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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을 여행 중일 때, 미술사 박물관엘 들렀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키스>는 미술사 박물관이 아닌 벨베데레 궁전에 있다고 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미술사 박물관에 들어서면서도 나는 그저 이따가 궁전에서 <키스>나 제대로 봐야지, 하는 마음 뿐이었다.

하나의 방을 통과하면 또 다른 방이 나오는 듯한 구조로 이루어진 박물관을 천천히 돌고 있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였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공주의 모습을 담은 몇 개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공주의 얼굴이 묘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 공주의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이드 북에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났다. 초상화 속 공주의 얼굴은 공주를 딸처럼 사랑했던 벨라스케스에 의해 미화된 얼굴이라고 가이드 북은 말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명적인 유전인자가 공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공주의 턱은, 일명 '합스부르크 립'이라고 일컬어지는 주걱턱이었다는 것이다. 주걱턱으로 아름다움을 잃은 공주의 얼굴. 벨라스케스는 붓으로 그녀의 얼굴을, 아니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림 속에서나마 아름다운 얼굴을 갖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 그것만으론 '시시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표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표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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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박물관을 둘러보던 친구는 어느새 내 옆에 서서 공주의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초상화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우리는 그림 앞에 나란히 서서 공주에 대해, 여자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어서 결핍에 대해서도 그리고 운명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들어올 때의 마음과는 달리 이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다시 만났다.

여자는 남자를 떠났었다. 자신을 떠난 여자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남자는 수소문 끝에 여자를 찾아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 앉은 두 연인. 다시 재회한 남자에게 건넨 여자의 선물은 모리스 라벨의 곡 모음집이었고, 타이틀 곡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에 매료돼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했다.

연인이 앉아 있는 카페의 안쪽 벽면엔 수십 장의 명화가 붙어 있었는데, 여자는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이라고 말해 주었다. 남자는 그 그림을 유심히 쳐다봤다. 중심에 선 마르가르타 테레사 공주가 아닌 주변부에 서 있는 시녀들이 남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중 검은 옷을 입은 난쟁이 시녀가 특히 그랬다. 아름답지 않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시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많이 닮아있었다. 

가혹한 세상과... 들러리 선 시녀처럼 서 있던 그녀와 나를 떠올린다.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 속에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지금의 나도, 스무 살의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했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남자를 떠난 여자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서 여자는 남자를 떠난 이유로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나라는 여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남자는 언제가 여자를 떠날 것이었다. 남자는 분명 변할 거였다. 왜냐하면 여자는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라고 밖에는 달리 다른 표현을 생각할 수가 없네요. 정말이지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할 수 없었어요. 게으름을 부린 것도,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의식도 없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있었고, 어떤 의도도 지니지 않은 채 그냥 태어났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남자는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서서히 둘은 가까워졌고, 조심스레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가던 호프집의 테이블에 여자는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는 흐느껴 운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 '전... 너무 못생겼어요.'

지독히도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친구 요한은 물었다. 그 여자를 좋아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좋아해 주고 싶은 건지. 또 이렇게도 말했다. 여자에겐 무정보다 더 비참한 것이 동정이라고. 동정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거라고.

동정이 아니었다. 좋아해주고 싶은 것 역시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가 그저 좋았다. 남자에게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 만큼 작은 것이었다. 그런 남자가 보기에 우리 인간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한 곳만을 더듬고 또 더듬고 있는 듯 보였다.

내면은 보지도 않고 외면만을 보고 또 보고, 평가하고 또 평가하고,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었다. 반면 남자는 "어떤 인간도 돈 있어, 만으로는 스스로 인생을 책임질 수 없"듯이, "어떤 여자도 오빠, 나 오늘 예뻐? 로 평생을 버틸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남자가 사랑하게 된 여자는 남자가 아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남자와는 다른 듯했다. 아름다움은 열광해야 마땅한 것이고, 추함은 멸시해야 마땅한 것이라는 듯 사람들은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모질게 악담을 퍼부었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모진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빛을 잃어갔으며, 빛을 잃어가는 건 비단 이들뿐만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악담을 퍼붓던 사람들 역시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들은 당연한 듯 자신의 빛을 아름다운 한 명에게만 몰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빛나는 그 한 명을 숭배하고 또 숭배하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친구 요한은 그래서 우리 인간을 어리석다고 했다. 

어둠 속에 감춰진 내 빛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그들에게 목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 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 그리고 서로의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 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남자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한 여자의 빛을 남자는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자기 자신의 빛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눈이 먼 장님들이 한 곳만을 더듬고 또 더듬었던 결과였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려 하는 여자. 이런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건 계속 여자를 사랑하는 일, 그것 하나 뿐일 테다.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의 빛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빛까지 무심히 꺼뜨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름다운 한 명에 우리의 빛을,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숭배를 모조리 내어주다 보니 우리는 요한의 말처럼 정말 어둠 속에서만 살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서 외롭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빛을, 옆 사람의 빛을 다시 환하게 밝히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가의 말'에서 박민규는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시시하게' 만들어 보라고.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라고 생각해 보라고. 아름다움을 추앙하고 그것만을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것만으로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이라고 말 해보라고. 박민규의 해답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시시한 걸 좇는 일은 정말이지 영 시시해 그닥 좇을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작가의 말' 중에서

벨라스케스가 죽은 이후 그려진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화에는 그녀의 주걱턱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나는 이 이유가 그녀를 그린 화가가 벨레스케스 만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벨라스케스는 사랑으로 그녀를 아름답게 그려주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 그녀가 아름답게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사랑을 통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그의, 그녀의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덧붙이는 글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예담/2009년 7월 20일/1만 2천 8백 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예담(2009)


태그:#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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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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