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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신문 2호에 실린 '영이의 그림일기'
 가족신문 2호에 실린 '영이의 그림일기'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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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구드래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배는 맑은 물살을 가르고 낙화암 적벽 앞을 지났다.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는 날, 여인들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그곳의 빼어난 경치에 사람들은 감탄사를 던졌다. 아내와 두 녀석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적벽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난 다른 데에 관심이 있었다. 

[장면①] 추억을 앗아간 큰빗이끼벌레

키를 잡은 선장에게 물었다.

- 이 강은 금강입니까? 백마강입니까?
"같은 강인데, 부여 쪽의 금강을 백마강이라고 불러유. 물이 너무 맑지유?"

- 물 깊이가 얼마나 되지요?
"3~4미터쯤 되지유."

- 수심이 6미터 되면 3000톤급 배가 지나갈 수 있나요?
"힘들지유. 여기도 배가 지나가는 수로만 3~4미터이지, 거기 빼고는 다 낮아유."

-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를 주장하면서 금강에 배를 띄우겠다는 걸까요?

키를 잡고 앞을 바라보면서 건성건성 대답하던 선장은 마지막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얼굴을 쳐다봤다.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는 나도 잠깐 당황했지만 마치 '당신을 취재하는 기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 듯 선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이내 의심을 풀었다.

"그건 정신 나간 소리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유."  

가족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나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제1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를 취재했다. 운하의 나라인 독일과 네덜란드에 가서 해외취재를 하기도 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워커홀릭' 아빠 기자는 휴가지에서도 습관처럼 취재를 했고, 나중에 선장과의 대화 내용을 실제 기사에 인용까지 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지난 6월 말에 나는 보트를 타고 시민기자들과 함께 금강 탐사보도를 진행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기어코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이듬해에 구드래 나루터 건너편에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 다음해부터 녹조가 창궐하고 큰빗이끼벌레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백제의 여인들이 몸을 던진 깊은 물속에서 꺼낸 새까만 저질토에서 새빨간 실지렁이와 깔따구 유충들이 바글바글했다. 금강이 시궁창으로 변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우리 가족의 추억도 앗아갔다.

[장면②] 백제의 향기를 머금은 석탑

"우리, 그림 그려볼까?"

아내 기자가 명령조로 제안했다. 두 녀석은 잔디밭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취재수첩에 그림을 그렸다. 부여읍 한 가운데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이었다. 국보 9호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운 아름답고 단아한 탑이다. 불행히도 정림사는 남아있지 않았다.     

탑 뒤편이 저녁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참숯이 타오르듯 은은하게 번지는 붉은 기운 속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1500년 동안 그 자리에서 앉아서 백제의 향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20여 분이 흘렀을까?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주위가 어두컴컴해졌을 때 가족신문에 실을 우스꽝스러운 '작품'들이 탄생했다.

가족신문 2호에 실린 정림사지 5층석탑 그림. 위 오른쪽은 첫째 녀석, 왼쪽은 엄마 기자, 아랫쪽은 막내가 취재수첩에 그렸다.
 가족신문 2호에 실린 정림사지 5층석탑 그림. 위 오른쪽은 첫째 녀석, 왼쪽은 엄마 기자, 아랫쪽은 막내가 취재수첩에 그렸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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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아래쪽 그림은 당시 6세였던 영이가 내놓은 작품이다. 애를 쓴 것 같기는 한데, 취재수첩에 오층석탑은 없다. 그 자리에 '깡통로봇'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 자기 이름도 새겨 넣고 누가 보면 혹시 모를까봐 탑 몸통에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는 글씨도 크게 박았다. 3~4년이 흐른 뒤에 가족신문을 들척이다가 그림을 본 영이는 "너무 엉터리"라면서 "탑이 아니라 기린 같다"라고 말했다.

왼쪽 그림은 당시 4학년 김민 기자 작품이다. 6년 뒤에 태어난 김영 기자와 비교하면 그래도 나이값을 했다. 단아하지만 발랄함이 풍기는 포인트를 놓치지 않았다. 지붕돌 끝이 입 꼬리처럼 추켜올려진 오층석탑의 특징을 잘 표현했다. 누가 보아도 이건 탑이다. 그런데 개업한 집 앞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몸을 흔들어대는 허수아비 같다. 돌로 만든 석탑이 하늘을 향해 곧추서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오른쪽은 엄마 그림이다. 석탑을 잘 모르지만,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세운 모습이 그래도 실물과 제일 가깝다. 석탑이 아니라 목탑처럼 정교했다. 단아한 아름다움은 절제와 절도를 지키는 백제의 선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붉은 어둠 속으로 점점 묻혀가는 암전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입체감도 살아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팔불출이다.

[장면③] 금동대향로를 이긴 간돌검

가족여행지 인근의 박물관은 단골 취재장소였다. 그 지역의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학습 여행'의 취지에도 맞아 떨어졌다. 부여 금성산 기슭에 있는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가족신문 취재기자 세 명을 사로잡은 건 금동대향로였다. 책에서 봤을 때와는 감동의 무게가 달랐다.

향로 뚜껑의 황금색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자세히 보니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연꽃모양이다. 그 꼭대기에 봉황 한마리가 힘찬 날갯짓을 했다. 봉황의 바로 밑에는 악사(樂士) 다섯 명이 피리·비파·퉁소·거문고·북 등을 연주했다. 향로 받침에서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곧추세운 채 입으로 향로의 몸통 아랫부분을 물고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를 본 게 가장 재미있었다."

6세 김영 기자가 가족신문에 기록한 백제의 예술 최고봉은 금동대향로였다. 녀석은 국보 287호를 알아봤다. 그 흥분을 그림일기로 표현했다. 물론 실물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A4 용지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느낌은 살아있다. 엄마 기자도 기사를 통해 금동대향로를 극찬했다. 

"도대체 이게 사람이 만든 것인가 의심케 하는 천국의 향로였다. 향로 하나에 모든 철학적 사고를 녹여 승화시킨 백제 금동대향로의 유연함과 여성미는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백제인의 절약과 절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첫째 딸이 쓴 기사.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첫째 딸이 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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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첫째 녀석은 다른 것에 시선이 꽂혔다. 부러진 칼을 다시 갈아 쓴 간돌검이었다. 아빠 기자도 그냥 지나쳤는데 첫째 녀석은 짜리몽땅한 칼집에서 백제인들의 절약정신을 빼들었다.  

"부여 박물관에 가서 여러 가지 느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 바로 부여의 절약정신이었다.

간돌검이란 부러진 칼을 다시 갈아서 쓴 칼이다. 그래서 그런지 밉게 생겼다. 하지만 그 속만은 아주 깨끗한 것 같다. 간돌검은 비록 작지만 속마음은 아주 강하다. 우린 연필을 반쯤 쓰면 손이 안 잡힌다고 구석에 처박아 놓고 새 연필을 깎아서 쓴다. 우리 반 장난꾸러기 남자애들은 누가 가장 짧은 몽당연필을 만들려고 일부러 연필을 칼로 자르기도 한다.

연필이 오래돼서 닳은 걸 깎아서 계속 쓰면 엄마들은 연필 손버릇이 나빠진다고 버리라고 한다. 연필을 아껴 쓰는 버릇은 좋지만 연필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만 아껴 쓰면 좋을 것 같다.   

부여의 절약 정신을 본받자. 하지만 너무 아껴 쓰는 것도 좋지 않다. 우리들의 후손에게 남겨줄 것은 절약 정신이다. 꼭 부여의 사람처럼 절약 정신을 키우자."

말과 글, 그림에도 절약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 절제와 절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오래간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아직도 살아 백제의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대로 불과 5년짜리 정권이 수천만 년에 걸쳐 흘러온 강물에 무절제하게 메스를 들이댔지만, 물은 썩고 있다. 22조 원을 집어 삼켰는데도 매년 국민의 주머닛돈을 쏟아 부어 악취가 진동하는 '녹조라떼'를 만들고 있다.        

3박 4일간의 백제 취재여행은 정원의 미학을 보여주는 궁남지 산책으로 막을 내렸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궁남지의 커다란 연꽃 위에서 작은 물방울이 조명을 받으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해 무더웠던 여름휴가, 우리 가족은 해수욕장 한번 가지 못하고 즐겁게 가족신문을 만들었다.

부여 궁남지 연꽃밭 앞에서 두 녀석이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 촬영했다.
 부여 궁남지 연꽃밭 앞에서 두 녀석이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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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신문 2호 여행 경로>
2007년 8월 3일 :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발굴 현장->국립부여박물관
2007년 8월 4일 : 부소산성->고란사->낙화암->정림사지 박물관->궁남지
2007년 8월 5일 : 귀가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가족신문, #여행, #10만인클럽,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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