학살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초 일주일 동안 파괴된 교회만 15곳이었다."
- 1919년 4월 17일, 하얼빈 발간 <노워스 치즈니>지 재 경성 통신원의 보도 기사

수백만 인구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석 달 이상 처절하게 항쟁하다가 공식집계로만 7,500명 이상이 학살당한 역사를 '3.1운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3.1항쟁은 결코 만세운동이 아니었다. 기미년독립항쟁, 기미민중항쟁 등으로의 정명이 필요하다.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이것은 최남선 작 기미독립선언서 중 일부를 발췌한 문장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자기 스스로 노력하기에 급한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탓할 겨를이 없다. 현재를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지난날의 잘잘못을 가려 따져 응징할 겨를이 없다." 정도가 된다. 이는 전형적인 '역사 묻어버리기'의 관점이다. 불편하고 위험한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덮어버리자는 근시안적인 발상인 것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의 의도로 온건하게 바뀌면서 내세운 명분이 '비폭력평화주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말대로 과연 조선의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가? 식자층 지도부는 질서를 존중했는지 몰라도 민중은 대거 엄청난 피를 흘렸다.

다음으로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을 '민족대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나약성과 타협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였다.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후 공판의 변론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오후 3시, 요릿집 태화관(구 명월관)에서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군비 일만 원을 헌납한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찼고 나머지는 비웃었다고 했다.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들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대표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 자신도 이런 칭호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하다. 3·1운동의 주체는 중국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2.8선언 유학생들과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탄압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꼈다. 조선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이것이 바로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뭉친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96주년 3.1절을 맞이하여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에 유감을 표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왜곡된 미래가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96주년 3.1절, #3.1항쟁, #기미년독립항쟁,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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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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