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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오후 2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힘들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통 5시까지 가게 불을 끄고 휴식을 즐긴다. 식사시간을 정해 에너지를 아끼는 합리적인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배가 고프다 보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화부터 난다. 택시기사가 추천해준 식당도 2시가 넘었다고 주방장이 아예 자리를 뜨고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패스트푸드로 허기를 달래고 근처 강태공사(姜太公祠)를 찾았다.

‘제나라의 시조’라는 뜻의 천제지존(天齊至尊)이 적혀 있다.
▲ 강태공사 입구 패방 ‘제나라의 시조’라는 뜻의 천제지존(天齊至尊)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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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사 입구에서 만난 멋진 한 장면이 여행의 맛을 더한다.
▲ 곡우비에 흩날리는 왕겹벚꽃 강태공사 입구에서 만난 멋진 한 장면이 여행의 맛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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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어 '제나라의 시조'라는 뜻의 천제지존(天齊至尊)이 적힌 패방 아래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핑크빛 왕겹벚꽃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붉은 벽을 배경으로 빗속에 꽃잎을 날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인다. 이때가 곡우(穀雨)라 마치 시간이 절기에 맞춰 이 한 장면을 멋지게 마련해 놓고 이국의 상춘객을 기다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한 컷의 아름다움이 중국식당에 가졌던 불만을 일순간에 녹여버린다.

강태공사에 들어서니 아담한 사당이 빗속에 나름 운치 있게 모습을 드러낸다. 강태공(BC1156~BC1017)이 제나라의 개국 군주이고, 그 수도가 린쯔다보니 이곳에 1993년 강태공의 것으로 추정되는 의관을 모아 의관총(衣冠冢)을 만들며 사당도 지은 것이다. 사실 역사문헌을 기반으로 강태공묘가 있다고 주장하는 지역이 중국에 서너 곳 있는데, 청 건륭제가 강태공묘비를 남긴 허난(河南) 웨이훼이(衛輝)가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꼽힌다.

중국 원림의 멋이 느껴지는 아담한 사당이다.
▲ 강태공사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중국 원림의 멋이 느껴지는 아담한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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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제나라의 역사인물이 모셔져 있다.
▲ 강태공사 내부 좌우로 제나라의 역사인물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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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통원림의 아늑함이 느껴지는 사당 좌우로 제나라 주요 인물들이 모셔져 있고, 주전(主殿)에는 강태공상과 함께 그의 생애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강태공은 상나라 말엽에 태어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었다.

강태공은 주 무왕이 지나가는 길에서 낚시를 하다가 운명적으로 무왕을 만난다. "강태공의 곧은 낚시에도 원하는 사람은 물린다(太公釣魚,愿者上鉤)"는 말이 생겨난 대목이다. 이후 문왕을 도와 목야전투에서 상나라의 주왕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공로로 제나라의 제후로 책봉되어 제나라를 세운다.

그 과정에서 늘 낚시만 하는 강태공을 버린 아내 마씨가 찾아와 다시 함께 살자고 하자, 강태공이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기 힘들다는 '복수난수(覆水難收)'라는 말을 했다는데, 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제나라의 시조이자, 병가의 시조면서 위대한 군주이기도 했던 강태공이다.
▲ 강태공사 주전에 모셔진 강태공 제나라의 시조이자, 병가의 시조면서 위대한 군주이기도 했던 강태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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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병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강태공사에 그려진 벽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병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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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야전투에서의 활약상이 <시경>에 생동감 넘치는 시로 묘사될 정도로, 강태공은 병법에도 능해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서를 남겼으며, 당나라 때에는 병가의 비조, 무성(武聖)으로 추앙받았다. 군주가 된 이후에는 악습을 없애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로 제나라가 춘추시대 제일 먼저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시대를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책사에서 뛰어난 병법을 익힌 군사까지, 그리고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군주로서의 풍모까지 갖춘 강태공이 새삼 만만찮은 인물로 다가온다. 동상 앞에 오래 머물지 말라고 하는데, 그저 풍류를 즐긴 낚시꾼의 사당이겠거니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리는 기분이다.

사당 뒤로 강태공의 의관총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둥근 의관총을 따라 강태공에서 파생한 여러 성씨의 비석이 둘러서 있다. 지금은 성(姓)과 씨(氏)가 같은 개념으로 쓰이지만 한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명확히 다른 개념으로 구별되었다. 즉 하나의 성에서 봉토를 받아 사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씨로 분화된 것이다. 강태공도 원래 성이 강이었으나, 그 아버지 대에 여(呂) 지역에 봉토를 받아 씨가 여가 되어, 여상(呂尙)으로도 불렸다.

중국 최초의 성을 보면, 모두 여자 여(女)가 붙어 있는데, 이는 모계사회의 흔적으로 보인다. 순임금의 성은 요(姚), 우임금은 사(姒), 주나라 왕은 희(姬), 진시황은 성이 영(嬴)이었다. 강(姜)에서 분화한 성씨가 여(呂), 허(許), 사(謝), 고(高), 국(國), 노(盧), 최(崔), 정(丁), 문(文), 신(申) 등 모두 102개나 된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강태공을 그 시조로 삼고 있는 셈이다. 우리말로 된 비석이 있어 보니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중국 언론에 과거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중수교 이후 산둥 성장(省長)에게 강태공과 노씨의 족보 자료를 부탁했다는 보도가 있다.

큰 봉분을 둥그렇게 둘러 강씨 성에서 퍼져나간 여러 성씨의 비가 들어서 있다.
▲ 강태공의관총 큰 봉분을 둥그렇게 둘러 강씨 성에서 퍼져나간 여러 성씨의 비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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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姜)에서 분화한 성씨가 모두 102개나 된다고 한다.
▲ 강태공의관총 주변의 성씨 비석 강(姜)에서 분화한 성씨가 모두 102개나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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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대만의 구씨종친회에서도 기금을 투자해 강태공사 좌측으로 구목공사(丘穆公祠)라는 사당이 지어져 있다. 또 린쯔의 치하(淄河) 강변에 대형 강태공 동상이 들어섰는데 강씨의 후손이 기부하여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강태공사를 둘러보고 나오는데도 봄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오동나무의 보랏빛 꽃도 비에 젖어 보랏빛이 더 진해져 있다. 비에 젖은 보랏빛 꽃이 왠지 사라진 제국 제나라와 박제된 듯 발전을 멈춘 그 수도 린쯔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나오는 길에 보니 왕겹벚꽃 아래 눈처럼 쌓인 꽃잎이 더 수복해져 있다.


태그:#강태공사, #린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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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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