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신의 한수>에서 생활형 내기바둑꾼 꽁수 역의 배우 김인권이 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김인권. ⓒ 이정민


17년 차 이 배우가 연기하는 재미를 잃었다. 천만 명의 관객도 동원(영화 <해운대>)해봤고, 최근까지도 <쎄시봉>에 출연했으며 차기작 <히말라야>까지 촬영하는 등 바쁜 일정인데도 이 모든 게 허망했다고 한다. 대중에게 유쾌한 이미지로 알려진 김인권의 말이다.

마치 타다 만 장작 같았던 김인권의 마음에 불을 붙여준 건 다름 아닌 저예산 영화 <약장수>였다. 순제작비가 4억밖에 안 되는 초저예산 작품이 중견 배우의 마음을 움직인 거다. 속칭 떴다방, 그러니까 나이든 어르신들을 상대로 놀아주며 약이나 생활용품을 팔며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소재인 작품이다. 김인권은 이 중 초보 약장수인 일범 역을 맡았다. 다른 한국영화들이 <어벤져스2>와 대결을 피할 때 오히려 <약장수>는 같은 날 개봉하는 강수를 뒀다. "개봉한다는 자체가 기특하다. 우리는 아이언맨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는 전략이다"라며 김인권이 웃어 보였다.

사기단이라지만 약장수들은 자식들이 외면한 현시대의 부모들과 시간을 보내준다. 유희로 가장한 사기는 분명 범죄지만 이들의 존재가 이 사회에 상징하는 바가 크다. 김인권 역시 "처음엔 범죄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연기를 했는데 하면서 약간의 순기능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뉴스를 보니까 이들을 경찰이 잡아가려 하니 어머님들이 탄원서도 쓰더라. 사회적으로 악당이지만 우리네 엄마들에겐 나름 고마운 사람인 거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벤져스2>의 50분의 1만이라도 관심 주면 한국 영화 살아난다"

'약장수' 김인권, 절을 해서라도...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일범 역의 배우 김인권이 할머니들에게 절을 하는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약장수>는 외로운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과 생활용품을 파는 홍보관을 배경으로 아픈 딸의 치료비를 위해 홍보관 직원으로 취직한 주인공 일범의 생존기를 다룬 휴먼 드라마다. 4월 23일 개봉.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일범 역의 배우 김인권이 할머니들에게 절을 하는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소액의 출연료를 추후에 받기로 하면서까지  작은 영화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분명하다. 배우는 자신의 필모그라피로 말하지 않는가. 김인권 하면 상업영화의 감초로, 주조연으로 확실한 입지를 다졌지만 이와 함께 <방가? 방가!>(2010) <신이 보낸 사람>(2013) 등의 작품으로 사회적 의미를 온몸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영화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기여한다는 거요. 상업영화가 달콤한 사탕이라면 저예산, 독립영화는 입에는 쓸지라도 몸에 좋은 약 같은 거예요. 이번에 함께 출연한 박철민 선배도 이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넓어요. 작은 규모지만 <약장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자식이 세 명이라 당장 돈이 되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이런 작품도 꾸준히 하고 싶어요. 그래야 더 다양한 작품이 나올 거 아녜요. 오락영화는 갈수록 발전해 가는데 이런 사회적 영화는 그 힘이 약해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국노래자랑>(2013) 개봉 때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형님(<아이언맨3>)이랑 붙었네? 숙명인가 봐요(웃음). 분명 우리 영화도 상업적으로 크게 가는 추세이고 저 역시 찬성하는 쪽이지만 다른 길을 가는 영화도 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약장수>처럼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마저 상업적 결과로 재단해 버리면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만큼 김인권은 증명하고 싶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힘을 그는 강하게 믿고 있었다. "오늘 오전(인터뷰 당일인 22일) 운동하며 뉴스를 보는데 할머니들이 자식과 연락 안 된다며 한탄하는 소식이 나왔고, 바로 다음 뉴스가 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사주는 강남 엄마들 이야기가 나오더라"며 "그 아이들이 커서 엄마와 연락 안하고 사는 걸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잃고 있었던 순수성..."매너리즘 빠진 것에 반성했다"

'약장수' 박철민-김인권 "한번만 도와주세요"  3일 오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박철민과 김인권이 작품 속 한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약장수>는 외로운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과 생활용품을 파는 홍보관을 배경으로 아픈 딸의 치료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홍보관 직원으로 취직한 주인공 일범의 생존기를 다룬 휴먼 드라마다. 4월 개봉 예정.

▲ '약장수' 박철민-김인권 "한번만 도와주세요" 3월에 열린 영화<약장수>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박철민과 김인권(오른쪽)이 작품 속 한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 이정민


'약장수' 김인권, "한번만 도와주세요"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배우 김인권이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배우 김인권이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자연스럽게 김인권의 세 딸 이야기로 옮겨갔다. 최근까지 유행했던 여러 육아 예능 프로 출연 제안도 받았으나 한사코 거절했단다. "나 역시 20대부터 배우를 하다 보니 마땅히 가졌어야 할 그때 일상의 경험들이 없더라"며 "일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해야지 너무 일찍부터 미디어에 노출되는 건 아닌 거 같다"고 소신을 밝혔다.

"사실 저도 운이 좋았죠. 사회적 문제에 전혀 생각 못하다가 <방가? 방가!> 같은 영화를 하면서 그런 시각을 깨달아 왔어요. 동남아 노동자, 386세대 문제들에 공감한 거죠. <약장수>에서 제가 맡은 일범이라는 캐릭터도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제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기도 했고, 자식도 키우다 보니까 감정 이입이 많이 됐죠.

사실 이 영화에 나온 일범이 그냥 제 일상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더 애착이 갑니다. 사람들은 제게 코믹함을 기대하는데 평소엔 진지하고 그래요. 생각도 많고요. 영화가 잘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선 일범이가 관객들에게 좀 공감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영화를 보면 왠지 사랑을 많이 못 받는 인물 같더라고요. 제 인생 역시 그런 게 아닌가. 왜 분 바르는 게 직업인 사람은 믿지 말라는 업계 속어가 있잖아요? 연기하면서 내 정체성을 버려오면서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약장수>를 통해 스스로 순수성을 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작품을 안했으면 또 어딘가에서 코믹 연기하면서 마냥 까불고 그랬을 겁니다."

공허함과 소모되는 삶을 얘기하면서 김인권은 눈시울을 붉혔다. 조심스럽게 슬럼프가 온 것 같다고 하니 그 역시 "사실 연기하는 게 요즘 재미없었다"고 답했다. "촬영이 없을 때면 선배들이 왜 그렇게 혼자 멍하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던지 알 것 같았다"며 "매번 관객에게 보이는 삶만 살다 보니까 나 역시 자기 성장이 없었던 거 같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장수' 김인권, "한번만 도와주세요"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배우 김인권이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약장수> 시사회에서 배우 김인권이 작품 속 한장면을 재연하며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차기작인 <히말라야> 촬영을 위해 몽블랑에 올랐을 때도 김인권은 혼자 눈물 흘린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코미디 연기할 땐 참 내가 하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스타성 없고 티켓파워도 없지만 아마도 지금을 지나면 한 층 더 성장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전했다.

과학자와 대통령을 꿈꿨던 김인권은 분명 지금은 대중 앞에 분을 바른 채 서있다. 포복절도하게 하는 웃음이든, 마음 한켠을 건드리는 슬픔이든 그가 최선을 다해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일상성의 연기,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감. 이건 다른 스타 배우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미덕이다. 분명 김인권은 그걸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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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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