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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성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다음날 여자는 성폭행을 당했다며 신고했고, 남자는 '화간'이라고 항변했다.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는 단 둘만 알고 있는 상황. 유죄의 증거라곤 피해자의 진술뿐.  

피고인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성폭행범이 되어 징역살이를 하든지, 아니면 무죄로 풀려나든지.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두 사람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두 사람만 안다. 이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피해자의 말이 유력한 증거가 된다. 법원으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는지, 성폭행인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재판에서 유죄가 무죄로, 무죄가 유죄로 자주 뒤바뀌는 현상도 성폭력 재판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방증한다. [판결 대 판결] 27번째 이야기는 나이트클럽 부킹 원나잇 사건과 윗집 아랫집 주거침입 사건이다.

[판결①] 나이트클럽 '원나잇', 그 이후

"그날 밤 저는 술에 취해서 의식이 거의 없었어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제 옷이 전부 벗겨져 있고……. 분명 저 사람이 제 옷을 벗기고 성폭행을 했어요. 저를 능욕한 저 남자, 죗값을 받게 해주세요. 제발!"

"아닙니다.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저는 동의를 구하고 잠자리를 했습니다. '괜찮다'는 답변까지 똑똑히 들었다니까요. 거짓이라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 재판장님, 믿어주세요."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유라(가명)씨와 그런 적이 없다는 안대근(가명)씨. 두 사람 모두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은 어떤 일로 법원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발단은 나이트클럽 부킹이었다. 검사가 법정에서 밝힌 안씨의 범죄 행각(?)은 다음과 같았다.

안대근씨는 2012년 9월 청주시 나이트클럽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3시경 고유라씨 일행과 '부킹'을 하게 되었지요. 양쪽 다 20대 초반이라 마음이 잘 통했는지 다들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일행은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겨 폭탄주까지 마셨지요. 술기운 속에서도 안씨는 고씨를 파트너로 점찍어 두고 있었는데, 마침 과음을 한 고씨가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씨는 흑심을 품고 고씨를 모텔로 데리고 갑니다. 그때가 새벽 5시경입니다. 모텔방에 들어간 안씨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고씨의 옷을 벗기고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1심(청주지법 12형사부 재판장 김도형)은 안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것도 징역 2년6월의 중형. 안씨는 구속되었다. 안씨는 "고씨와 마음이 통해서 성관계를 가졌을 뿐"이라고 항변하였으나 법원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보다 "맥줏집에서 폭탄주를 마신 뒤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아침에 옷이 벗겨져 있었다"는 피해자의 진술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안씨에게 적용된 죄는 준강간죄다. 1심 재판부는 고씨가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를 이용하여 안씨가 성관계를 가졌다고 보았다.

안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항소했다. 항소심(대전고법 청주 제1형사부 재판장 김시철)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법원은 관련 법리부터 전개하면서 사건에 접근했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객관적 물증이 없는 경우,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진술이 증거능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그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 전후의 일관성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됨, 그 진술로 얻게 되는 이해관계 유무 등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고씨와 안씨의 말이 엇갈리고 있으므로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찾아내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진실만을 말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폭행일까, 화간일까... 증거는 두 사람의 '말' 뿐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할까. 피해자는 항상 진실만을 얘기할까. 이건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다.

'라쇼몽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일본영화 <라쇼몽>에서 따온 말로,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주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때문에 저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즉 기억의 주관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재판에서도 기억의 주관성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주장만 믿어서는 안 되고 피고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에서 보이는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 감으면서,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는 못 믿을 것으로 전제하고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법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형사법원은 심리과정에서 선입견 없는 태도로 검사와 피고인 양편의 주장을 경청하고 증거를 조사해야 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여야 한다.

재판부는 고씨의 진술이 진실과 일치하는지 하나 하나 따져간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먼저 "폭탄주를 마신 뒤 기억을 잃었다"고 했던 고씨가 법정에선 "폭탄주를 마신 뒤 편의점에 우유와 담배를 사러 갔고 아는 남자를 만났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필름이 끊겼다"고 주장한 시점 이후에도 고씨는 전화로 여러 차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법원은 성관계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항거불능' 상태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고씨는 "술에 취해도 겉으론 멀쩡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는데 이 점까지 감안하면 안씨가 만취한 상태의 고씨를 성폭행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재판부는 보았다.

게다가 고씨는 성관계를 한 다음날 2시간 동안 옷을 벗은 채로 안씨와 모텔에 함께 있었다. 그곳에서 안씨의 목에 키스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항소심은 "성폭행 당한 사람이 벌거벗은 상태에서 한 행동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안씨의 얘기를 더 들어보았다.

"나이트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서로 호감이 있었죠. 스킨십 하면서 술도 같이 마셨고요. 다들 파트너를 정해서 모텔로 가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돈이 없어서 저 여자(안씨)에게 모텔비를 내달라고 했어요. 잠시 생각하더니 계산 하더라고요. 우린 다정하게 방으로 들어갔어요. 침대에 누워서 제가 '해도 되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된다'고 하더라고요. 전 동의를 받았다고요." 

법원 "선입견 없는 태도로 검사와 피고인 주장 경청해야"

재판부는 객관적인 반박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안씨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리고 수사기관이 객관적인 자료 확보를 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모텔의 CCTV, 두 사람의 통화내역, 문자내용, 카메라 촬영 내용, 편의점 CCTV 영상자료, 피해자의 체크카드 사용내역 등이 증거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이 확실한 입증에 실패하면 피고인의 주장이 다소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측면이 있더라도,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항소심은 사건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피해자 고씨보다 피고인 안씨의 진술이 더 믿음이 간다고 보았다. 2심에서 피고인은 무죄. 대법원도 상고기각 판결을 함으로써 이 사건은 무죄로 확정되었다.

사실 고씨가 안씨에게 명시적으로 성관계 동의의사를 밝혔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고씨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동의의사를 밝히고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술을 많이 마셔서 이른바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 상태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면, 안씨 입장에선 동의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 판결 중에는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여성이 블랙아웃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 사례가 종종 있다. 필름이 끊겼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였고 이런 상황에서 동의를 구했다면 성폭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성범죄에서 한쪽의 주장만 받아들이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다음 사례도 남자와 여자의 말이 전혀 다르다.

[판결②] 윗집 아랫집 남녀, 주거침입강간이냐 화간이냐
 
윗집 남자가 아랫집 여자 집에 들어가서 성폭행?
 윗집 남자가 아랫집 여자 집에 들어가서 성폭행?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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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주거침입강간으로 유무죄가 오간 사건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윗집 남자가 아랫집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도 여성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였다. 윗집 남자는 30대 A씨, 아랫집 여자는 20대 B씨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에 가까울까. 먼저 B씨의 말이다.

"그날, 집에 남자친구 오철수(가명)가 찾아왔어요.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의견 충돌이 생겼어요. 그래서 서로 고함을 지르면서 싸우게 되었어요. 새벽 2시쯤인가, 철수가 화가 났는지 갑자기 집에 가버리더라고요. 혼자 남겨진 저는 무섭고 기분도 우울해서 친구하고 전화 통화를 했어요. 4시 정도까지요. 그 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아마 새벽 5시쯤 되었을까? 근데 방에 어떤 남자가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 남자가 '소리 지르지 말고 엎드려!' 이러더라고요. 전 어찌나 무서운지 손으로 입을 막고 엎드렸는데 그냥, 강제로 저를……, 흑흑.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저 사람, 윗집 남자였어요."

1심은 박씨의 진술을 토대로 유죄를 인정했다. A씨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2심 법정에 수의를 입고 나타난 A씨는 여전히 무죄를 주장했다. 이번엔 A씨의 하소연이다.

"성폭행했다고요? 제가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B씨와는 아래윗집에 살면서 오다가다 마주쳐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저 분도 절 알겠죠. 사건이 일어난 날, 밤늦게 아랫집에서 은경씨가 남자와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저도 들었어요. 두 시간쯤 싸웠나? 새벽녘에 남자가 집을 나가는 것 같던데, 더 한참이 지나도록 집에서 아무 소리가 안 나더군요. 혹시 불상사라도 생겼나, 슬슬 걱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갔죠. 집 현관문을 열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침대 위에 은경씨가 앉아 있더군요.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기에 일단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각자 신세타령을 늘어놓았지요. 그렇게 얘기를 주고받던 중 마음이 맞아 자연스레 성관계를 하게 된 겁니다. 강간이라뇨?"

유죄에서 무죄로, 다시 유죄로

항소심은 이번엔 A씨의 말에 더 믿음이 간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피해자 B씨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의심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① 강간당한 후 경찰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② 사건 직후 도착한 오철수씨가 "여자친구가 성폭행당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얘기했다.
③ B씨가 A씨의 누나를 자신의 다단계사업장에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강간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④ B씨는 A씨에게 합의금만 받았다고 증언했으나, 실제로는 법정에서 유리하게 증언해주는 대가로 추가로 돈을 받았다.
⑤ A씨가 어떻게 침입했는지, 모자나 마스크를 썼는지, 어떻게 입을 막았는지 등에 대해 수사기관, 1심, 2심 법정에서 다 다르게 진술했다.

무죄가 나오자 이번엔 검사가 상고했다. 대법원에서 사건은 다시 뒤집어진다. 2심이 무죄의 근거로 삼은 5가지 의심은 '합리적 의심'으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대법원 판결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사건 직후 B씨가 오씨에게 바로 연락하여 30분 후에 도착한 점에 비추어 ①은 사실이 아니다. ②의 주장은 오씨의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또한 ③과 ④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정황만으로 B씨의 말을 거짓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⑤처럼 말이 바뀌는 것은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법원은 이번엔 B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는 부분이 별로 없다고 보았다. 반면 A씨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남긴다. '새벽녘 별다른 친분이 없는 여성의 집에 들어갔고, 여성이 남성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합의하에 성관계까지 맺었다는 것은 상식으로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A씨는 그렇게 유죄가 확정되었다.

은밀한 성범죄,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하나

성범죄는 속성상 은밀할 수밖에 없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라도 법원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성범죄에서 피해자가 받게 될 상처를 생각하면 쉽사리 무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피해자의 말만 믿고 피고인을 단죄할 수는 없다. 유죄냐 무죄냐. 직접 보지 않은 판사로서는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성범죄, #판결대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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