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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인으로서의 공평무사함을 보기 힘들뿐더러 사람을 끄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연좌제적 이유도 크다. 그런 박 대통령에 열광하는 지지자들 역시 내 '멘탈'과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선 꽉 막힌 '꼰대'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사라지기를 바란 적은 없다.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맹목적일지라도 그들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보지 않는다. 절대 선인이 없는 것처럼 절대 악인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누군가를 극도로 혐오하더라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어린이 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대표적인 '진보 논객'이다. 지난 6월 2일 김규항은 지난 2일자 <경향신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라는 기명칼럼 꼭지에 "사랑의 결핍"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합리적인 지지자와 구별되는 '빠' 개념을 바탕으로 '노빠'가 '박빠'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결핍되어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며 비판한 글이다.

그 글에서 김규항은 "어떤 정치인에 대한 내 지지가 존중되길 바란다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지도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재론이 필요 없는 말이다. 그의 글에서 맹목적인 노빠·박빠와 이성적인 노무현·박근혜 지지자가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규항은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없애고 싶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라면서 "김대중이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수구세력을 없애고 싶은 게 사실이듯"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빠와 노무현 지지자를 구별하는 것 같으면서도 노무현 지지자 집단 전체를 빠로 규정하는 듯한 논법이다. 표면적으로 노빠를 겨냥하는 김규항의 비판이 실상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 전체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김규항의 혼란스러운 시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반노무현 진영의 만능 무기가 된 '노빠'란 단어

세계적인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1940~현재)는 세상을 이해하는 틀로서 '프레임(frame)'을 강조한다. 그는 저서 <프레임 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언어를 만드는가? 그렇다. 언어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하는가? 그렇다."

언어는 존재의 창조자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자 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뿐이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을 하자 빛이 만들어졌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언어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지시키는 근거가 된다.

노빠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노빠가 없었다! 단지 있었던 건 노무현 지지자였다. 노무현 프레임이 등장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자 반노무현주의자들이 모였다. 장차 노빠라는 말의 소유주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함께 말했다. 당신들이 노빠다. 그러자 노빠가 생겨났다.

노빠는 어원적으로 '빠순이'의 '빠'와 동궤다. 빠순이가 그렇듯 빠가 들어가는 말 대다수에는 비하와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다. 노빠도 마찬가지였다. 노빠는 얼마 안 가 반노무현 진영의 만능 무기가 되었다. 누가 노빠인지 특정하는 일은 중요치 않았다. 노빠라는 말 자체가 노빠의 실체적 근거가 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김규항은 노빠를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나누어 보길 거부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어떤 비판과 토론도 거부한 채 무작정 '노짱'을 추앙하고 '그런 대통령 또 없다' 말하는 사람들"로 규정했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김규항의 '진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노빠의 실체 여부나 영향력 유무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김규항 식 규정에 충실한 노빠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있더라도 존재감이나 영향력이 미미할 것 같다. 그렇게 노빠의 실체 자체가 미심쩍은데, 김규항은 "지난 몇 해 동안 노빠가 한국 정치를 얼마나 퇴행시켜 왔으며, 그래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대해 굳이 더 반복할 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김규항은 노빠를 들어 참여정부 정책 추진의 주된 세력이었던 '친노'를 비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마 이것이 온당한 분석일 것이다. 표면적으로 노빠를 겨냥했으나 실상 노무현 지지자 전체에게 화살을 겨누는 듯한 김규항의 논법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실제 참여정부 시절 이른바 '친노'와 범야권·범진보를 대립시킨 정책 사안들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규항은 "노무현 지지자는 박근혜 지지자보다 나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노빠와 박빠는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노빠, 박빠'와 '노무현 지지자, 박근혜 지지자'와 구별하는 듯하지만 문맥은 이들 모두를 '도 긴 개 긴'처럼 혼동하기 좋게 만든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노빠와 박빠를 동렬에 두는 것은 일단 제쳐놓자. 문제는 김규항 식 양비론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정치 구도를 노무현 프레임을 통해서 바라보는 일련의 태도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그 폐해는, 고 노 전 대통령이 대형 정치 이슈가 불거지거나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무덤에서 불려나와 판을 뒤흔드는 기형적인 정국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실체가 의심스럽고 존재감이 미미한 노빠를 기정사실화하는 김규항의 '진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노무현 프레임을 확실하게 강화할 '노빠 담론'이 그가 비판해 마지 않을 '박빠'들에게 유쾌하면서도 유익한 논거로 쓰일 수 있겠다는 것.

노빠를 만든 노빠(라는 언어)는 차츰 그 범주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지지자나 친노무현 성향의 진보주의자를 가리지 않았다. 김규항은 '진심으로' 그들을 이성적인 지지자와 맹목적인 빠로 구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구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노무현주의자들에게는 모두 한통속이었다. 지지자든 빠든 그들은 "수구세력이 없애고 싶었을" 노무현을 함께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바란 게 이런 것이었을까

온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는 없다. 많은 언어가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창조되고 정의된다. 그 프레임 여하에 따라 말들은 가치 편향적인 의미를 지닌 채 사람들 사이에서 멋대로 쓰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말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쓰는가다.

'혈통'의 유대인이 많았으나 '낙인'의 유대인도 많았다. 나치는 수백 년 전의 조상과 간신히 연결되는, 이제는 '진짜' 독일인이나 다름없는 많은 이를 유대인으로 규정해 학살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진짜 유대인인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노빠가 이와 비슷하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그들을 규정하는 건 적대적인 반노무현 프레임이다. 누군가가 노빠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는 실체 여부와 무관하게 무가치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벌거벗겨진다. 한때 (그들 스스로에게) 빛나는 이름이었을 노사모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제는 수구세력은 물론 김규항과 같은 좌파·진보주의자들로부터 조롱 받는 대상이 돼버렸다.

김규항은 빠가 대상을 무작정 옹호하는 행동을 통해 열등감을 해소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한계가 있으므로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의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활동을 나누어 보자는 취지를 강조한 그다. 그런데 그는 자신만의 자의적인 빠 개념에 근거해 노빠를 열등감에 휩싸인 존재쯤으로 규정한다. 그들 각자 하나의 인격체이자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말이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경계성 인격장애'와 같은 인신공격적 비난의 이유가 될 정도로 잘못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날 노사모, 노빠는 점점 빨갱이, 종북과 같은 반열에 놓이는 '저주스러운' 단어가 돼가고 있다. 보수언론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친노 프레임' 안의 '친노'도 비슷하다. 이들은 노무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저주스러운 '주홍'의 틀에 가두는 데 큰 구실을 할 것이다. 김규항이 바란 게 이런 것이었을까. 스스로를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로 규정하는 내가 "사랑의 결핍"을 읽으며 내내 안타까워했던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김규항, #노빠, #빨갱이, #종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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