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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에> 공연 중 광주 시민군들이 모여 "1980년 5월 18일 밤 12시!"를 외치는 장면
▲ <푸르른 날에> 광주 시민군 <푸르른 날에> 공연 중 광주 시민군들이 모여 "1980년 5월 18일 밤 12시!"를 외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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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밤 12시!"

우리가 기억하는 광주의 시계는 여기서 멈췄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전남대를 중심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5.18은 단순히 숫자 배열에 그치지 않는다. 그만큼 '5.18'은 한국인에게 그 무엇보다 암울한 역사적 상처이며, 쉽게 이야기 꺼내기 어려운 소재이다.

이것을 연극으로 만드는 것도 작가나 연출가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5.18을 소재로 한 연극은 줄을 이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혼돈, 총성과 울부짖음이 뒤덮인 상황은 극을 더욱 무겁게 짖누르는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규탄하고 메시지를 강하게 보여줘야 하는 사명감(?)으로 하여금 연극을 보는 이들도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매년 5월이면 꼭 봐야 하는 연극'으로 선정되면서 5월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연극이 마침내 무대에 오른다. 지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전석 매진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겼다. 평균 객석 점유율 98%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이 연극에 환호하는 관객들은 매년 5월이 되기를 기다린다.

이 작품은 5월의 어느 푸르른 봄에 인생에서 가장 푸르지 못한 날을 경험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연극 <푸르른 날에>(정경진 작, 고선웅 각색, 연출)이다. 2009년 제3회 차범석희곡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정경진의 <푸르른 날에>를 연출가 고선웅(47, 극공작소 마방진 대표)이 각색, 연출을 맡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 <푸르른 날에>

2011년 초연 당시 사전예매 120장의 초라한 시작으로 출발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그해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 연출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됐다. 자칫 무겁고 감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는 연출가 스스로 '명랑한 신파'라 부르는 경쾌하고 과장된 어법으로 그 재미를 더한다.

극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에서 오는 무거운 감정은 온데 간데 없고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고선웅식 어법'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연출가 고선웅은 <푸르른 날에>를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으로 정의했다. 올해 공연에서도 그 사랑의 가치는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져 '디테일이 살아 있는 신파'로 묘사된다. 그동안 무겁게 다가섰던 5.18들과는 다르게 역사 속에서 피어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사랑을 들여다보는 것이 특징이다.

5.18이라는 혼란한 배경 속에서도 청춘은 있었고, 사랑은 피었다.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쟁에 휘말려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두 남녀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 다시 만난다. 시종일관 유머와 과장된 언어를 멈추지 않는 무대는 110분의 시간동안 잠시도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총 19명의 배우들은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 중간 통로에서도 열연을 펼치며 관객들에게 거친 숨소리를 들려준다. 관객은 이로 인해 마치 5월의 광주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5월이면 누가 뭐라지 않아도 이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푸르른 날에> 엔딩으로 꽃비가 내리며 모든 출연진이 나와서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
▲ 푸르른 날에 엔딩 <푸르른 날에> 엔딩으로 꽃비가 내리며 모든 출연진이 나와서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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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 작품이 유독 의미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2011년부터 함께 한 원년 배우들이 선보이는 마지막 고별 무대이기 때문이다. 레퍼토리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은 우리 나라 연극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전석 매진되는 작품이 5년 동안 한 극장에서, 같은 배우들과 함께 같은 시간대에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운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2011년 초연했던 배우들은 나이를 5살 더 먹었고, 초연과 재연으로 이어진 대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극 중 노(老)정혜 역을 맡은 배우 정재은(45)은 "장기 공연을 할 때 가장 무서운 게 내성이 생기는 건데, 이 작품은 거듭될수록 관객과의 호흡도 깊어지고 배우들과의 유대도 끈끈해져서 오히려 더 좋았다"며 "초연 때는 정말 연기를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재공연 때부터는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극이 흘러갈 만큼 에너지의 흐름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올해는 대학로를 비롯해 대한민국 연극계의 현실이 더욱 암울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제는 외부의 요인으로 공연이 중단되는 일까지 발생했으며, 1970~1980년대 대표적인 연극 공간이었던 극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창작극을 발굴하고 발전시키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푸르른 날에>는 창작연극 제작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주었다.

이 시점에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게 중극장 규모의 창작 초연을 무대에 올리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의 공과 헌신을 무시할 수가 없다. <푸르른 날에>를 제작한 신시컴퍼니 예술감독 박명성은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해마다 5월이면 누가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다들 모였죠. 이제 <푸르른 날에>는 우리가 가슴 뿌듯하게 자랑할 수 잇는 위대한 공연이 됐습니다. 신시 같은 상업극단이라도 이익을 바라지 않고 올리는 공연이 있습니다. 그냥 가슴 속에 들어와 버리는 공연이죠. 우리가 예술을 하고 예술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 <푸르른 날에>가 바로 그런 공연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엔딩과 커튼콜이다. 속세를 떠난 여산이 딸을 잊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울부짖으면서 독백을 할 때와 꽃비가 내릴 때 나이든 정혜와 마주서 있는 장면에서 왜 손수건을 준비해야 하는지 느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이 다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귓가에 송창식 노래를 맴돌게 한다.

초연 했던 배우들이 하는 공연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향후 오디션을 통해서 새로운 배우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가능성을 남기긴 했지만 우리에게 이 감동스러운 공연을 볼 수 있는 날이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2011년 이후 <푸르른 날에>를 위해 지켜온 19명의 배우들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보며 감사한 마음을 대신 전한다.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이영석, 호산, 이명행, 조영규, 조윤미, 채윤서, 이정훈, 김명기, 손고명, 유병훈, 김성현, 견민성, 강대진, 김영노, 홍의준, 남슬기, 김민서...

"광주 공연 때, 당사자 분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했다"
[인터뷰] 연출가 고선웅씨

지난 4월에 <푸르른 날에> 연습 중이던 연출가 고선웅
▲ <푸르른 날에> 연출가 고선웅 지난 4월에 <푸르른 날에> 연습 중이던 연출가 고선웅
ⓒ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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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에> 연출과 고선웅씨와의 인터뷰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 4월초 연습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공연을 할 때 '고선웅식 어법'으로 무대에서 보여주는 전달 방식이 새롭네요.  
"만약에 누굴 사랑한다면 그 사람한테 얼마나 그걸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진지한 순간에도 진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죠. 진지함이 갖고 있는 부담이 있어요. 농담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틀어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 공연 내내 관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데요. 공연을 보고 난 후 알 수 없는 감동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만드는 방법이 있나요?
"농담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본질이라는 거예요. 연극의 본질은 농담이에요. 농담을 통해서 그 진실을 보여주는 거죠. 자기가 직접 겪은 것이라도 무대에서 정확한 에너지를 갖지 못하면 그건 경험한 게 아니에요. 연극은 철저하게 허구화되어 있지만, 그것을 보면서 그 누구도 '그건 허구잖아' 이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만들죠. 단원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지만 우린 행복하게 연극을 하자고요. 가슴 아파하면서는 연극을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어떻게 말을 해요.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린데... 그것을 뛰어넘는 연극적 접근이 필요해요. 그렇게 슬픈 연극일지라도 연습하다가 재미없으면 말아야죠. 슬퍼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 작년에 처음으로 광주에 내려가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의 기분은 어땠나요?
"작년에 광주에서 피가 말랐죠. 이해 당사자 분들이 얼마나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연할 때 그분들이 우리 연극을 어떻게 보실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그분들이 이런 것을 원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광주에서는 5.18에 대한 상흔, 상처에 대한 이야기 반복되고 있는데, 꼭 엄숙한 방식으로 얘기하길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전하려고 하는 주제의식이나 생각이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5월 31일까지.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3만원.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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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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