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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 커피에 붙인 포스트잇 한 장
 캔 커피에 붙인 포스트잇 한 장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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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대접받는 법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방학 중에 우리 학과 3학년 W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교수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그 친구는 조금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제가 다음 학기 기숙사 신청을 했다가 떨어졌거든요…."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저런, 어쩌다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아빠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면 다음 학기는 휴학을 하라시는 거예요. 자취는 너무 위험하다고요…. 혹시 교수님께서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선뜻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건 다른 학생의 자리 하나를 빼앗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의 간곡한 요청을 무조건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한번 알아보긴 할 건데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면서 W를 돌려보냈다.

나는 기숙사 행정실로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혹시 빈자리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쪽 연락을 기다리는 사이에도 W는 몹시 초조했던지 가끔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때마다 조금 기다려 달라고 밖에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얼마 뒤 기숙사에서 연락이 왔다. 어찌어찌해서 자리 하나가 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담당직원에게 W의 소속 학과, 이름,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그날 오후 늦게 W의 전화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조금 전에 기숙사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부모님도 너무너무 좋아하세요…."

그 친구에게 해준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나는 그 일을 곧 잊었다.

잊고 있었던 그날의 일, 다시 찾아온 학생의 손에는...

개강한 날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W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교수님, 방학 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그래. 너도 잘 지냈지?" "네. 교수님 덕택에 어제 기숙사 들어갔어요. 고맙습니다." "어…? 그래, 아무튼 잘 됐다. 이번 학기에도 열심히 쓰도록 하자. 작품도 열심히 읽고…."

"네" 하고 대답하면서 W는 메고 있던 책가방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들었다.  

캔 커피였다.

"교수님, 이거…."

W는 그걸 내 책상 컴퓨터 자판 앞에 내려놓고는 인사를 꾸벅 했다.

"그래, 고맙다. 잘 마실게."

나는 연구실을 나서는 그 친구를 향해 빙긋 웃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보니 아까는 바삐 나가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캔 커피 옆구리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떼서 읽어보았다. 

교수님께^^

교수님∼,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 약소한 선물이어서 굉장히 민망합니다 ㅠ.ㅠ 제가 좋은 곳에 취직하면 비싼 선물 사드릴게요!! 약속드립니다!! 날씨가 더웠다가 추웠다가 정신이 없네요. 건강 꼭 챙기세요!!

짧은 글이었지만 그걸 읽고 나니 코끝이 다 찡해졌다. 평소 캔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았지만 그날 W가 놓고 간 캔 커피는 아주 맛이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씩 나누어 홀짝거릴 때마다 나는 포스트잇을 읽고 또 읽었다.

W는 졸업을 해서 방송작가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 포스트잇은 2년 넘게 지난 지금도 내 책상 한쪽에 붙어 있다. 가끔 그 포스트잇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W가 훗날 어쩌다가 예전의 그 기숙사 건보다 훨씬 난감한 부탁을 한다 해도 그걸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이 종종 생길 것이다. W처럼 교수의 힘을 빌려 원하던 일을 성사시킬 때도 있을 것이다. 번거로운 일을 도와준 후배나 친구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해준 직장 상사 덕택에 회사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기반을 튼실하게 닦기도 할 것이다.  

"선배님 덕택에 이번 중간고사 완전 잘 봤지 뭐예요. 장학금 받으면 한턱 쏠게요^.^"라고 쓴 포스트잇을 W처럼 캔 커피에 붙여서 그 선배가 공부하는 책상 한쪽에 슬그머니 내려놓을 줄 아는 센스를 발휘해 보는 것이다. 기말고사 때는 부탁하지 않아도 그간 정리해 둔 노트를 선뜻 내줄지도 모른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 온 카페라떼 한 잔에, "팀장님이 계셔서 늘 든든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여서 그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 놓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후 업무 중에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면 그 팀장이 빙긋 웃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할지도 모른다.

캔 커피 하나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1000원이라고 가정하자. 그걸 그대로 전하면 액면가대로 1000원어치 마음밖에 담지 못한다. 그런데 포스트잇에 짧은 몇 마디 말을 적어서 붙인 캔 커피는 1000원이 아니라 그 몇 배 혹은 몇 십 배의 가치를 발휘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적어서 캔 커피에 붙인 포스트잇 한 장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태그:#캔 커피, #포스트잇, #인사,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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