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영화 보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으로 한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야근에 회식에,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잠자는 것이 우선인 당신입니다. 극장에 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컴퓨터에 다운만 받아놓고 보지 않은 영화만 수십 편이죠. 언젠가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항상 미룹니다.

당신은 이런 생활이 지겹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도 보지 못하는 삶이 회의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지리멸렬한 시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겐 딱히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는 건 사치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당신은 매일 한 번은 화장실 변기에 앉습니다. 의무적이든 습관적이든, 화장실을 찾죠. 그리고 전 그런 당신을 위해 변기에 앉아 큰일을 보며 볼 수 있는 짧은 영화 다섯 편을 추천해드립니다.

1. 신카이 마코토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자료사진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자료사진 ⓒ 신카이 마코토


첫 번째로 추천하는 영화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입니다. 1999년도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이 4분 49초이니 변기에 앉아서 보기에는 아주 적당할 겁니다. 혹시 신카이 마코토를 잘 모르실 것 같아 잠깐 설명을 하겠습니다. 일단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입니다. '빛의 작가'로 유명해 종종 렘브란트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고독과 권태, 삶의 공허 같은 소재로 감수성 짙은 작품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창기 초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로서, 감독의 색깔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품이죠. 고양이의 시선으로 한 여자를 관찰하는 내용입니다. 5분 남짓한 작품이라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진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고독한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고, 음악이 너무나 좋습니다. 당신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 루이스 부뉴엘 <안달루시아의 개>

 안달루시아의 개 포스터

안달루시아의 개 포스터 ⓒ Les Grands Films Classiques


두 번째로 추천하는 영화는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안달루시아의 개>입니다. 프랑스 작품이고, 1929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러닝타임이 17분이라 약간 깁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나온 영화입니다만,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공동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 그런지 흔히 이 작품을 초현실주의 영화라고 부릅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달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눈을 한 남자가 면도날로 베어내는 장면입니다. 남성이 여성의 시선을 절단하는 이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충격적인 건 확실합니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아방가르드 영화가 유행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작품인데, 이미지만 나열되어 있고 특정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쩌면 플롯에 기반을 둔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잘 감상하기 위해선 이미지의 상징성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은데, 이를테면 여성의 겨드랑이털, 구멍 뚫린 남자의 손바닥에 모여 있는 개미, 거리에 여성을 중심으로 서 있는 남성들은 모두 같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형태(혹은 이미지)만 바뀐 것일 뿐, 이미지에 담긴 속성의 유사함은 그대로라는 것이죠. 달과 여성의 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보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 최남단에 있는 지역이라 합니다.

3. 김기덕 <나의 어머니>

 김기덕 <나의 어머니> 중 한 장면

김기덕 <나의 어머니> 중 한 장면 ⓒ 김기덕


다음으로, 김기덕 감독의 <나의 어머니>란 작품입니다. 94초짜리 영화인데, 상당히 짧죠. 변기에 앉아 두 번 세 번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베니스 영화제에 기념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아주 짧은 영화이지만, 임팩트가 상당한, 그래서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여느 장편영화보다도 훨씬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머니가 아들(김기덕 감독)의 전화를 받고 마트로 갑니다. 그리고 배추 한 포기를 사와 배추전을 부치던 중 아들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식탁에 앉아 배추전과 쌈을 먹으며 "나의 어머니", "나의 아들"이라고 서로 말하며 영화가 끝이 나죠.

그런데 <나의 어머니>에서 주의 깊게 볼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마트 장면입니다. 마트 거울에 김기덕 감독이 촬영하는 모습이 잠시 비치는데, '감독의 실수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이 장면에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죠. 아니 어떻게 저런 생각을! 카메라 앵글은 거울에 비친 감독에서 배추를 고르는 어머니로 이어지고, 거울에 비친 감독이 마치 거울 밖의 어머니로 변한 것 같은 착시를 줍니다. 잠깐 스치고 지나간 장면에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진 거죠. 놀랍지 않으세요? 당신은 분명히 이 영화를 신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4. 라울 세르베 <아트락션>

 아트락션 영화 캡처

아트락션 영화 캡처 ⓒ 라울세르베


네 번째 추천작은 라울 세르베 감독의 <아트락션>입니다. 이 작품은 9분 31초짜리 애니메이션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라울 세르베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라울 세르베 감독은 1928년 벨기에 오스텐드라는 곳에서 출생해 겐트 왕검 미대에서 장식미술을 공부하였고, 지금은 실사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지만 매우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고 있죠. <아트락션>이란 작품은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양손에 커다란 쇳덩이를 매달고 느릿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무기력한 죄수들을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죄수들은 강력하게 비치는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가게 되면, 이 지긋지긋한 무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때부터 죄수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반전과 아이러니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이 작품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아, '아트락션'의 뜻은 알바니아어로 '끌어당김'이라고 합니다.

5. 필립 산솜과 올리 윌리엄 <블랙홀>

 <블랙홀> 영화 캡처

<블랙홀> 영화 캡처 ⓒ 필립 산솜 올리 윌리엄


마지막으로, 필립 산솜과 올리 윌리엄 감독의 <블랙홀>이란 작품을 보세요. 2분 58초짜리 영화죠. <블랙홀>은 칸영화제 출품작입니다. 일단 이야기가 어렵지 않아 좋습니다. 내용이 간결하고 기발하며,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확실합니다.

아마도 이 작품을 권선징악형 이야기라고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한 남자의 탐욕이 부른 반전의 결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는 두 감독은 실은 영화보다 뮤직비디오와 광고를 주로 찍고 있습니다. 간간이 단편영화를 연출, 제작하고 있다곤 하지만, 아쉽게도 두 감독의 영화를 국내에선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재미있고 재치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주길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추천한 다섯 편의 영화가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영화 보는 즐거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변기에 앉아있는 그 자투리 시간에도 배변의 희열과 함께 영화를 보는 쾌락도 같이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안달루시아의 개 나의 어머니 아트락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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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기고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많이 봅니다. 음악 많이 듣습니다. 독서는 기본입니다. 원고의뢰가 필요하신 분은 메일주세요! gisin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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