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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한 달 동안 살며, 우리가 서로 갈등을 겪는 동안 맹세코 네가 가슴 속 깊이에서 미워지지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웠어. 그런데 내가 어디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니? "

아이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모님 이야기 할 때, 네 그 표정과 마음. 바로 그거였어. 내 생각에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설혹 길을 잘못 가다가도 분명히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 그런데 네가 부모님을 언급할 때마다 그게 분명히 느껴졌어. 속으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몰라. 넌 분명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지."

아이는 두 눈을 떨구며, 슬며시 웃었다.

어느 6월, 유럽의 들판
▲ 양귀비가 핀 들 어느 6월, 유럽의 들판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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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사는 지인이 몇 개월간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내가 잠시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되었었다. 방 3개가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렇게 독일인 여대생인 프란체스카와 한국인 H 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상의 전쟁이 첫날 부터 세 여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똑 똑 똑 똑 똑! 프란체스카가 H의 방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H가 방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에게 왔다. 이번에는 자신의 샴푸를 말도 없이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H가 타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화가 많이 난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H는 돌아가면서 하는 청소 담당 날에도 아무런 공지 없이 청소를 건너뛰기 일쑤였고, 무엇이든 본인이 편할 수만 있다면 약속도, 책임도 지키려하지 않았다. 이전 학교에서는 쫓겨난 것과 다름이 없었고,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조차 처음에는 잦은 결석으로 선생님께 불려다니기도 했다.

초 봄의 들판
▲ 독일 들판 초 봄의 들판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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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로 나 역시 화가 많이 났던 어느 토요일, "내일 너의 당번날인데, 이번에도 정말로 걱정이 되는구나!"라며 주의하라는 짧은 경고를 했다. 그런데도 H는 몇 분 되지도 않아서, 싱글벙글. '저 아이는 이제 욕먹는 일도 면역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을 하며 잠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 아이는 밤새 청소를 다 해두었다. 감동이었다. 욕실 세면대며, 부억 바닥이며, 거실 모두 그렇게 완벽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같이 산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잠시 차 한 잔을 하자고 그녀를 불렀다.

독일 Gengenbach에서
▲ 초여름 언덕 독일 Gengenbach에서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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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어긋나고 싶었었어요. 제가 12살 때, 엄마는 이곳으로 와서 일을 하셨고 아빠는 한국에서 혼자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계셨어요. 그게 저 하나 잘 되라고 내리신 결정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나 부담이 되었어요. 감당이 안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의외였다. 

독일 Nurnberg 여행 중 사진
▲ Nurnberg의 다리 위 풍경 독일 Nurnberg 여행 중 사진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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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달 이 집에 오기 전 쯤에는 정말로 힘들었어요. 지하철 전동차에 치여 죽고 싶기도 했고 어딘가에서 떨어져 죽고 싶기도 했어요. 실패한 것 같았거든요. 동기들 중에는 이번에 대학을 들어간 경우도 있는데 저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힘들어서 오빠들에게 의지를 해봤는데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친구들과도 그렇고, 부모님과도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런데 언니가 크게 혼내신 어느 날, 제 삶 자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죽어야지!'라고 생각하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옆에서 '죽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부터 구원의 손길이 오는 거예요. 언니가 '이렇게 하면 안돼. 이런 것이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거야!'라고 했던 말들이 한 번도 잔소리로 들린 적이 없어요. 언니의 진심이 느껴졌었어요. 무엇 때문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제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독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안에서
▲ 상수시 (Sanssouci) 궁전의 조각상 독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안에서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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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니가 어느날 '나는 널 포기할 거야!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라고 하셨을 때, 그날 사실 제가 많이 아팠었는데도 언니 눈빛을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나를 포기하지 않겠구나. 금방 되돌아올 거야.

그런데 언니가 생각보다 더 빨리 되돌아 오셨어요. 그래서 술 한 잔 하자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무슨 말씀을 제게 전해주고자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이곳에 이사오기 전부터 제가 달라졌다는 말들이 교회에서도 돌고, 그게 엄마가 사시는 곳까지 전해졌나보더라고요. 제 친구들도 이제 오히려 제게 도움을 청하는데 누군가가 저 때문에 좀 더 나은 길을 가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어요."

화가 나서 저러지, 내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빛으로 알았다는 아이. 그러나 앙큼하다고 하기엔 그녀는 진심이었다. 영특한 친구였다.

독일의 어느 들판
▲ 초여름의 들판 독일의 어느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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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설립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는 위기를 겪는 10대들을 위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중이다. 2012년, 출발을 잘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저자가 함께 걸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으로 출간 되었다.

책의 문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쇠이유 프로젝트의 독창성은 성인 동행자와 함께하는 일상적인 만남과 시간을 제안한다는 데 있다. 소수가 만들어내는 긴밀한 관계는 주도권 다툼과 집단적 흥분, 그리고 정체성의 상실을 피하게 해준다. 아이는 이 긴 모험 속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며, 자신의 역할을 정의하고 실천한다. 예상치 못한 일과 직면했을 때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p.l54)"

독일 베를린 시내,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강아지의 바쁜 발걸음으로 
마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같이가요 !!!
▲ 같이 가요 !!! 독일 베를린 시내,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강아지의 바쁜 발걸음으로 마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같이가요 !!!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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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H와의 갈등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때로는 잠시 일었던 변화 만큼 실망감 또한 높아져서 둘 사이의 골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다. '기다려주는 일', 내가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H처럼 위기를 겪고 있는 많은 아이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지탱해주는 힘은 결국 '끝까지 믿어주는 것, 포기 하지 않는 것' 뿐 이라는 사실을. 베르나르가 1만 2000km를 걷을 수 있었던 이유가,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였던 것처럼.


태그:#믿어준다는 일, #쇠이유(SEUIL), #위기를 겪는 10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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