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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성주읍의 남동쪽 성산에 입지한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성주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 성산동 고분군 성주군 성주읍의 남동쪽 성산에 입지한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성주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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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상북도 성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참외 생산지로 유명한 성주 지역은 예전에는 가야 국가 중 하나인 성산 가야가 존재했다. 삼국유사에 성산 가야에 관한 짧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성산 가야의 중심지는 성산동 고분군이 있는 성주읍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산가야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일리군으로 편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로 불렸다. 조선 태종 시대에는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에는 세종대왕 자손들의 태실이 있다. 이 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되었다. 세종의 왕자들과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세종과 소헌왕후에게서 출생한 왕자는 문종과 수양·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이 있었다. 이들의 태실 중 안평과 금성의 태실은 수양대군인 세조에 의해 훼손되었다. 안평대군은 계유정란(1453년) 당시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그의 형 수양대군에 의해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세종대왕의 원손인 단종을 비롯한 세종의 아들들의 태실이 모여있다.
▲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실 세종대왕의 원손인 단종을 비롯한 세종의 아들들의 태실이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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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마을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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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계유정란 이후에도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했다. 그는 세조 즉위 후에는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된다. 세조 3년(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부사와 함께 비밀리에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한 노비가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이를 보고했다. 결국 금성대군도 젊은 나이에 그의 형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왕자의 난을 비롯해 세종의 외가와 처가 집안의 많은 이를 죽였다. 이를 본 세종은 그의 후손들이 우애 깊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뜻에 따라 세종은 왕자들과 세손인 단종의 탯줄을 풍수지리 상 좋은 곳인 성주에 묻었다. 하지만 그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 의해 세종의 많은 후손이 화를 입은 사실이 애처롭다.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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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 이후 성산 이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현재는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진사댁,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고택과 같은 고택이 여러 채 남아 보존되고 있다. 한개마을은 2007년 12월 31일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됐다.

성주 읍내의 외곽에는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성밖숲이 있다. 성밖숲에는 수령이300~500년된 왕버드나무 59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 왕버드나무는 무더운 여름에 큰 그늘을 내어주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게 해준다.

성밖숲
 성밖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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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 함께 올린 글입니다.



태그:#성주, #한개마을, #세종대왕 왕자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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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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