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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해외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삼남이자, 미주희망연대 의장인 장호준 목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미주희망연대 의장이자 고 장준하 선생의 삼남인 장호준 목사
 미주희망연대 의장이자 고 장준하 선생의 삼남인 장호준 목사
ⓒ 미주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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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귀하,

올 3월 귀하에게 서신을 보내며 다시는 서신을 보내는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수일 전 귀하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담한 심정으로 두 번째 서신을 보냅니다.

어려서 내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자주 등산을 다니시며 어린 내게 산에서의 행동에 대해 늘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산을 오를 때나 내려올 때, 산길을 걸을 때나 앉아서 쉴 때, 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산에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며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어려서는 그저 산을 아끼시는 마음이시리라 생각 했었지만, 사람은 잠시 산을 다녀가는 존재일 뿐 산은 산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과 역사의 능선과 계곡을 걸으시며 어린 내게 역사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 주고 계셨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박근혜씨,
우리는 모두 역사 앞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빼 와서도 안 되며 역사 안에 어떤 것을 던져 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산을 바꿀 수 없듯이, 역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덮어버리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974년 겨울, 내게는 아픈 사진 한 장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유신 독재에 맞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하셨다는 이유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구치소로 호송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간절함에 나는 가족들 곁을 벗어나 군 재판소 건물 한쪽의 복도 끝으로 달려갔습니다.

1974년 겨울, 내게는 아픈 사진 한 장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1974년 겨울, 내게는 아픈 사진 한 장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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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수갑에 채워진 아버지를 보는 순간 "내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묶었느냐!"고 호송관에게 외치기는 했지만, "나는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향해, 포승줄에 묶여 들어 올리실 수도 없는 수갑 채워진 손을 내미셨을 때 와락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잡지 못했었던 아픈 사진입니다.

어쩌면 어린 마음에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에 채워진 아버지의 두 손을 잡는 것이 겁이 났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부끄러움이 되었을 때 그 사진은 이미 다시 찍을 수 없는 춥고 음산한 아픔으로 내 가슴에 남아 역사가 되었습니다.

내게는 아픈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박근혜씨,
귀하에게도 아픈 사진이 가슴에 남아 있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한 번 가슴에 찍혀진 사진은 결코 지우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아픈 것은 아픈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남겨두어야 하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역사입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에 역사는 찍혀진 모습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9년 귀하의 동생 박지만씨가 당시 출간을 앞두고 있었던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서신을 통해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귀하의 동생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지 않았고 결국 박지만씨의 행동은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씨,
돌이켜 보면 당시 귀하의 동생이 행한 행동을 보면 비록 어리석기는 했다 하더라도 자식 된 도리라는 순수함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 귀하가 저지르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오히려 귀하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이념논쟁의 도구로서 귀하 아버지의 친일과 독재 행적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민족 역사의 왜곡 이전에 귀하 본인에 대한 패륜입니다. 행정예고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취소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진정 귀하가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증명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내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내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가 있습니다. 언젠가 손주라도 생기게 된다면 그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역사 교과서에 나온 이름과 사진들을 보여주며 선조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재 정권에 자유를 빼앗겼을 때, 친일과 독재의 주구로서 권력과 돈을 움켜쥔 자들의 한가운데에서도 굽히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우고 독재에 항거하며 나라를 바로 세운 사람들이 바로 너희의 조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도 그분들처럼 멋지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고 싶은 것, 그것이 내 작은 소망입니다.

박근혜씨,
귀하도 귀하의 후손들에게 역사의 사진들을 꺼내 보이며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다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자랑스러운 것을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하며 너희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라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라고 일러주는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내가 이 서신을 보내는 지금 귀하는 요즘 한창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해 찬란한 마지막 빛을 발하는 단풍을 보며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의 뜻을 새기시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철회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훗날 역사는 귀하를 친일과 독재 청산으로 이념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아름다운 대통령으로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끝으로 예수의 말을 전해 드리며 귀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이천십오년 시월 십사일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국정교과서, #장호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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