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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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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가을 어느 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정민아, 엄마 못 걷겠어."

엄마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낯설고 어색했다. 엄마의 울음 소리는 내 마음을 뿌리째 흔들었다. 당장 엄마에게 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아직 퇴근시간이 멀었다.

"엄마, 무릎이 아픈 거야? 그럼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25년 전 그때는 그랬다. 의료보험은 의무가입이 아니었고 지역가입자 중엔 보험료가 가계에 부담이 돼 가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약국에 가실 게 뻔했다.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당시 난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퇴근하고 보니 예상이 맞았다. 엄마가 약사의 말을 전했다.

"몇 살이냐 묻더라. 그래서 내년에 환갑이다 하니까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며 고기를 먹어보래."

답답했다. 고기를 못 먹어서 못 걷는다니. 집도 있고, 자식 넷 중 셋을 결혼을 시켰고, 대학교 2학년에 휴학한 나만 남았는데. 집안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나보다 열두 살 많은 큰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 결혼해서 외국에 살고 있었다. 작은언니와 오빠도 내가 중학교 때 독립해서 나가 살다가 결혼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결혼하는 스물다섯 살까지 부모님과 셋이 살았다.

아버지 일은 경기도에 있는 매장에 화장품을 파는 거였다. 처음엔 사무실이 서울 을지로에 있었다. 그때는 장사가 꽤 잘됐다고 했다. 경리 언니는 바쁜 날은 점심을 못 먹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무실이 서울 외곽으로 이전하게 됐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매장 매니저들이 사무실을 찾기 어렵게 되자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 결국 아버지는 봉고차와 기사를 두고 물건을 팔러 다니기 시작했다. 비용은 늘었지만 매출은 전만 못했다.

가출한 딸을 찾아온 엄마, 번번이 숨어야 했던 딸

그리고 오빠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터졌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하고 재판을 따라다녔다. 집안은 스산했다. 대입 시험을 준비하던 고3 때 작은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너 대학 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언니 오빠가 하도 학생운동을 해서 너도 그럴까봐, 부모님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 대학 떨어지길 바라셔. 그러니 대학 가서 공부 안 할 거면 아예 공장에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

나는 화가 났다.

"언니는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서 왜 나만 못하게 하는데?"
"언니가 대학 갔을 때는 부모님이 젊었잖아. 지금은 아니고."

나는 억울했다. 다행히 작은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에 합격했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재수를 안 시켜줄까 걱정돼서 몸을 낮춰 안정지원을 했다.

대학에 들어간 나는 내 세상을 만난 듯 신이 났다. 학생운동을 한 언니오빠 때문에 고생한 부모님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이 있었다면 나는 절대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비겁해 보였다. 지성인, 인텔리, 그런 단어가 나를 들뜨게 했다.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학생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니오빠에 대한 동일시였을 수도 있고, 언니오빠가 정의롭지 않은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님이 어떨지 진짜 눈곱만큼도 생각을 안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은 뒷전이었다. 나는 공대생이었다. 공과대는 출석 대충 하고 시험 본다고 성적을 주는 일은 없었다. 결국 2학년 2학기 성적은 '올 F'를 받게 됐다. 성적표가 배달되기 전에 가출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성적표가 오기 직전 아버지 환갑잔치가 계획돼 있었다. 나름 치밀했다. 환갑잔치 사진에 빠져서 두고두고 욕을 먹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작은언니랑 형부 그리고 오빠랑 새언니, 나까지 한복을 곱게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을 나왔다. 돈 한 푼 없었지만 걱정이 없었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친구들은 용돈을 아껴 내 차비를 주고 밥을 사줬다. 완벽한 빈대. 지금은 그런 생활을 꿈도 꾸지 못할 텐데 그땐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이삼 개월 뒤 엄마가 나를 찾아 학교에 왔다. 엄마는 번번이 허탕을 쳤다. 엄마가 나타나면 친구들이 그 소식을 내게 알렸고 나는 숨었다.

그리고 다음엔 오빠가 나를 찾아왔다. 오빠는 아예 동아리방에 와서 "정민이 좀 데려와라" 했다. 친구들이 나를 찾아서 오빠에게 데려다줬다. 오빠는 곧 공중전화로 가서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엄마의 "정민아!" 한 마디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는 "얼른 들어와" 한마디를 했다. 나는 그날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 대신 봉고차 타고 화장품 팔러... 그때 알았다

그리고 집에서 꼼짝 않고 지냈다. 학교는 휴학했으니 갈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하던 언니가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아마 매출이 줄어서 언니가 그만둔 게 아닌가 싶다. 집에서 노는 내가 아버지 사무실에 나가게 됐다. 일하면서 알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아버지는 당시 일터의 서예동호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동호회 총무를 하는 젊은 아가씨가 아버지를 보더니 쫓아와서는 한마디 했다.

"표구값 왜 안 내세요? 저도 다 냈는데 회장님이 돈이 없어 안 내신다니 그게 말이 돼요?"

아버지는 내 앞에서 젊은 아가씨에게 쩔쩔맸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시회 표구값도 못 내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고 1991년 가을,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못 걷겠다." 언제나 든든한 부모님은 그렇게 한 순간에,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다행히 엄마는 약사의 조언대로 고기를 먹고 아픈 다리가 나았다. 하지만 이건 곧이어 일어날 일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번엔 아버지가 감기몸살로 앓아 누우셨다. 그 큰 덩치의 아버지가 안방을 차지하고 누웠다. 아버지 턱엔 하얀 수염이 성성했다. 아버지가 누워 계시니 당장 생활비도, 기사 아저씨 월급도, 사무실 관리비도 마련하기 막막해졌다. 누군가는 봉고차를 타고 화장품을 팔러 다녀야 했다. 일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가서 차에 빠진 물건들을 보충하고 기사 아저씨와 경기도 외곽 매장을 돌았다. 기사 아저씨가 나를 매장 앞에 내려주면 나는 주문표를 가슴에 꽉 안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화장품에서 왔습니다. 뭐 필요하신 물건 없으세요?"

애써 웃으며 인사했다. 하루 다섯 군데를 돌면 한 군데 꼴로 물건을 팔았을까? 아버지는 몇 주를 그렇게 누워 계셨고, 털고 일어나서도 한동안은 내근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심하게 앓으셨던 거 같다. 급작스럽게 약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이 하필 그때 왜 내 앞에 파노라마처럼 정신없이 펼쳐졌을까? 아마도 내 가출이 부모님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다.

부모님은 그때까지 나의 보호자였다. 하지만 내가 도리어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는 시기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내 나이 스물하나 가을에 알게 됐다.


태그:#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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