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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나았을까? 처음에는 괜히 물어봤다 했어.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니까 물어보길 잘했다 싶기도 하더라고. 석 달에서 일 년이라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뭐가 충분하다는 말인가. 삶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이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십 년이라 한들 다를까. 아무리 긴 시간이 주어져도 이별에는 짧다. 슬픔이 저미는 내 마음과 달리 곽정숙 전 의원(18대 국회의원, 전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표정은 평온하다.

2015년 1월,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지셨다고 했잖아…."

소식을 전한 후배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바로 다음 해, 2013년 2월 발병이 확인되었고, 애초에 발병했던 간은 완치되었는데, 폐로 전이된 후 악화하였다고 한다. 의료진은 더 이상의 의학적 치료는 무의미하다는 의사를 전달하였고, 곽 의원은 지난 2년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힘겨운 치료를 접고 집으로 돌아갔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더니, 정말로 그러했다. 온종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인권복지·보편복지로 평등 세상" 만들자던 꿈

지난 15일, 투병 중인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지난 15일, 투병 중인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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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숙은 18대 국회의원이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를 역임하였고, 여성장애인 인권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로 '오월여성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하였으며 보건복지위원회,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인권복지·보편적 복지로 평등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의정활동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5석에 불과한 소수정당이었다. 객관적으로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의정활동의 성과는 그 힘을 훌쩍 뛰어넘었다. 곽정숙 의원은 임기 4년 동안 총 82건의 법안 제·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였으며 이 중 22건이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제정법만 해도 '장애인·고령자 등 주거약자를 위한 지원법'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향상을 위한 법률'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 등 4건이다. 비록 통과되지는 않았으나 '장애여성지원법'을 발의하여 여성장애인 지원 정책을 공론화한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중증장애인 근로지원제도 법제화, 외국인 장애인등록 허용, 정신장애인의 직업 활동 보장, 사회복지시설 투명성 확보와 인권보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대에는 불출마하였으며 지역에 돌아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중 간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곽정숙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비례대표 선거운동을 하던 후보 시절부터 함께 일했다. 4년 임기를 마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갈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일했던 보좌진은 내가 유일했다. 4년을 온전히 함께 보냈기에 그 시간이 어떠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 간암이라 했을 때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간은 피로하면 악화되는 장기 아닌가.

후보 시절부터 전국 각지의 장애인단체와 만나도록 쉼 없이 일정을 잡았다. 모든 광역시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기 시작 이후에는 그보다 몇 배 많은 고된 일정이 있었다. 18대 국회 진보정당 의원들의 의정활동은 촛불집회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5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대해 반대하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졌고, 국회 개원일인 6월 5일에도 어김없이 집회가 있었다. '소고기 장관고시 반대 전면 재협상 추진'을 위한 삼보일배를 하던 중 경찰들이 방패로 막고 밀어붙일 때는 의원이 다칠까 봐 다급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냈다. 체구가 작은 의원이 집회 도중 몸싸움에 밀리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농성 도중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에 밀려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다. 공교롭게도 보좌진들은 다른 장소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였다. 보좌관이 아무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놀라기도 했고, 죄책감도 컸다.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쌍용자동차 농성에 합류했던 평택의 여름은 어떠했던가. 지독히 더웠다. 내리쬐던 햇볕, 등을 타고 흐르는 땀,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 차량 이동이 차단된 텅 빈 도로는 당시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천막에서 잠을 자야 했던 날들, 아스팔트 위의 시간. 그곳에 곽정숙 의원이 있었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자회견과 집회, 농성, 파업현장 지지방문이 임기 내내 계속되었다. 어느 날, 곽 의원이 "일정을 좀 줄이면 안 되겠나? 힘이 드네" 말하였을 때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더 찾아가자고는 못할 망정 일정을 줄이자고 하다니,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이 정도 각오도 없었나 싶었다.

아마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 곽 의원이 간염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 것이.

"의원 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하도 피곤하고, 미열이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B형 간염 때문이라고 해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 비활성이었고, 수치가 낮아서 치료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계속 약을 먹었어, 피곤하면 일 못하니까. 의사가 그게 원인이 된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때 약을 안 먹었어야 했나 싶네."

나는 약을 먹어야 할 정도였는지 전혀 몰랐다. 임기 말에 이르러 서야 간이 안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나는 썩 좋은 참모가 아니었다. 의원의 건강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사명감에 짓눌려 '의원을 잘 보좌해야 한다'는 보좌관의 기본 책무를 잊었다. 살면서 후회되는 게 하나둘이랴. 지금에야 아무 소용없지만, 생각할수록 후회된다.

곽 의원은 국회의원 임기 중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이 담긴 에세이집과 의정활동보고서를 냈을 뿐 자서전은 출간하지 않았다. 나는 늘 의원의 자서전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특히 다른 여성장애인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권하였다.

"자기 생색내기로 자서전을 남기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것보다 내가 하는 작은 고백이 바른 정치·선한 정치에 대한 권면이 되면 좋겠네. 내 경험을 듣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싶네."

곽 의원은 여성장애인이 정치하게 된 과정을 통해 정치의 중요성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나의 마지막 보좌다.

"5살 때 장애인... 학창시절이 제일 슬펐다"

곽정숙 전 의원의 어렸을 적 사진
 곽정숙 전 의원의 어렸을 적 사진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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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 5살 때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5살 때 결핵성 척추염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부모님이 몇 년 동안 치료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집도 팔고, 재산을 다 처분하여 대수술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척추 장애인이 되었다.

당시는 장애인이라고 하면 '웃음 끝, 절망 시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장애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다. 길에서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볼 수 없었고,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집 안에 숨던 시대였다.

사회적 인식이 높아도 가족과 당사자가 장애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데, 사회적 상황이 열악하니 '장애인 곽정숙'만 크게 생각되었다. '장애인'이라는 것밖에 (나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으니 살아갈 희망이 안 보였다. 남들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상에 뭔가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사는데 나는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너무 슬퍼서 밤새 울기도 했다. 남들은 즐거웠다는 학창 시절이 나는 인생에 가장 슬픈 시기였다."

- 학교는 언제까지 다녔나? 공부를 정말 잘했나? (웃음)
"잘했다. (웃음) 나는 잘 몰랐는데 친구들이 나를 "쟤는 겁나게 공부 잘하는 애"라고 했다고 한다. 전교생이 다 나를 안다. 전교에서 척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나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갔는데 책가방도 들고 다니기 어려웠다. 엄마, 언니, 동생, 친구들이 돌아가며 들어다 줬다. 너무 힘들어서 책은 빼놓고, 빈 가방만 들고 다니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러다 큰일 나겠다며 건강이 첫째니까 학교를 그만 다니라고 했다. 결국,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일 년 동안 집에서 쉬었는데, 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다시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졸랐다. 부모님은 말렸지만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겠다고 했다.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다시 복학했다. 새 담임선생님이 성적을 보더니 깜짝 놀라셨다. 이렇게 공부를 잘했는데 휴학을 했느냐고 하셨다. 공부 잘했다니까. (웃음)

그렇게 원해서 다시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은 없고, 동생들하고 다니니까 마음이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생활에는 적응했는데 몸이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못 갔다. 또 일 년을 쉬고 나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집에서 통신으로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여기저기 알아봐서 전남여고 부설 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은 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보니까 혼자 통신으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였다. 겨우 과정만 마쳤다."

-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나서는 어떻게 지냈나? 공부 잘했던 것이 아깝다.
"동네에 공부 잘했다고 소문이 났다. 이웃들이 자기 아이를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다. 그래서 집에서 아이들 과외를 시작했는데, 가르치던 애 중에 성적이 크게 떨어지는 아이가 있었는데 금방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놀라서 어떻게 성적이 올랐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 아이가 과외를 했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성적이 떨어지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여기 가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그다음에 과외 해달라는 애들이 몰려왔다.

그때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과외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수입도 쏠쏠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니 보람도 있었는데 법으로 못하게 하니 방법이 있나. 다 멈췄다.

다른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찾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여성회관(센터)에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는 정보가 나왔다. 거기서 자수를 배우고, 그걸 토대로 자수 병풍을 만들어서 파는 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몇 사람이 같이 수를 놔서 파는 집이었다. 2~3년 동안 다양한 수를 배워 작품도 만들고, 수입도 올렸다. 한동안 건강도 괜찮았는데 몸이 다시 안 좋아졌다. 일 년에 두세 차례 수혈을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악성빈혈 진단을 받았는데 나중에 검사했더니 다행히 악성은 아니라고 했다."

- 그럼 병명이?
"위출혈이었다. 위출혈이 잡히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다. 그때 가족들은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종교로 굳건히 붙잡을 수 있었던 그의 삶

젊었을 적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젊었을 적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
ⓒ 곽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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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곽 의원은 잘 이겨냈다. 살면서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어쩌면, 이번에도 잘 넘길지 모른다. 생명의 위대함은 우리가 끝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간이 다 알지 못하는 많은 부분은 신의 영역이다. 곽 의원은 종교인이다. 종교를 빼고 곽 의원의 인생을 말할 수 없다. 슬픔과 절망 가운데 살다 종교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삶의 목적을 찾았다. 종교가 있었기에 자신의 삶을 굳건히 붙잡을 수 있었다.

- 언제부터 종교를 갖게 되었나?
"나의 신앙고백은 1980년도, 20세에 시작된다. 사실 모태신앙인데, 교회가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못 갔다. 어린 마음에 교회가 참 가고 싶었다. 지금 가보면 가까운 거리인데 그때는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스무 살에 언니하고 같이 광주에서 자취했다. 주일날(일요일) 여느 때처럼 나는 아파서 누워 있고, 언니는 교회 간다고 문을 닫고 나가는데, 불현듯 '나도 교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오면서 눈물이 났다.

옆에 성경책과 찬송가가 있어서 펼쳐 들고, 혼자 펑펑 울면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며칠 동안 "용서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두 문장을 끊임없이 고백했다. 그렇게 난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는 장애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을 슬프게만 생각했다. 가장 처절한 슬픔은 삶에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무의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서 신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었을 때는 '목적'이 있었고, 그것은 그분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삶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 종교를 갖게 된 이후에는 장애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나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자유로워진 계기가 있었다. 성경에 예수에게 제자들이 '날 때부터 장애인이 된 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구절이 있다. 예수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고 답한다.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어느 날, 거울을 보았다. 볼품없는 내 모습을 비춰보며 '하나님, 부끄럽고 민망합니다'하고 가만히 말했다. 아, 그런데 그분은 '매우 아름답다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애 처음으로 대중목욕탕을 갔다. 내 신체가 부끄럽지 않았고, 어느 사람 앞에서든 벗어나고 당당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주일학교(초등학생 예배) 교사를 했는데 예배시간에 몹시 떠들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5학년 형제지간이었는데 누구 말도 듣지 않았다. 나에게 오더니 내 등을 가리키며 '뭐 들어 있어요?'하고 물었다.

옆에 있는 다른 선생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멈추지 않고, '뭐예요? 뭐얘요?' 물었다. '옷 속에 정말 뭔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반응할까?' 망설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얘들아, 여기 뭐 들어있는지 궁금해? 보물 들어있어', '보물이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궁금하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대상(교회 단상) 뒤로 불러 옷을 들추고, 굽은 등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게 보물이란다' 말하는데 나도 떨렸다. '그렇다, 보물이다' 말하고 나니 나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내 몸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 아닌가' 그 다음 주부터 아이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배도 얌전히 잘 드리고, 내 말도 잘 들어서 아이들 엄마조차 놀랄 정도였다. 나의 영혼을 자라게 해 준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하다. 나를 기억할까? 어떻게 기억할까?

*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박선민, #곽정숙,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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