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0일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대한법률구조공단·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정부법무공단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0일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대한법률구조공단·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정부법무공단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11일 오전 11시 30분경 헌법재판소 기자실, '타닥타닥'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오던 곳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대법관들은 거의 해외 출장을 안 간다"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말에 기자들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이날 김 의원은 헌재가 '180일 내에 사건을 끝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법 38조를 잘 지키지 않는 점을 꼬집었다. 헌재 국감마다 어김 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다. 11일 오전에 질의한 법사위 소속 의원 8명 가운데 절반이 비슷한 지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김진태 의원은 동료 의원들과 달랐다. 다른 의원들은 미제 사건 수나 비율, 사례 등을 언급했지만, 그는 질의 초점을 헌법재판관들의 휴가와 해외 출장에 맞췄다.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헌법재판관, 하루도 안 쉬는 대법관들 본받아라?


김 의원은 박한철 소장을 뺀 나머지 재판관 8명이 2014년 9월부터 2015년 8월까지 1인당 평균 휴가·해외 출장 일수를 내보니 각각 11.4일, 10일이라고 했다. 또 이 숫자는 대법관(대법원장 제외) 평균 휴가 일수의 1.8배, 출장 일수의 4.3배라고 말했다.

"1년에 10일 출장 간 것 자체를 '많다, 적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미제 사건이 얼마나 되는데 해외 출장을 갑니까? (예전보다) 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제 사건 비율이 40%에 가깝고, 장기 미제 사건도 300건 가까이 남았는데."

이어 김 의원은 대법관들을 거론했다.

"제가 이번에 대법관들이 많이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거의 해외 출장을 안 갑니다. 1인당 평균 2.3일인데, 그 많은 대법관 중에 단 두 분 빼고는 한 번도 해외출장을 안 갔어요. 저도 이번에 보고 참 놀랐습니다. 민일영 대법관은 1년 내내 휴가·출장 하루도 없었습니다. 박상옥 대법관도 마찬가지고, 박병대 대법관은 휴가 딱 하루 썼어요. 그런데 헌법재판관들은 맨날 고생한다고 하는데... 다른 기관과 비교해서 안 됐지만 그렇습니다."

국감은 입법부가 행정부와 사법부가 적절한 업무 수행을 하는지 점검하도록 헌법이 정한 절차다. 국회 법사위가 헌재의 업무처리 지연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일 처리가 늦어지니 휴가 쓰지 말고, 출장도 가지 마라'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 많이 하는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3년 38개 회원국을 조사한 결과, 1인당 연평균 근로 시간은 1762시간이었다. 이 가운데 2000시간을 넘긴 나라는 딱 5곳, 멕시코(2237시간)와 코스타리카(2223시간), 그리스(2060시간)와 칠레(2015시간), 그리고 한국(2163시간)이었다.

한국은 일만 많이 한다. 쉬지 않는다. 같은 해 대한상공회의소는 300개 회사를 대상으로 연차휴가 사용 현황을 조사했다. 응답 기업의 74.7%는 직원들이 연차 휴가를 일부만 사용(62.7%)하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12.0%)고 답했다.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하는 곳은 25.3%에 불과했다.

'일만 하는 한국'을 보여주는 통계는 더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4 국민여가활동조사보고서>에서 582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 평균 휴가 일수는 6.0일이라고 밝혔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기본 연차휴가는 15일이다. 하지만 문화부 조사에서 응답자 절반(49.6%)은 휴가를 5일도 못 썼다고 했다. 5~10일을 쓴 사람도 37.8%에 달했다. 반면 법정 휴가에 해당하는 10~20일을 전부 사용하는 이들은 9.6%뿐이었다.

다들 한국은 일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은 쉬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약속했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장시간 노동 체제는 삶의 질을 저하하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며 '근로 시간 단축'을 주요 공약으로 내놨다. 국민에게 한 10가지 약속 중 7번 째였다.

다들 일 줄이자는데 '덜 쉬고 더 일하라'는 국회의원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자료사진).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자료사진).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그런데도 김 의원은 헌법재판관들에게 '덜 쉬고 더 일하라'고 했다. 휴가를 거의 쓰지 않는 대법관들을 본받으라는 것처럼 평균 휴가 일수를 비교했다. 또 업무로 해외 출장을 갈 시간에 "장기 미제 200여 건을 해결하는 게 옳지 않냐"고 했다. 목표는 '사건 처리 지연 질타'였지만, 비판은 엉뚱했다. 그래서 기자실이 시끄러워졌다. 기자들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오후 질의 때, 추가 발언권을 얻은 김진태 의원은 갑자기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때 참 큰 일을 하셨다"며 "(오전에) 해외 출장, 휴가라는 어찌 보면 다소 지엽적인 문제를 말씀드렸는데 고의는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 결정(해산)이 안 났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면 참 암담하다"며 "계속 (헌재에) 일이 밀려오고, (재판관들이) 고생한 것을 국민은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가 이야기는 헌재가)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고 분발해달라는 것으로 이해해주십사 합니다."

머쓱한 마무리였다.


태그:#김진태, #헌법재판소, #근로시간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