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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과 같이 지낸 방. 엉터리로 모기장을 치고...
 사무엘과 같이 지낸 방. 엉터리로 모기장을 치고...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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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죠? 방값은 500페소씩 나눠 내고..."
"어? 어. 오케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사실 속으로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남자가 한 방을 같이 쓰자는데 왜 안 그렇겠나. 화장실과 싱글베드 두 개가 들어 있는 작은 코티지에서. 발뺌하려니 구차스럽고 마땅한 핑계도 없었다. 벌써 나흘째 같이 다니고 있는 스위스 청년인데...

키다리 청년 사무엘은 대학 4학년생 배낭 여행자였다. 방학 중에 라오스와 베트남을 거쳐 필리핀의 팔라완까지 온 장기여행자. 오늘밤 그는 이곳 사방(Sabang) 비치에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내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팔라완을 떠나 스위스로 돌아간다.

우리는 나흘 전 포트 바턴에서 처음 만났다. 아일랜드 호핑 투어에서 우연히 같은 방카(필리핀 전통 나무 배)를 탔다. 그때 통성명을 하고 서로 데면데면한 채로 하루를 바다에서 같이 보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포트 바턴을 떠나는 만원 버스를 탔다. 지붕과 꽁무니에 승객들의 짐을 잔뜩 실은 버스였다. 내 배낭도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버스에 사무엘도 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또 가볍게 아는 체만 했다.

사방비치에서 구한 숙소 코티지. 가운데에 있는 코티지에서 사무엘과 묵었다.
 사방비치에서 구한 숙소 코티지. 가운데에 있는 코티지에서 사무엘과 묵었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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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인 프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에 오후 2시께 도착했다. 4시간 쯤 남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버스터미널에서 행선지를 밝히며 기사들에게 묻고 물어 '멀티 캅'이라 불리는 미니 지프니를 잡아탔다. 일종의 시내버스였다.

사무엘이 그 차에 또 먼저 타고 있었다. 찾아가는 숙소가 같은 방향이었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이어졌다. 20여 분 후 같은 곳에서 내렸다. 항구로 빠지는 리잘 에비뉴의 동쪽 끝쯤이었다.

사무엘은 전에 묵었던 숙소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며, 거기로 간다고 했다. 작별인사를 나눴다. 나는 배낭여행자들에게 유명한 '반와 아트 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를 향해 주택가 쪽으로 더 내려갔다. 잠시 후, 사무엘이 나를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빈 방이 없더란다. 

그래서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로 사무엘과 동행하게 됐다. 그 숙소는 주택가 골목에 꼭꼭 숨어있었다. 현지인들에게 묻고 물어 찾았다. 유럽풍의 근사한 라운지가 달린 조용한 숙소였다. 주인이 그렸다는 유화작품들이 라운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2층 침대가 들어있는 두 방에 나뉘어 머물고 있었다.

팔라완 배낭여행 32일째. 나는 이 여행의 반을 끝냈다. 프에르토 프린세사는 팔라완의 주도인 가장 큰 도시이고, 팔라완 남북을 나누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간상으로도 위치상으로도 여행의 딱 중간에 와 있었다. 이틀 쯤 그냥 푹 쉬고 싶었다. 24시간 전기가 공급되는 곳이고, 인터넷 접속이 빨라 모처럼 노트북도 켤 수 있었다. 

프에르토 프린세사의 숙소에 달린 라운지에서 빈둥거렸다.
 프에르토 프린세사의 숙소에 달린 라운지에서 빈둥거렸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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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긴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라운지에서 빈둥거렸다. 여기저기 인터넷 카페에다 여행소식과 사진을 올리며. 편안하게 휴식 시간을 가졌다. 사무엘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눴다. 그는 차분하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알프스산맥으로 유명한 사무엘의 나라 스위스는, 네 개의 언어권 지역으로 나뉘었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어, 로망슈어. 그의 가족이 사는 지역은 독일어권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덴마크에서 다니고 있다. 대학 학비가 전액 무료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독일어와 영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프랑스어와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는 틈틈이 파트타임으로 일해 번 돈으로, 방학 때면 세계 여행을 다녔다. 국제적인 청년이었다. 20대 그 나이에 나는 그런 삶을 꿈꿔 보기나 했었나?

사무엘이 알프스산맥에 있는 집과 가족사진을 보여 주었다.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부모님과 대학생인 여동생 사진을. 나는 내 아이들 사진과 지리산 산골마을의 집 사진을 보여주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있는 것들을 찾아서 한옥의 툇마루며, 마당의 꽃이며, 아궁이며...

이틀 동안 그렇게 빈둥거렸다. 아침식사는 라운지에서 오믈렛을 시켜 먹었다. 점심 저녁은 가까운 현지인 식당을 찾아가 싼 음식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나는 다시 여행을 나섰다. 사방(Sabang)이 목적지였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7대 경관에 포함된 '지하강(Underground river)'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의 이번 팔라완 배낭여행에서 북쪽여행지로는 마지막 코스였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불꽃같은 로맨스

빈둥거리며 놀았던 프에르토 프린세사 숙소의 라운지.
 빈둥거리며 놀았던 프에르토 프린세사 숙소의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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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무엘이 나를 따라 나섰다. 마지막 밤을 사방비치에서 보내고 싶다며. 갑자기 동행이 생겼다. 배낭여행을 혼자 하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코스가 같은 여행자들이 뭉치게 된다. 짧게는 하루 또는 이삼 일 정도 동행한다. 미련 없이 또 뿔뿔이 흩어진다. 눈이 맞아 연애를 하는 여행자들도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꿈꿔 보는 여행지에서의 그 불꽃같은 로맨스.

영화 <비포 선 라이즈(Before sun rise)>나, 알랭드 보통의 소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들이, 여행길에서 운명처럼 만난 그 짜릿한 로맨스. 내겐 늘 비켜가는 운명이었지만. 누구나 여행길에서는 청춘이었다.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사랑이요, 또 하나는 여행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프에르토 프린세사에서 미니밴을 타고 1시간 30분쯤 북서쪽으로 올라갔다. 사방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부터 찾아다녔다. 팔라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리조트들이 있는 해변이었다. 몇 군데 리조트를 둘러보았다. 숙박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1000페소(한화로 약 2만5000원)짜리 코티지. 그 방을 같이 쓰고 숙박비를 반씩 부담하자는 사무엘의 제의에, 내가 '오케이' 한 것이었다.

사방 비치에서 맹그로브 숲 투어 쪽 배를 타고...
 사방 비치에서 맹그로브 숲 투어 쪽 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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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여행지에서 낯선 외국 남자와 한 방을 쓰는 게 처음이 아니었다. 인도의 켈커타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꽃다웠던 시절.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3시간 넘게 헤매다가 그렇게 됐다. 가는 곳마다 빈 침대가 없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마침 한 숙소의 직원이 2인실 방에 침대 하나가 비었다며, 그 방에 묵고 있는 손님을 불러주었다. 

밤톨처럼 잘생긴 일본 청년이었다. 그가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동침'에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선뜻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로비에 앉아 있었다. 세상 어떤 남자를 믿을 수 있겠나. 옆에 예쁜 여자가 누워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욕망에 눈이 멀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청년이 깊이 잠들었다 싶은, 새벽 3시께 돼서야 조심조심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두고 벽 양쪽에 싱글베드 두 개가 달랑 놓여있는 작은 방. 청년은 한 쪽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엎치락뒤치락 선잠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담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그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잠이 확 달아났다. 아찔했다. 그가 담요를 주워들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숨도 못 쉬게 긴장했다. 그런데 그가 담요를 내게 덮어주고는, 다시 자기 침대로 가 눕는 거였다. 다음날 나는 신사적인 그의 매너에 대해 칭찬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디 맹그로브'라 불리는 맹그로브 숲 가이드
 '레이디 맹그로브'라 불리는 맹그로브 숲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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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잘 생각해 봐. 네가 꿈을 꾼 것 같은데."

퍼뜩, 그때서야 나는 그가 담요를 덮어주던 그 장면이 꿈속의 장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긴장했었니? 날 나쁜 남자로 생각했던 거야?"

그가 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나의 오해를 인정하며, 사과했다. 그리고는 마음이 완전 무장해제 됐다. 그 청년이랑 이틀 밤을 편안하게 같이 지냈다. 나중에 이 에피소드를 만나는 여행자들에게 말했더니 한결같이 하는 말이 이랬다.

"한국남자는 안 돼! 연애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남자랑은 절대로 한 방에 들어가지 마!"

'기회만 생기면 아무 여자에게나 저돌적으로 달려든다'는 한국남자에 대한 평판은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자자한 것이다. 착한(?) 한국 남자들이 들으면 오명이라며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밤은 그때처럼 괜한 경계심을 품고 떠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맹그로브의 뿌리
 맹그로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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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과 나는 짐을 내려놓고 점심부터 먹었다. 점심을 먹고 사방 비치에서 20여 분 걸어, 강가의 맹그로브 숲 투어 장소(Mangrove Paddle boat tour)를 찾아갔다. 강 하구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쪽배를 탔다. '레이디 맹그로브(Lady Mangrove)'라 불리는 가이드와 함께. 투어 비용은 200페소였다.

쪽배를 타고 맹그로브 원시림 가운데 흐르는 흙빛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이드의 진지한 설명을 들어가며.

'맹그로브는 열대와 아열대의 바다나 강 하구에서 자라는 생명의 나무이다. 특히 염도가 높은 지역에서 자란다. 맹그로브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다. 암나무의 잎은 넓고 둥글며 수나무는 좁고 길다.'

그러고 보니 긴 잎이 달린 나무와 둥근 잎이 달린 나무가 따로 보였다.

'맹그로브 뿌리는 10m도 넘게 흙속을 파고들어 촘촘히 뿌리를 내린다. 뿌리의 일부가 문어다리 모양으로 수면 위에 노출돼 있어서, 뿌리를 통해 산소 호흡을 한다. 뿌리는 고운 입자의 진흙을 붙잡아 퇴적시킨다. 이곳의 진흙층은 수 m에 달한다. 뿌리는 태풍이나 쓰나미가 몰려올 때 방파제 역할도 한다.'

맹그로브 나뭇가지 위에 똬리 틀고 있는 뱀
 맹그로브 나뭇가지 위에 똬리 틀고 있는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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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는 얽히고설킨 긴 뿌리로 갯벌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삶에 대한 억척스러운 애착처럼. 푸르게 빛나는 이파리를 온몸에 피어 올리며...

뿌리 틈으로 게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게, 새우, 진흙 랍스터 등 각종 갑각류가 살고 있다는 맹그로브 숲이었다. 여기저기 원숭이들이 나무를 타고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나뭇가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아래를 지날 때는 오싹했다.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의 '옐로우 스트라이프 스네이크(Yellow striped Snake)'였다.

고요한 강이었다. 돌아서 하구로 내려오던 중에 배가 강가에 섰다. 맹그로브 숲 안으로 대나무다리 길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머리가 맑아지도록 푸른 산소를 들이켰다. 다시 쪽배를 탔다. 가이드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맹그로브 숲이 잘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노래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사방 비치의 중심가를 지나 현지인들이 사는 남쪽 해안가까지 산책했다. 조무래기 아이들이 저녁녘 바닷가에 모여 놀고 있었다.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밥 대신, 레드 호스를 한 병 마셨다.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아름다운 청년을 옆에 두고 나는 이 밤,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키다리 사무엘과 저녁 산책 중에 만난 아이들
 키다리 사무엘과 저녁 산책 중에 만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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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은 대학을 졸업하고 UN(United Nations)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취미는 여행, 등산, 스키, 그리고 책 읽기. 그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 역시 좋아하는 작가였다.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세 번이나 정독했다. 그 작가의 다른 소설 제목들도 떠올랐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그와 책 얘기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영어 실력이 문학담론을 펼치기엔 한참 모자랐다. 모처럼 눈이 반짝 뜨이는 주제였는데.

우리는 오후 8시쯤 숙소로 돌아왔다. 그가 워낙 모기를 많이 타기에 숙소 주인에게 모기약을 부탁했더니, 모기장 두 개를 갖다 주었다. 모기장을 고정시킬 만한 마땅한 것이 설치 되어있지 않아서, 둘이 모기장을 펼쳐들고 낑낑댔다. 엉터리로나마 어떻게 치기는 쳤다.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누웠다. 글쎄, 아름다운 청년을 옆에 두고 나는 이 밤,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종교는 안 믿지만 이런데 와서 죄와 고통 속에 방황하며 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연민이 느껴져. 한 곳에 고통과 행복이 공존한다니 매혹적이야.'

<비포 선 라이즈(Before sun rise)>에 나오는 셀린의 대사가 왜 자꾸 머릿속에서 맴도는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던 그 짜릿한 로맨스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태그:#팔라완, #여행지 로맨스, #배낭여행,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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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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