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조선 역사에 가장 폭군으로 묘사된 연산군. 그리고 그 옆에서 왕위의 왕으로 군림한 임숭재. 혼란스러운 시대가 그들을 만들었다고 감싸줄 수 있을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노라고 읊조리는 나직한 고백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요?

영화 <간신> 민규동 감독, 김강우, 주지훈, 천호진, 차지연, 임지연, 이유영 주연

▲ 영화 <간신> 민규동 감독, 김강우, 주지훈, 천호진, 차지연, 임지연, 이유영 주연 ⓒ 롯데 엔터테인먼트

역사가 스포일러이며 결말도 예측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에, <간신>의 민규동 감독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화려한 색감에 정성을 들였습니다. 운평의 수중 연회 장면이라든지 최고의 기생인 흥청이 되기 위해 '여성 수련'을 받는 장면은 색(色)에 대한 연산군의 동물적 집착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누리고 싶은 욕망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그 색(色)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즐기고 싶지만 때로 독이 되어 돌아오는 부메랑입니다.

​성종의 맏아들이며 조선의 제10대 왕(재위1494~1506)인 연산군, 이름은 융(隆)입니다. 임사홍으로부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전모를 알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도륙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패륜아. 하지만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폭정으로만 12년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

재위 초기엔 상평창을 설치해 물가를 조절하기도 했으며, 비융사를 설치해 왜의 침략에 대비했고, <구급이해방>을 발간해 질병관리를 통한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고 합니다. 또한 군주의 치도를 논하는 경연도 횟수가 줄었을 뿐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산군 선대왕인 성종 치세의 영향으로 정치가 안정되어 있었고 연산군 또한 자신의 측근보다는 정적이 많은 시기라 모든 것을 뜻대로 하지는 못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이후 왕실의 큰 어른인 소혜 황후(연산군의 할머니)의 건강 악화로 영향력이 줄어들며 신료들이 연산군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과거, 폐비 윤씨와 관련해 아들 융을 대하는 아버지 성종의 입장이 애매했고,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역시 연산군에게 정을 주지 못하는 터라 어린 나이에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그에게는 기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장녹수의 치맛바람에 이어 천하의 간신이라 불리는 '임숭재'와 임사홍이 있었으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국정을 농단하고 민심을 돌보지 않는 패륜과 패악의 일탈행위가 시작됩니다.

영화 <간신> 왼쪽이 설중매역의 이유영, 오른쪽은 단희 역의 임지연

▲ 영화 <간신> 왼쪽이 설중매역의 이유영, 오른쪽은 단희 역의 임지연 ⓒ 롯데 엔터테인먼트


붉은 색의 ​향연

​영화 <간신>에서 붉은 색은 운평의 화려함을 전면에 내세우며 왕실의 주인인 연산과 함께 주요 내러티브를 형성합니다. 연산의 심적 동요를 불러오는 폐비 윤씨의 적삼이 나타내듯 붉은 색은 혈육의 애증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연산의 광기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피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덧붙여 붉은 색의 용포를 입은 연산과 채홍사 운평들의 휘황찬란한 색(色)의 향연은 극과 극을 달리다가 막판에서는 서로의 꼭짓점을 연결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부드러운 화면에 변화를 주어 붉은색 아래로 맨살이 등장하는 장면이 아니면 흡사 흑백 필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타 여러 색상이 등장하기는 하나 다양하고 화려한 붉은색에 가려 캐릭터의 분명한 구분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빨간 색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습니다.

설중매가 나오는 장면은 요염하고 농익은 색감입니다. 화려함으로 사내를 유혹하는 설중매에 걸맞은 색감이라 할 만합니다. 반면 단희의 붉은 색감은 좀 다릅니다. 붉은색에 살 냄새 가득한 색. 마치 비수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이 느껴지는 색의 조합입니다. 붉은색 아래에 피부를 드러내 어두운 색감을 만들어 냅니다.

연산군은 어떨까요? 광기로 가득 찬 캐릭터답게 색감의 변화가 적습니다. 붉은 용포를 입은 연산군은 너무나 나약하고 주관이 없으며 정신분열적인 색채로 물들어 있습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그의 강렬한 인상은 붉은 용포와 함께 김강우의 연기가 제대로 어우러져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습니다. 김강우의 연산군이 이렇게도 표현되는가에 대해 새삼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럼 역사 이래 최고의 간신 임숭재의 색감은 어떨까요?

영화 <간신> 임숭재는 연산군의 용포 옆에 보라색 옷을 걸치고 등장합니다. 왕 위의 왕을 꿈꿨던 그의 욕망을 나타냄과 동시에 영화 후반 그가 연모하는 여인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심리상태의 동요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 영화 <간신> 임숭재는 연산군의 용포 옆에 보라색 옷을 걸치고 등장합니다. 왕 위의 왕을 꿈꿨던 그의 욕망을 나타냄과 동시에 영화 후반 그가 연모하는 여인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심리상태의 동요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왕 위의 왕이 되려 했던 남자

​임숭재는 주로 보라색 옷을 걸치고 나옵니다. 위의 그림처럼 임숭재만이 그 색감을 소화해냅니다. 일반적으로 보라색은 신비함, 영웅, 고귀함 등을 표현합니다. 아마도 왕위의 왕이 되고 싶었던 그의 정치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푸른색과 사람의 피를 뜻한 빨간색의 혼색인 보라색은 신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랏빛이다"라는 중국의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최고의 색이라는 뜻입니다. 영국의 왕족이나 귀족은 보라색 의상을 입는 것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보라색에는 다른 모든 색을 뛰어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패션계에서도 '오리엔탈 컬러'라고 부르며 신비감을 주는 색으로 통한답니다. 물론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한 색으로 통하는 보라색은 정신분열이나 우울감 혹은 죽음의 의미도 있습니다. 군주의 최측근으로서 지상 최고의 쾌락을 선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임숭재의 내적 동요를 충분히 표현한 것 아닌가 합니다. 붉은 용포를 입은 연산군, 그리고 동일하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강조한 설중매와 단희의 색감, 이와 상대적으로 보라색 의상으로 스크린을 물들인 임숭재는 관객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설명이 아닐까요?

영화 <간신> 왼쪽이 임숭재, 오른쪽이 임사홍(임숭재의 아버지)

▲ 영화 <간신> 왼쪽이 임숭재, 오른쪽이 임사홍(임숭재의 아버지) ⓒ 롯데 엔터테인먼트


역사적으로 보면 임숭재의 아버지 임사홍은 대단한 재원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왕실의 사위로 그의 아들인 임숭재나 임광재 역시 임금의 딸과 혼인을 올려 그 기세는 대단했으나 ​관료 생활 초반에 소신 있는 발언과 행보로 유배까지 하게 됩니다.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에 능통하고 한학 등 글재주가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 <간신>에서는 폐비 윤씨의 생전 유물을 연산군에게 전해주며 연산군으로 하여금 일탈 행위를 일으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확실한 자리보전을 꿰어 찬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임사홍에 대한 기록과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 있으니 어느 정도의 픽션은 감안하고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아버지에 비해 임숭재에 대한 기록은 그저 천하의 간신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왕자 융(연산군)과 음란 행위를 같은 하는 등 비행을 일삼았는데 처용무 같은 가무에 능하여 나중에 장악원 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며 충신들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니 영화에서 그려지는 임숭재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

베드신 없는 19금 영화

영화 <간신>에서는 이렇다 할 베드신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성의 육체에 대한 갈증을 진지하게 탐닉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연산군의 미색에 향한 미친 듯한 욕정에도 불구하고 시와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장면에 눈길이 갑니다. 연산군을 연기했던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게 예술에 조예가 있었던 그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려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육체의 성행위를 즐긴다기보다는 여성을 보며 만족하는 장면으로 궐 안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던 연산군의 모성을 에둘러 표현한 것 아닐까요?

영화 <간신> 영화 <간신>은 19금이지만 흔한 베드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의 몸매를 보며 탐닉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어미를 잃었고 아버지 또한 애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시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철저히 외로웠다. 그의 과거는 여성의 육체에 기대며 탐닉하게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 영화 <간신> 영화 <간신>은 19금이지만 흔한 베드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의 몸매를 보며 탐닉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어미를 잃었고 아버지 또한 애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시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철저히 외로웠다. 그의 과거는 여성의 육체에 기대며 탐닉하게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덧붙이자면, 영화 <인간 중독>의 임지연이 연기한 단희와 영화 <봄>에서 순수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발산했던 이유영의 설중매는 남성 중심의 사극에서 소모되고 마는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을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동적이고 민폐 캐릭터인 여성의 역할이 <간신>에서는 간신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뮤지컬 배우 차지연의 장녹수 역시 연산군을 제 아기처럼 챙기며 돌보는 모습은, 여성이 배출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우회하여 연산군의 철부지 아기 같은 돌발 행동 뒤에 숨겨진 애정결핍과 그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영화에서 김강우의 연산군 캐릭터가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면, 주지훈의 임숭재가 자신의 주군인 연산군과 남모래 연모하는 단희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간신인 채홍사 임숭재가 연모하는 여인이라니!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영화의 단점이 보입니다.

131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관객은 충분히 눈으로 호강했고, 연산의 도를 넘는 언행에 충분히 분노했다 생각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지는 사건과 심리상태는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듭니다. 내용상 기승전결이 분명하기 때문에 관객과 감독의 호흡이 동일하리라는 선입견은 사라집니다.

채홍사 간신 주지훈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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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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