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계 최초의 항암제는 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연구하던 '머스타드 가스'로 알려져 있다. 시초가 독가스였던 것처럼 지금까지 대부분의 항암제는 효과와 더불어 부작용 또한 강해 환자들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그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재는 제약산업의 빠른 발전으로 각 암종마다 항암치료제가 개발됐다. 그리고 최근 출시된 '표적(치료)항암제'라 불리는 약제들은 정상세포는 덜 파괴하고 암세포 위주로 공격하는 기능을 탑재했다. 탈모, 장기손상, 손톱 짓무름 등과 같은 전형적인 부작용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가까운 미래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것이 꿈같지만은 않다. 하지만 표적항암제의 등장으로 가장 크게 기뻐해야 할 암환자들이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한 달 약값 천만 원... 실비보험 들어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김경희(35)씨는 2009년 9월, 첫째 아이 임신 중 결핵으로 보이는 증상이 발견돼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암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출산 후 바로 조직검사를 받았고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의사의 진단은 폐암 말기였다. 폐암은 현재 '5년 생존률'이 각 병원별로 확인해도 20%대에 머물러 있다. 김씨는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경남 진해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녔다.

항암치료는 고통스러웠다. 항암주사제를 투약받고 나서 하루에 가래를 1000ml씩 뱉어내야했고 몸은 몇 걸음만 옮겨도 쉽게 지쳤다. 2013년까지 여러 가지 항암주사제를 바꿔 써봤지만 부작용에 따른 고통은 여전히 극심했다. 특히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의 아픈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글로벌제약 화이자의 경구용 표적항암제 잴코리(크리조티닙)
 글로벌제약 화이자의 경구용 표적항암제 잴코리(크리조티닙)
ⓒ 화이자

관련사진보기


2013년 4월 김경희씨는 또 한 차례 조직검사를 받았다. 여기서 새롭게 발견된 것은 김씨의 폐암이 ROS1 유전자 변이에 의한 '비소세포폐암'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생존율이 희박하지만 이 사실은 그녀에게 커다란 희소식이었다. 그 이유는 ROS1 유전자 변이에 의한 비소세포폐암에 획기적인 성능을 지닌 글로벌제약사 '화이자'의 경구용(먹는) 표적항암제 '잴코리(크리조티닙)'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적어도 6개월 이상 더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표적항암제들은 막대한 개발비가 투입된 신약이기 때문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격이 높다. 잴코리의 경우 한 알 가격이 16만7500원이다. 일일 복용량은 두 정, 한 달 약값은 천만 원에 이른다. 다른 표적항암제들도 마찬가지로 가격이 상당하기 때문에 환자들이 민간실손보험의 혜택을 받지 않고 구매하기란 매우 어렵다.

다행히 김경희씨는 메리츠화재의 실손보험 상품에 가입해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바로 잴코리 복용을 하지는 않았다. 1년간 잴코리를 복용하게 되면 그 금액은 총 1억2천만 원. 실손보험의 연간 입원치료비 보장한도 총액은 3천만 원이었다. 민간실손보험금으로도 턱없이 부족했기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장 한도까지 만큼은 믿었는데, 도로 돌려 달라 할 줄은...

김경희씨는 2013년 9월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한 달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마지막 선택은 잴코리 복용뿐이었고 그녀는 아이에게 작별을 고할 잠시만이라도 잴코리를 복용하기로 결정했다.

효과는 놀라웠다. 단순히 엑스레이상의 검사 결과가 좋아진 것을 넘어 복용 3일째부터 김 씨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질 정도로 상태를 회복했다. 완치는 아니지만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잴코리를 계속 복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보험상품의 약관대로라면 적어도 연간보장한도 3천만 원까지의 잴코리 비용에 대해서는 청구가 가능했다.

김씨는 폐암 상태 검사 및 항암제 복용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기간 중에 잴코리를 한 달씩 처방받아 복용했다. 그리고 진료비(약제비 포함) 세부내역서를 보험사 측에 보내 보험금을 청구했고 보험사는 순조롭게 두 달 치까지 보험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마지막 석 달째 입원치료비(약제비 포함)를 청구했을 때 갑자기 보험사는 태도를 바꿔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 연기인 줄 알았던 김경희씨는 재차 보험금 지급 여부를 보험사 측에 문의하려 했을 때 충격스러운 통보를 받게 됐다.

메리츠화재는 항암제 잴코리에 대한 천만 원 상당의 입원치료 보험금을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통해 지급하지 않을 것이고, 이미 보험금으로 지급한 2천만 원 상당의 금액도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해 김씨로부터 돌려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폐암보다 더 무섭게 환자의 숨통을 옥죄는 소송이 지난해 초부터 시작되었다.

보험사 "보험약관은 퇴원약을 포함하지 않는다"

'경구용 표적항암제 보험금을 미지급하는 민간보험사 횡포 고발' 릴레이 시위에 첫 번째로 참가한 김경희 씨
 '경구용 표적항암제 보험금을 미지급하는 민간보험사 횡포 고발' 릴레이 시위에 첫 번째로 참가한 김경희 씨
ⓒ 환자단체연합회

관련사진보기


메리츠화재가 소송에서 잴코리 비용을 돌려달라며 내세운 논리는 놀랍게도 표적항암제 잴코리의 뛰어난 '표적치료효과' 때문이었다. 기존의 항암제들은 부작용이 심해 당연히 입원을 전제로 처방했지만 잴코리와 같은 표적항암제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기 때문에 다르게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메리츠화재는 아무리 입원기간 중 처방 받은 약일지라도 잴코리는 원래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약인데다, 실제로 김경희씨는 불과 2, 3일씩 입원 후 퇴원했기 때문에 "김경희씨가 집에서 복용한 잴코리는 '퇴원 후 복용하는 약(아래 퇴원약)'에 해당하며, 약관상 보험의 보장범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경희씨 측의 주장은 다르다. 잴코리 복용 후 몸을 어느 정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뿐이지 일부 항암제 부작용을 여전히 겪어왔고, 입원 2, 3일 후 퇴원한 것은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겨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입원치료를 받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녀는 증거자료로 두 달간 타 병원에서 입원한 증거를 소송에 제출하기도 했다.

또 보험사의 주장 중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퇴원약'을 약관상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보통 실손보험의 약관을 보면 '입원치료비'와 '통원치료비', 두 가지를 보장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환자가 병원에 '입원' 아니면 '통원'해서 치료받는 방식이 전부이기 때문에 언뜻 치료비 전부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데 메리츠화재는 이번 소송을 계기로 '퇴원약'을 입원치료비에서 분리해 실손보험의 보장범위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메리츠화재의 법무팀 담당자는 환자단체와의 면담에서 "현재 보험사들은 고가 비급여 퇴원약에 지급을 해주기도 하고 안 해주기도 한다"면서 "향후 경구용 표적항암제와 관련해서는 퇴원약에 대한 보장을 하지 않는 판례를 만들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금융소비자연맹의 보험전문가는 "현재의 약관상으로는 입원치료비의 보장범위에 대한 해석이 분명치 않아 문제될 소지가 있다. 이번 소송은 사실상 사법당국의 판단에 따라 결정 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같은 퇴원약이라도 경구용 표적항암제 같은 경우는 다른 비급여 약제와는 성격이 다르고, 처음으로 쟁점이 됐기 때문에 기존의 판례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경희씨는 하는 수 없이 한 달 동안 매일 병원을 다니며 통원치료비를 수령했고, 그마저도 횟수가 30회로 한정돼 있어 그 이후에는 개인 비용을 들여 잴코리를 복용하고 있다. 사실상 메리츠화재에게 2천만 원을 빼앗기면, 2년에 걸쳐 받은 통원치료비 1800만 원을 빼고는 이제껏 복용한 잴코리 비용 1억 원 이상을 모두 김씨 개인 비용을 들여 구입한 셈이 된다.

더 가혹한 것은 수개월도 기약하기 힘든 말기 폐암환자가 매일 병원을 오가는 고통과 함께 가족과 함께 보낼 한 달의 시간을 허비했다는 점이다. 김씨는 자신이 왜 민간보험에 가입했는지 모르겠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입원환자의 퇴원약은 암, 희귀난치성질환 등 중증질환자들이 보장받아야 하는 중요한 치료비 영역이다. 최근의 항암제는 일정 기간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은 후 경과가 좋으면 퇴원해 집에서 항암제를 계속 복용하면서 치료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실손보험 가입자들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경구용 먹는 항암제를 복용할 수 있도록 약값에 대한 보장을 해주는 것은 환자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고 민간보험사가 반드시 해야 할 도리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건강보험 공백기 손해 환자에게 떠넘기는 보험사들

현재 건강보험 적용되는 표적항암제 종류
 현재 건강보험 적용되는 표적항암제 종류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련사진보기


현재 글로벌 제약사들은 '표적항암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이미 상당수는 국내에서도 시판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4월 1일 기준 국내에서 건강보험적용을 받고 있는 표적항암제는 21가지다. 그리고 현재 건강보험 비급여로 시판되는 표적항암제는 잴코리를 비롯해 더 많이 있다(잴코리는 2015년 5월 1일부터 건강보험 적용).

하지만 표적항암제가 워낙 고가이다 보니 정부가 섣불리 건강보험 급여약제로 등재하지 못한다. 신약의 경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급여적정성을 평가한 후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효과성을 입증하는 약제는 60일 이내에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 간의 약가협상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의 줄다리기가 팽팽해지면 오랜 기간 약가협상에 돌입하게 되고 수개월이 훌쩍 지난다. 그러다 협상이 결렬되면 다시 그 이전 절차부터 밟아야 해 오랜 시간이 소모된다.

이런 건강보험급여의 공백기 동안 이미 비급여 약제로 시판되는 표적항암제들을 보험사들은 선뜻 보장하기를 원치 않는다. 보험사들은 일종의 수익보장 안전장치로서 '보장한도', '면책기간' 등을 약관에 정해 놓았다.

표적치료제 사용 환자수 증가현황
 표적치료제 사용 환자수 증가현황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표적항암제가 다수 등장하면서 향후 상당수 암환자들이 보장한도까지 보험금을 타게 되는 상황이 예측되자 보험사들은 적극적으로 보험금 지급 거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표적항암제 사용 환자 수는 2014년 기준 3만7천여 명으로 2008년 1만2천여 명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났고, 앞으로 더 급속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보험금 지급 관련 소송에서 나온 판례는 전체 보험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번 김경희씨와 메리츠화재 사이의 소송은 앞으로 상당수 암환자들의 표적항암제 보험금 지급여부를 결정하는 사안으로서, 여러 환자단체들이 이 재판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환자단체연합회는 지난 4월 14일부터 금융감독원 앞에서 '경구용 표적항암제 보험금을 미지급하는 민간보험사 횡포 고발' 릴레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앞으로 표적항암제를 복용하면서 민간실손보험사로부터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한 피해자들을 모아 법적 대응에 나설 방침이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환자단체연합회, #젤코리, #메리츠화재, #표적항암제, #보험금미지급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