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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 다 같이 애국가를 제창했다. 비록 1절이지만 무대 정면의 대형 태극기를 바라보며 목청껏 애국가를 불러본 건 참 오랜만이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해 묵념하라는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여태껏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치면 '이하 의식은 생략한다'는 게 보통이었던 터라 무척 어색했다.

얼마 전 직무 연수를 받는 자리에서다. 우리에게 국민의례는 행사 시작 전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연하고도 익숙한 절차다. 국민의례가 빠지면 행사가 아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묵념 등의 절차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개는 애국가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국기에 대한 경례의 글귀를 낭송하는 식으로 행해져왔다. 말하자면, '약식' 국민의례인 셈이다.

마치 구구단처럼 애국가의 노랫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조금은 낯설었다. 묵념을 할 때는 주변을 슬쩍 살피며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행사에 높은 분이 오셨나?' 다들 나와 같았는지 하나같이 주위를 살피며 데면데면해하는 눈치였다. 국민의례야 우리가 삼시세끼 밥 먹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에프엠(FM)'대로 한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인터폰을 통해 집집마다 조기(弔旗)를 달라며 수차례 안내 방송을 했다. '조기 게양에 동참하여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자'는 내용이다. 동 주민센터가 주관하여 관내 아파트 단지마다 배포한 것이라고 한다. 아침 시간 안내 방송에 잠이 깬 건 처음이다.

국가 지정 기념일을 단지 휴일로 여기는 요즘의 세태를 떠올린다면, 박수칠 일이지 결코 몽니부릴 일은 아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현충'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왜 6월 6일로 지정이 됐는지 등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 역시 전에 없던 일이라 주민들이 어색해 하는 것이다.

당일 외출하며 만난 나이 지긋한 이웃 어르신 한 분은 주차장 주변 아파트를 휭 둘러보더니 마치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안내 방송을 듣고도 이 모양이야. 우리나라 사람들 이렇게 애국심이 없어서야. 큰 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둘러보니 과연 조기를 게양한 집이 아파트 한 동에 서너 곳에 불과했다. 외려 베란다에 노란 세월호 현수막을 내건 집이 더 많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달 말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집에 돌아와 정성스레 태극기를 그리고 있었다. 아마도 학교에서 '호국 보훈의 달'을 기념해 미술 과제로 내준 듯했다. 아이는 태극기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얼마 전 시위 도중 어떤 이가 태극기를 불태웠다는 뉴스를 보고는 단박에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이유야 어떻든 태극기를 불태우는 건 나라를 버리는 짓 아니냐며 반문할 정도다. 그런데 정작태극과 팔괘의 문양이 무얼 의미하고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여행하다 옛 건축물 등에 새겨진 태극무늬만 보면 다짜고짜 '우리나라의 것'이라 반가워하곤 한다. 얼마 전까지 태극의 파란색은 남한, 빨간색은 북한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던 아이다.

아이를 통해 30년도 더 지난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회상해보게 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 4절은 말할 것도 없고, 총 '393자'의 그 길었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던 그때 그 시절 말이다. 어린 마음에 경쟁적으로 암기했고, 못 외울라치면 친구들로부터 요즘 말로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다. 나중 철들어 깨닫기 전까지 그것들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국민'이 되기 위한 '필수 교양'이었다.

태극기도 그 중 하나였다. 태극기의 팔괘 중 '감'과 '이'의 자리가 왜 그리 헛갈렸는지 시험문제만 나오면 틀리기 일쑤였고, 태극기를 그려오라는 숙제도 무던히도 많았다. 해마다 태극기 그리기 포스터 대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문이든, 교실과 복도든 '애국애족' 표어가 곳곳에 나붙던 시절이었다.

한 세대를 뛰어넘어 아이를 통해 태극기의 '부활'을 보노라니 그 시절의 씁쓸한 추억이 떠오른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뀐 지 꽤 오래됐지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교육에 여전히 맹목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다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한데, 촌스럽기까지 하다. 아이 역시도 때가 되면 철이 들 것이다.

듣자니까, 급기야 공무원 선발을 위한 면접시험에까지 애국가 4절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알고 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주무부서인 인사혁신처는 응시자의 '공직 가치관' 평가를 강화하기 위해서 끼워 넣은 항목이라고 밝혔다. 예비 공직자로서 투철한 국가관을 검증하는 절차라는 건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애국가를 잘 암기하고 태극기 잘 그리는 게 그들이 말하는 애국심의 척도인 셈이다. 순간 정부는 공무원 시험을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애국심을 강요하고 암기하는 시대

바야흐로 애국심을 강요하고 암기하는 시대가 됐다. '약식' 국민의례는 국가에 대한 불충이고, 현충일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 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배신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다. 심지어 학교에선 군사독재정권과 함께 사라졌던 '국민윤리' 과목이 머지않아 부활할 거라는 소문마저 떠돈다. 스스로 권력 앞에서 애국심을 증명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서슬 퍼런 분위기는 학교와 공직에만 한정되는 건 아닌 듯하다. 지인의 추천으로 찾은 영화관에서도 느껴진다. 영화 <소수의견>을 보러 갔던 자리에서다. 상영관이 열 개도 넘는 멀티플렉스가 여럿인데도, 볼 수 있는 곳이 극히 제한돼 있었다. 아예 상영하지 않는 곳도 있고, 그나마 하루에 단 한 번 틀고 마는 영화관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조조이거나 심야인 곳이 있었다.

아예 보지 말라는 걸까. 극의 짜임새와 재미, 배우들의 연기 등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 없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철저히 배척당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욱이 영화관마다 동시 상영 중인 영화 <연평해전>과 비교가 돼 안쓰러울 지경이다. <연평해전>은 상영관마다 하루 10회가 넘는 건 기본이고, 한 영화관에서 상영관이 두세 곳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매표소에 물어보니, 최근 더 늘긴 했지만 개봉할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찾는 고객이 많아 상영관을 늘린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7월 9일 현재 380만 명 대 36만 명이라는, 두 영화의 열 배 남짓한 관객 수 차이는 상영관과 상영 회수 차이와 정확히 비례한다. 처음부터 상영관이 많다보니 관객 수가 늘어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조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역 군인들의 <연평해전> 단체 관람이 줄을 잇고 있다고도 한다.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이 영화를 추천하며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을 갖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개 상업 영화가 정부로부터 안보 교육의 모범 사례라며 극찬을 받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덕분에(?) '피고 대한민국의 유죄'를 주장한 <소수의견>은 순간 '좌빨 영화'로 낙인찍혔다. <연평해전>의 김학순 감독은 어느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건강한 사회라면 보수, 진보 영화라는 평가가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며 '두 영화 모두 동반 성장하면 좋을 것'이라 말했지만, 우리가 그의 바람처럼 '건강한 사회'는 아닌 것 같다. 누구 말마따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수의견>은 '소수의견'일 뿐이니.

상업 영화의 평가에서조차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기준이라도 되는 양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그의 바람대로 젊은 세대에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는 미지수다. 어렵사리 두 영화를 모두 봤다는 한 아이는 이런 평가를 내놨다. 그의 간단명료한 '애국관'이 귀에 꽂혔다.

"60~70년대도 아닌데, 영화 내용을 두고 애국심 고취 운운하는 건 황당해요. 정작 중요한 건 두 영화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거죠. 시나브로 잊혀가는 그것들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었으니 두 영화 모두 꼭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애국심이 별 건가요. 과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게 애국이죠.

어떻든 그러자면 <소수의견>의 상영관을 <연평해전> 정도로 늘리면 좋겠어요. 주위엔 주말에라도 보고 싶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어서, 또 시간이 맞지 않아서 보지 못했다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고등학생인 저도 <소수의견>을 부모님과 주말 심야 프로로 봤다니까요. 정말이지 웬만한 의지가 없으면 보기가 쉽지 않아요."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근래 겪었던 이 모든 해프닝은 사실 영화 <국제시장>의 부부싸움 중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에 '감동한' 대통령의 한마디에 관료들은 느닷없이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한답시고 온갖 어처구니없는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퇴행적인 사회 분위기를 타고 그 한심한 발상들이 먹혀드는 듯 보이지만, 종국에는 애국심이라는 단어조차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 같아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태그:#소수의견, #연평해전,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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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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