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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하여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2일 <사람들>은 구미 스타케미칼 굴뚝, 밀양 여수마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파업 농성장을 찾았습니다. – 기자 말

김순자 지부장이 ‘생활 임금 쟁취 투쟁하는 청소노동자 김순자입니다’라고 적힌 <사람들> 이름받기 팻말을 들고 있다.
▲ <사람들> 이름받기 팻말을 들고 있는 김순자 울산과학대지부장 김순자 지부장이 ‘생활 임금 쟁취 투쟁하는 청소노동자 김순자입니다’라고 적힌 <사람들> 이름받기 팻말을 들고 있다.
ⓒ 민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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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을 찾은 3월 22일은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파업이 시작된 지 280일이 되던 날이었다. 울산과학대가 산에 위치한 탓인지 봄인데도 바람이 많이 불었다. 찢긴 플래카드들과 나무에 매단 리본들도 바람 따라 세차게 펄럭였다. 전기와 수도가 끊긴 농성장에선 전기를 쓰기 위해 발전기를 돌리고, 설거지는 받아 온 찬물에 해야 했다. 농성장과 가까운 건물의 출입문은 닫혀 있어 화장실을 가려면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이유는 복직이나 정규직 전환이 아니다. 8시간을 일하는 노동자이지만 생활비로 인해 쌓이는 빚 때문이다. 빚을 다 갚을 만큼의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정부·사회가 말하는 생활임금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생활임금 7910원 전부를 바라는 것 역시 아니다. 최저임금보다 조금만 더. 숨 쉬고 살 수 있게만 해달라는 요구다.

농성장에서 잠시 기다린 후 근처 산에서 등산을 마치고 막 내려온 김순자 지부장(60)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 같았다. 생각하던 투사의 이미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할까요?"라고 말했다.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하니까 우리를 해고해버렸어요"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이고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일한 지는 12년차죠.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사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잘 몰라서 정몽준 이사장이 (울산) 동구에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했죠. 장사를 하던 사람이라 '현대중공업이 잘 돌아가야 장사도 잘 되지'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죠. 일을 하면서 직장이라고는 오십이 넘어서 여기가 처음인데 들어와 보니까 부당함을 알게 되었어요. 비정규직에 대해 알게 되었고요. 그 당시에는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참아야 되는구나 생각했죠."

- 그때는 원래 여당을 지지했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여당의 핵심이었어요.(웃음) 적극적으로 지지했죠. 성격이 적극적이고 애살이 많아서 뭐든 열심히 했어요. 바르게살기위원회, 부녀회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표창상 등을 받았죠."

- 달라진 계기가 있었나요?
"내가 달라진 핵심적인 원인이 있죠. 2006년 6월 13일에 노동조합 가입을 했어요. 서울에 민주노총 장애인 이동권 보장 집회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죠. 광화문에 나가니 휠체어를 타고 다들 나와가지고 자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봤어요.

어떤 장애인은 뇌성마비를 앓고 계셨는데 시설에서 탈출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아나운서가 왜 탈출했냐고 물어보니까 하늘이 보고 싶어서 탈출했다고 얘기해요. '우리가 짐승인가, 소나 돼지가 아닌데 사람인데 왜 우리를 시설에 가두어놓느냐'라고요. 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얘기하고 살았는지, 그 투쟁에 다녀오면서부터 생각했죠."

- 주위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나요?
"그렇죠. 집에서 반대도 하지요. 바위에 계란 치기라고…. 그런데 76일 만에 원직복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데 7~8년이 되었죠. 그동안에 잔잔한 싸움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학교에서 우리를 탄압하기 위해서 업체에 소장을 배치한다거나 출근 카드를 찍으라고 강요한다거나.

싸울 때마다 늘 원칙을 가지고 있었어요. 노동조합을 하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쉬운 길이 있고 어려운 길이 있어요. 쉬운 길로 가다보면 자꾸 일이 어려워지고 꼬입니다. 항시 어려운 일이 부딪힐 때마다 어려운 길을 선택을 했어요. 옳은 길이었죠."

- 노동조합을 하면서 성과가 있었다면 어떤 게 있었나요?
"있었죠. 제일 처음 요구한 게 밥이었어요. 그런데 정보과 형사가 우리를 찾아왔어요. 노동조합을 왜 하느냐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울면서 얘기했어요. 밥도 안 주고 연장 근무수당도 못 받았다고. 당직비도 안 준다고. 그렇게 말했더니 밥을 안주는 건 심한 것 같다며 총장에게 개인적으로 말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올해는 예산이 없어서 못 주고 내년에 생각해보겠다고 답이 왔죠. 결국 제가 식당에 건의를 했어요. 당장 밥을 안주니까 밥을 외상으로 먹자고요. 영양사가 먹으라고 해서 외상으로 먹으러 갔어요. 그렇게 한 달쯤 먹으니까 학교에서 돈 내라고 난리가 났어요. '돈 없다, 못 준다' 배짱을 내밀었죠. 학교에서는 그 뒤에 밥을 먹으라고 전해왔고요.

또 원래 9시 출근인데도 용역노동자들은 다 8시에 출근합니다. 그래서 '시간외근무수당도 안 주는데 출근을 8시 반 즈음 (출근)했다가 학교·조합 눈치를 보고 9시 출근을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래도 되는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돈도 안 주는데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내일부터 8시 반부터 출근하자고 하니 그럴 게 뭐가 있냐며 바로 9시에 출근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 날부터 9시부터 출근한다고 공고를 했지요. 그러니까 직영노동자들이 찾아와서는 대한민국 용역은 모두 8시에 출근한다며, 어디서 8시에 출근하냐며 난리가 났어요. 학교하고, 직영노동자하고 모두 그때 출근을 한다면서요."

- 그러다가 해고를 당하셨고요.
"예, 교섭을 하고 우리가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하니까 우리를 해고해버렸어요. 당시에 경비·식당 직원들도 다 노조가 있었거든요. 제일 먼저 경비노동자 9명을 해고하고, 두 번째에는 식당노동자 18명의 업체를 바꿔버리고 식당은 폐업해버렸죠. 12월 달쯤 되었더니 청소노동자들 우리 차례라는 소문이 드문드문 나더군요. 우리는 절대 못 나간다고 결의했죠. 그러다 해고된 후에는 알몸투쟁도 하고, 정몽준 선거캠프 앞에 가서 노숙시위도 하고 그랬죠.
                  
그래서 결국에 복직하면서 체불임금 2년치를 받아내기도 했어요. 350만 원씩. 당직비, 시간외수당까지 포함해서요. 그러고 나니까 용역사장이 나타났어요. 그 전에는 코빼기도 못 봤는데 사장이 나보고 큰누님, 조합원들에겐 작은누님이라고 부르며 임금을 깎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50만 원 깎아줬죠. 그 사람 말이 자기가 지금처럼 망가진 게 처음이라고 하대요.(웃음) 그러다가 2014년이 됐어요. 임금 교섭을 했는데도 최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생활임금투쟁도 '우리가 선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얘기"

인터뷰 중인 김순자 지부장은 “학교 관계자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며 청소노동자를을 비하하는 그런 인식을 전환해야한다고”했다.
▲ 인터뷰 중인 김순자 지부장 인터뷰 중인 김순자 지부장은 “학교 관계자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며 청소노동자를을 비하하는 그런 인식을 전환해야한다고”했다.
ⓒ 민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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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 건가요?
"아니요, 최저임금만 받은 거죠. 한 해 당겨 받는다고 해도 5210원이에요. 108만 원이 됩니다. 이 돈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평균연령이 60세가 넘습니다. 생활비로만 빚을 2500(만 원)을 집니다. 돈이 크게 들어갈 때가 있어요. 이빨을 해넣는다거나, 어머니가 아프시거나 이런 거는 빚을 내야 돼요. 이자도 늘어나니까 8시간 꼬박 일을 하는데도 계속 빚이 늘어나는 거예요. 최소한 생활은 해야 안 됩니까.

그래서 결의를 했어요. 정부에서 정해놓은 시중노임단가가 작년에 7910원이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이 금액을 가지고 우리가 해보자고 7910원, 상여금 100퍼센트 요구안을 가지고 교섭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이게 너무 기존에 받던 임금과 격차가 크다보니까 조정을 해보자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 지노위(지방노동위원회) 가서 교섭할 때, 조합원들이 '시급 6천 원에 상여금 100퍼센트가 우리 마지노선이다' 이렇게 기준을 세웠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성과금 8만 원을 차등지급 하겠다고 합니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면 더 많이 지급한다는 거죠. 이건 노동자들 이간질하려고 하는 거니 우리는 못 받는다고 얘기했어요. 지노위에서 타결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공문을 보내고 파업에 들어갔죠. 시급을 올리는 건 꽤 쉬울 거라고 생각을 했죠.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정몽준이 서울시장에 출마를 했을 때라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죠. 그런데 지금 9개월이 되도록 이러고 있는 겁니다."

- 이번 파업투쟁으로 사회적 변화는 없었나요?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고 이런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하고 난 이후에 홍대 등 다른 대학에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생활임금투쟁도 우리 조합원들끼리 '우리가 선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2007년에도 이겼다고 생각하니까 이번에도 이기지 않겠나 했죠. 하지만 말이 9개월이지 많이 힘듭니다. 임금협상투쟁을 가지고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나, 우리가 복직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악랄한지. 업체와 4개월 정도 교섭을 했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똑같은 소리만 하고."

- 총장은 졸업식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고요?
"졸업식 때도 안 나타나고, 목소리가 어떤지도 모릅니다. 탄압할 때는 이사장이고 총장이고 모두 뛰어들면서…. 이건 우릴 무시하는 거죠. 그러다 파업에 대해 업무방해 가처분 신청을 하더라고요. 정정길 이사장이 소송을 넣었죠. 그리곤 비 오는 날에 용역한테 쫓겨났습니다. 11일간 안에서 농성을 했다고 330만 원을 압류했습니다. 최저임금을 줬으면 벌금도 최저임금에 맞게 줘야지…. 그리고 여기는 우리 현장입니다. 10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12년 넘게. 전기고 수도고 모두 끊고…."

"억눌려 있던 마음이 대리만족하는 걸 느꼈어요"

- '김순자'를 떠올리면 청소노동자 출신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기억이 가장 먼저 납니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현실정치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2년 총선 때) 진보신당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당이란 걸 보여줘야 된다고,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청소노동자와 함께하는 당이란 걸 보여줘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처음엔 자신이 없는 겁니다. 나는 집에서 살림 살고 노동조합이나 하는 사람인데.

그런데 노동조합을 하고 있지 않는 청소노동자들은 어떨까 싶더라고요. 노조 없는 청소노동자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많이 해왔어요. 그러다 결정하기 전에 부산 해양대에 가서 특강을 했어요. 제게 이런 권유가 오고 있는데, 무권리인 청소노동자가 가장 가슴이 아프다는 얘기를 하니까 박수를 치면서 환희를 하더라고요. 그때 내 느낌에는 억눌려 있던 마음이 대리만족하는 것 같은 걸 느꼈어요. '아, 이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때 힘을 얻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래서 결국 대선까지 나가시게 됐죠?
"더 힘을 얻게 되고, 우연찮게 또 대선까지 나가게 된 거죠. 그때 얘기했던 것이 '최저임금 1만 원'이에요. 지금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이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과분한 일이었죠. 오십 넘어서 노동조합 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고, 평생에 제가 대통령 후보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많이 힘들었지만 (웃음) 후회는 안 합니다."

- 울산과학대 학생들의 태도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우리를 몹쓸 사람으로 보는지 선전물을 줘도 안 받아요. 총학에서 대자보를 썼는데 민주노총을 외부 데모 용역업체래요. '일부 청소노동자들이 그러는 거다. 곧 해결될 거다'라며. 옛날만 해도 대학생들이 사회를 정의롭게 바라보지 않았습니까. 특히 울산과학대학은 현대그룹(산하 재단)이라 더 심한 것 같아요. 홍대고 다른 데에는 몇 명은 (청소노동자 투쟁에) 함께하고, 음료수도 사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단 한 명도 없어요. 이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청년, 대학생, 노동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 먼저 노동자가 될 대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지금 내가 다니는 대학교의 청소노동자는 어떤가,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서부터 모의교섭을 배운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 길이 없잖아요. 노동자의 논리는 배우지도 않고 자본가의 논리만 배우니까. 돈 주는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그런 생각, 참는 게 대수라는 생각 그런 것을 버려야 합니다. 차비를 내면 잔돈을 받아야 하듯이 내 문제에 대해서 내가 말해야 합니다. 누가 말해줍니까."


태그:#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임금파업, #노동조합, #김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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