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럽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패러다임과 시스템, 그 바탕에는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깔려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 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 사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한 유럽'은 이런 바탕을 가진 유럽 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일상 체험 여행기입니다. - 기자 말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학교 앞에 '카페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가 생긴 건 놀라운 사건이었다. 싸고 허름한 대폿집이나 포장마차에 길든 가난하고 촌스런 문학청년들은 당혹스러웠다. 고모집·형제집·제기시장 닭발집·서브웨이 다방 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세련되고 품격 있는 상호를 내건, 새로운 시공간이 반가웠다. 그리고 황송했다. 특히 문학청년들에게는 마치 범접하기 어려운 피안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들은 시나 소설을 끼적거리며 머나먼 이국과 이색적인 것을 늘 염원하고 상상했다. 문학청년이라면, 실존주의자라면 어느 정도 기본 신상정보 정도는 파악하고 있던 '카프카' 때문이 아니었다. 미지의 동구라파 여인,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 에젠스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후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는 그 동네 문학청년들의 단골 카페이자 연인이 되었다. 신비로운 존재로 등극했다. 그러니까 유명한 카프카보다는, 무명의 밀레나가 그 카페의 정체성과 위상 그리고 하루 매상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들이 문학을 하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며 살던 '체코'라는 머나먼 이국. 그곳은 점점 동경과 선망의 이상향이 되었다.

나도 한때 문학청년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이 나라의 수많은 청년들이 통과한 의례대로.  카프카가 창작한 <변신> <성> <유형지에서> 같은 소설의 주제, 구성, 문체는 흥미진진했다. 소설을 읽고 나면 나도 카프카처럼 갑충이나 실존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래서 프라하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도 카프카의 소설무대인 프라하성이다. 게다가 성 안의 황금소로에는 카프카가 머물던 집필실도 있단다. 그 곳의 위치를 프라하 여행지도에 빨간 사인펜으로 뚜렷하게 표시해둔 건 물론이다.

16세기의 골방에서 20세기의 실존주의를 쓰다

프라하성 황금소로의 카프카 집필실
▲ 파란벽 집 프라하성 황금소로의 카프카 집필실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프라하성의 후미진 곳, 황금소로(Zlata Ulicka)에 있는 카프카의 집필실은 보기에 몹시 옹색했다. 황금소로에는 16세기부터 황금 세공사, 성채 수비병 등이 살던 빈민가의 골목, 주택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물론 관광객에게 보여주려고 기념품가게, 무기박물관 등으로 리모델링됐지만 모양과 구조는 500년 전 그대로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살던 동화나 만화 속의 마을 같다.

파란 벽의 22호 집이 바로 카프카의 집필실이다. 여동생 집을 잠시 빌린 것이라 한다. 1916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6개월여 머물며 소설 <성>의 초고를 집필했다. 16세기가 실존하는 공간에서 20세기의 실존주의자 프란츠 카프카는 실존주의를 문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카프카의 <성>은 프라하성에서 썼지만 두 성은 종류나 성질이 다르다. 프라하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롭게 찾아오지만 카프카의 성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토지측량기사 K는 성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성에 들어가려하지만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카프카는 복잡하고 기괴한 관료기구에 둘러싸인 성이, 누군가 성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정했다. 늘 세상이라는 성 밖에 있던 아웃사이더 카프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거대한 관료주의 앞에 한없이 무력하고 초라한 개인의 존재를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이른바 진실의 성 안으로 접근하고 진입하는 통로가 원천 봉쇄당한, 근혜산성 앞에 선 세월호 유족들의 처지다.

그래서 프란츠 카프카는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존재의 불안을 극한의 상황 설정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다. 개인의 고독, 무력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처절하게 묘사하는 창작기법은 그를 특징짓는 '주무기'다.

블타바 강변 뒷골목의 작은 책방 '셰익스피어'의 진열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변신>이 놓여있었다. <변신>은 카프카의 대표작이다. 하루아침에 갑충으로 변한 월급쟁이의 운명을 지독할 정도로 처절하게 자조하고 풍자한다.

체코어로 비련의 사랑을 나눈 '프라하의 연인'

카프카, 쿤데라, 하벨을 낳은 '문학의 자궁' 같은 프라하 시가
 카프카, 쿤데라, 하벨을 낳은 '문학의 자궁' 같은 프라하 시가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법학박사인 카프카는 노동자 상해보험회사에서 '갑충 같은 월급쟁이'로 밥벌이를 했다. 일터에서 노예 같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일상적으로 목격했다. 그런 개인적 민생체험이 소설의 밑바탕에 깔렸으리라. 결국 <변신>은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카프카의 자화상 혹은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그는 당시 나치 치하의 체코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 살았다. 모국어인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글을 썼다. 정확하게는 프라하 독일어라 한다. 보헤미아의 유대인과 비주류 기독교인들의 언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체코 국민들은 모국어를 버리고 독일어로 문학을 한 카프카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죽어서도 외로운 실존주의자다. 비록 카프카를 기리는 박물관도 따로 있고, 책방마다 그의 소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카프카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참을 수 없이 가볍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카프카가 유언처럼, 예언처럼, 경고처럼 세게 들린다. 친구로서 카프카와 카프카의 작품을 사랑했던 막스 브로트는 "모든 원고를 소각하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무시하고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했다. 그가 고맙다.

그중 체코어로 쓴 몇 편의 원고도 전해진다. 그의 연인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보낸 편지다. 카프카가 교류한 여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문학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소통이 가능했던 여인이다. 체코의 명문가 출신 페미니스트라서 그럴 것이다.

카프카와 인연은 단편 <화부>를 체코어로 번역하면서 맺어졌다. 이후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일종의 정신적 피난처가 되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교감이 가능했다. 굳이 체코어로 쓴 카프카의 편지가 뚜렷한 물증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불륜이자 비련의 운명이었다. 밀레나는 유부녀였다. 남편은 카프카의 친구였다. 밀레나는 체코의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생전의 카프카는 결핵에 걸린 유대인 무명작가의 신분이었다. 13살의 나이 차이도 적지 않았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이 '프라하의 연인'들의 사랑 또한 처절했을 것이다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말자'는 밀란 쿤데라

카프카의 <변신>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나란히 진열해놓은 작은 책방
▲ 책방 '셰익스피어' 카프카의 <변신>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나란히 진열해놓은 작은 책방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밀란 쿤데라는 14년 만에 발표한 신작소설 <무의미의 축제>에서 이렇게 아픈 세상을 진단하고 사람들에게 대처할 수 있도록 처방을 내렸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것을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지.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참을 수 없이 솔직한, 그래서 매우 진지한 작가의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온갖 기만과 허위가 난무하고, 모리배와 양아치에 시달리는 한국사회에서 많이 읽히는 듯하다.

1929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아직 살아있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장수하고 있다. 그런 그도 지난날 소련에 점령당한 모국에서 1968년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다. 첫 작품 <농담>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를 풍자적으로 대놓고 비판했다.

그런 그를 소련의 전체주의자들이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1968년 소련이 체코를 점령하자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집필 활동도 금지되었다. 마침내 시민권까지 박탈당하자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내내 프랑스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 역시 모국어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창작을 한다.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4년 작이다.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말한다. 고향 선배 카프카의 실존주의 영향을 받았나. <프라하의 봄>으로 영화화되면서 더욱 각광을 받는다. 특히 당시 동병상련의 정치적 시공간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프라항 공항에, 광장에 바츠라프 하벨이

혁명가 하벨의 이름을 딴 '프라하 바츠라프 하벨 공항'의 한글 안내판
▲ 바츠라프 하벨 혁명가 하벨의 이름을 딴 '프라하 바츠라프 하벨 공항'의 한글 안내판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한글 안내판으로 인상적인 프라하 공항은 바츨라프 하벨 공항으로 불린다. 바츨라프 하벨은 체코의 극작가이자 혁명가, 대통령의 이름이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인 내게 그는 문학가보다는 혁명가로 기억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이끈 주역이다. 독립작가클럽에서 활동하며 침략자 소련에 항거하며 1977년 77헌장을 발표한 대가로 징역까지 산다.

1989년, 그는 벨벳 혁명을 이끌고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40년 만에 비공산주의자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되는 순간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고 1993년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서울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호사가들은 체코의 하벨, 한국의 김대중을 자연스레 묶어서 떠올리기도 한다. 그가 죽고 나서 프라하 루지네 국제공항은 이름을 바꾼다. 체코 국민들이 하벨을 잊지 않기 위해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으로.

그런데 정작 체코의 국민, 프라하 시민들이 카프카·쿤데라·하벨보다 더 사랑하는 작가는 따로 있다. 소설가 야로슬라브 하세크다. 장편소설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체코의 국민들이 하세크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성 때문만은 아니다. 카프카나 쿤데라와는 달리, 그는 모국어인 체코어로 문학을 했다. 힘없는 나라 체코에서 태어나 불과 수천만 명밖에 쓰지 않는 체코어로 세계적인 명작을 빚어냈다.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 이탈리아 로마공항으로 떠나는 프라하공항에서 체코어 한 마디를 섞어 애절한 편지를 한 장 띄웠다. 카프카가 연인 밀레나에게 보내는 심정으로 '나의 프라하의 연인'에게. 프라하를 봄으로 느끼게 해주는 줄리엣 비노쉬,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를 연상시키는 줄리엣 비노쉬, 1살 연하의 용띠 동생 '줄리넷 비노쉬'에게.

"줄리엣, 나 쉴리다노(Na shledanou ; 안녕, 잘 가).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 이제 극장에서 말고 꿈에서 말고 생활 속에서 한 번 만나고 싶다. 스케줄이 허락한다면 봄이 오는 프라하의 뒷골목이나 파리의 퐁네프 다리 위 쯤에서 우연히 스치는 행인으로라도 서로. 그렇게 한 뼘의 보도블럭과 한 톨의 공기나마 찰나일지언정 억겁처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싶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만나면 할 말이라곤  그저 나이스투미츄 정도지만, 듣고 싶은 말도 그냥 '나이스 투 미트 유' 한 마디 정도지만. 정말 나는 그 정도라도 괜찮으니,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꼭 만났으면. 우리 둘 다 병들기 전에, 우리 둘 다 늙기 전에, 둘 중 누군가 먼저 죽어버리기 전에."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프라하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