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 영화의 일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정언명제엔 태어남과 늙음의 과정이 내포돼 있다. 문장을 수정하자면 '태어났으면 누구나 늙고 죽는다'가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이 자체로만 보면 암울하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노쇠해진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충실하게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아왔다면 산다는 게 그리 허무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은 살아봄직 한 것'이라는 소박한 외침이 가능한 이유다.

영화 <장수상회>는 인생의 끝자락, 그러니까 노년기를 살아가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을 소재로 삼았다. 지난 26일 언론에 첫 공개된 영화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로만 보면 그 동안 한국영화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실버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손색없다. 단편적으로 떠올리자면 멀게는 <집으로>(2002), 가깝게는 <그대를 사랑합니다>(2010) 정도와 비교할 수 있겠다.

태초에 노인이 있었다...현재엔 파편화된 사람들만 있을 뿐

죽음이라는 상수 앞에서 비극을 강조하든 희극을 강조하든 혹은 둘 사이에서 미묘하게 줄타기를 했든 나름의 자세를 취했던 작품들처럼 <장수상회>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상업 영화의 미덕을 십분 발휘 세련된 줄타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월남전 참전 해병대 출신으로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는 70대 노인 김성칠(박근형 분)과 어느 날 김성칠의 이웃사촌으로 이사 온 70대 노인 임금님(윤여정 분). 각자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노인의 첫 만남은 유쾌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임금님은 민정(한지민 분)이라는 딸과 함께 꽃집을 운영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아내와 남편이 없다는 점에서 파편화된 캐릭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늙음을 인지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물론 김성칠은 특유의 꼬장꼬장함 때문에 투덜거리면서도 동네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기꺼이 임금님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적극적인 건 오히려 임금님 쪽이다. 얼핏 '츤데레'처럼 보이는 김성칠에게 저녁을 사달라거나 놀이공원, 꽃 축제 등을 보러 가자며 조른다. 이들이 50년만 젊었어도 영락없이 꼬리치는 여우라며 뭇 여성들의 질타를 받겠지만 70대 노인의 이런 모습은 한편으로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여기까지 보면 소박한 실버 로맨스 영화라 생각할 수 있으나 영화는 사실 임금님의 이런 노력이 동네 재개발 공사를 진행케 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음을 시사하며 방향을 튼다. 이 과정에서 김성칠은 자신이 출근하는 마트 사장(조진웅 분)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이웃들과 사소한 다툼을 벌인다. 그의 마음을 공유하고 풀어놓을 상대는 함께 월남전에 참전한 이웃집의 최 노인(임하룡 분) 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영화 초반부에 돌연사하고 김성칠은 자신의 인감도장을 뺏으려는 이웃들을 향해 "오늘날 이렇게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라고 항변한다.

사실 <장수상회>엔 노인들만큼 외롭고 서러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임금님의 딸 민정이나 마트 사장은 각각 편모-편부이고, 김성칠의 로맨스를 코치하는 다방 종업원 박양(황우슬혜 분) 역시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낸 인물로 묘사된다. 어쩌면 <장수상회>는 노인들이 주인공이지만 그보다는 파편화된 현대인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타인을 통해 대리만족 하려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기능적 역할에 그치는 주변 인물들...그래서 뒷감당은 다음 세대의 몫?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노인들의 로맨스는 영화 후반부에 들어 급반전을 맞는다. 그들의 사랑은 구실일 뿐이었고, <장수상회가> 전하려던 이야기는 두 노인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설정을 전제로 하고 결국 외로운 파편들의 재결합으로 마무리 되는 걸로 보인다. 관객들이 크게 울 장면들 역시 영화의 3분의 2 지점 이후에 몰려있다.

이 지점에서 다소의 불편함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 앞서 언급한대로 재개발 국면을 맞은 서울의 낙후된 동네라는 점을 기억하자. 표면적으로 이야기는 가족의 결합과 화해를 향해 달려가지만 개발 광풍 속에서 미처 화해하지 못한 세대 간 깊은 갈등은 에둘러 넘어갔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인감도장을 재개발추진위원장이기도 한 마트 사장에게 쥐어주는 장면에서 위화감마저 느껴진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결정했다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던가. 어르신들의 로맨스와 한 가족의 재결합으로 봉합하기엔 그 무게감이 꽤 크다.

또 하나. 스스로 참전용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웃들을 향해 어르신 공경에 대한 일침을 놓는 성칠의 모습은 한편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한 이 시대 윗세대들의 퇴행을 보는 것 같다. 영화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성칠의 시점쇼트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의 시선과 대비돼 극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지만 거기까지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영화는 두 귀여운 노인의 로맨스와 가족 이야기 이면에 '사실 이렇게 노인들을 외롭게 방치한 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라는 꾸중을 담고 있어 보인다. 일례로 자신은 자식들에게 짐일 뿐이라며 자책하는 성칠을 향해 "우리를 기억 못해도 돼요. 악착같이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을 게"라고 자식들은 울며 말한다. 이런 모습은 결국 이 해묵은 세대 갈등의 원인은 자식 세대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종의 꼰대의식과 다름없어 보인다.

분명 50여년 만에 한 작품에서 재회한 박근형-윤여정의 연기는 훌륭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조진웅-한지민, 황우슬혜와 엑소 찬열 등의 감초 연기도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이 맡은 캐릭터들이 부분적 에피소드를 위해 기능적으로 쓰이는 데 그쳤다는 점은 아쉽다.

박범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박해일 분)는 말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늙음 자체는 자연의 섭리일 뿐 잘못이 아니다. 만약 <장수상회> 속 성칠이 "오늘날 이렇게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라고 역정을 내면서도 후에 "사실 이렇게 된 건 우리 때문이었다"는 고백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어른들의 사랑을 찾기에 앞서 왜 가족들이 불행하게 흩어져 살게 됐는지부터 고찰했어야 했다.

물론 <장수상회>는 '불치병'이라는 나름의 장치를 했기에 그 안에서 모든 걸 다루기에 한계는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드라마로 보기보단 판타지로 구분해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분명 흥행요소를 고루 갖춘 영화고, 어느 정도 흥행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서 언급했던 불편함은 쉽게 가시진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장수상회>는 <집으로>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아닌 또 다른 영화들과 비교 언급될 여지가 크다.

장수상회 박근형 윤여정 한지민 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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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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