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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살배기 첫째가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운다.

"(공원에) 더, 더!"
"아니야, 아니야, 집 아니야!"

날씨가 좋을 때면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 둘을 데리고 곧장 공원으로 향한다. 매일 같은 공원에서 노는데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고 신기한 게 많은 걸까? 첫째는 다른 아이들이 다 집에 가고 해가 지도록 더 논다고 버티다가 겨우 집으로 향한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시간을 짐작게 한다.
▲ 공원을 떠나지 않는 첫째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시간을 짐작게 한다.
ⓒ 송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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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벗어났다 해도, 집으로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3층까지 올라가는 데 뭐 그리 구경할 것이 많은지…. 물웅덩이를 보면 꼭 한 번씩 풍덩 하며 두 발을 흠뻑 적셔야 한다. 계단 손잡이에 제 얼굴을 비쳐 깔깔 웃기도 하고, 다른 집 문에 붙은 전단도 구경하며 끝도 없이 '이건 뭐야?'를 연발한다. 첫째의 빠른 귀가를 위해 엄마는 점점 연기의 달인이 되어 간다.

"엄마 간다, 진짜 엄마만 갈 거야!"

집에 먼저 가버리는 '척'하는 연기를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선보인다. 무서운 버전에서부터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 버전까지 몇 번이고 커트가 될 때까지 연기는 계속된다. 결국, 첫째는 기저귀가 소변으로 축 늘어져서야 집으로 들어온다.

그런 첫째에게 그림책 <넉 점 반>을 읽어준다. 첫째는 이 <넉 점 반> 속의 아이가 자기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알까?

<넉점 반> 겉표지
 <넉점 반> 겉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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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여자 아이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동네 슈퍼에 가서 시간을 물어본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때는 바야흐로 넉 점 반(네 시 반)!

아이는 행여 시간을 잊어버릴까 봐, '넉 점 반, 넉 점 반'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집으로 오는 아이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물 먹는 닭에서부터 개미와 잠자리도 살펴야 하고, 분꽃을 따 입에 물고 '니나니 나니나' 놀기도 해야 한다.

책 속의 여자아이처럼 여기저기 쏘다니게 하지는 못하지만, 첫째는 공원에만 나와도 무척 좋아한다. 이렇게 아이 둘과 밖으로 나오면 집에서 놀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 나도 좋다.

하지만 아이들과 공원에 온 지 한 시간이 넘어가면 초조해진다. 집에 가서 밥도 안쳐야 하고, 준비해둔 찬거리도 조리해야 하는데…. 지금은 저렇게 뛰어놀지만 분명 올라가자마자 배고프다고 난리 칠 텐데….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던 나는 이미 상상 속에서 부엌으로 달려가 한창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엄마를 첫째가 같이 그네 타자고 부른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부터 공원으로 소환된다.

저녁 식사 준비, 둘째 수유 등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잊고 오래간만에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타면서 밀린 집안일을 잊고, 나도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웃어본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항상 앞만 보고 걸었던 나이다. '조금 더 빨리 걸어야 신호등이 켜질 때 바로 건너겠구나, 이제 곧 차가 막힐 시간이니 빨리 출발해야겠다' 등 머릿속에 항상 '빨리'를 달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아이 덕분에 가만히 넋 놓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본다. 내 키보다 훨씬 더 높이 달린 거미줄도 보고, 아이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지렁이와 개미들을 한참이고 구경한다. 이제는 공원에 가면 어디에 큰 개미구멍이 있는지 척척 찾아낼 정도다.

들여다보기의 힘

광고 홍보 전문가 박웅현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여덟 단어>라는 책에서 '견(見)'을 말한 바 있다.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 시청(視聽).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견문(見聞).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공원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봄에 피는 꽃은 뭐 뭐, 여름에 열리는 열매는 뭐 뭐 이런 식으로 암기만 했다. 그런데 아이와 공원을 거닐면서 봄이라고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목련이 먼저 피고, 그 하얀 꽃이 덩어리로 툭 떨어진 다음에야 벚꽃이 피어남을 보며 비로소 진정한 봄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뭇가지는 최고의 장난감
 나뭇가지는 최고의 장난감
ⓒ 송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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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하면 소중히 쓸 수 있을까? 바로 아이들과 공원에 있는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박웅현의 말처럼 촉수를 예민하게 만들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저녁밥 걱정도, 흙모래로 더러워진 아이 바지를 빨 걱정도 잠시 접어둔다. 내생에 놀이터에 오는 날은 다시없을 것처럼, 신나게 아이처럼 뛰어논다. 긴 나뭇가지를 주워 모래에 그림도 그리고, 아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그렇게 깔깔거린다.

어떤 순간에 내가 의미를 부여해주어야 그 순간이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나의 삶은 의미 있는 순간의 합이 되는 것이고, 내가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나의 삶은 의미 없는 순간의 합이 되는 것이에요. 
- 박웅현의 <여덟 단어> 중

내 등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첫째가 이제는 혼자서도 공원 곳곳을 뛰어다닌다. 엄마 품이 아니면 자지러지게 우는 둘째도 이제 곧 내 곁을 떠나 세상 속으로 걸어가겠지…. 나중에 아이들이 커버리면 내가 공원에서 같이 놀자고 해도, 그 아이들은 내 품을 떠나가리라. 오늘 하루 육아가 힘들었음에 투정만 부리지 말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온다. 해가 꼴딱 져서 집에 돌아온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시방 넉점 반이래."

아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고 맹한 표정을 짓는 엄마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엄마를 쳐다보는 여자아이!

반전은 여자아이의 집이 시간을 물어본 가게 바로 옆이었다는 것이다. 그 짧은 거리를 돌고 돌아 집으로 오는 동안 그림책 속의 여자아이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그저 '지금 여기'에 충실한 아이들의 순수한 본능이 부럽고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그림책 육아일기2] 첫째도 둘째도 아토피, 죄인 같았던 나를 구한 건...

덧붙이는 글 |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아이보다 더 그림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느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 기사에 소개된 그림책: <넉 점 반> / 윤석중 시 / 이영경 그림 / 창비 펴냄



태그:#넉 점 반, #그림책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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