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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게 지금 가진 돈의 전부인데, 후원하고 싶어요."

등산복 차림의 남자는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 뭉치를 꺼냈다. 경찰의 서슬 퍼런 물대포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 날이었다. 부슬비 내리는 지난 11월 14일 서울시청역 5번 출구 앞에서 <오마이이뉴스> 10만인클럽은 피켓을 들고 거리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경찰의 물대포와 꼬깃꼬깃 지폐 9장

신장섭(51)씨는 민중총궐기대회 1차 집회시위현장서 10만인클럽 회원에 가입했다. 경찰의 물대포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 날이고 농민 백남기 어르신이 물대포 직사에 맞아 쓰러져 혼수상태가 된 날이다. 그날 그는 꼬깃꼬깃 접힌 지폐 9장, 담배를 끊으며 모인 비상금 9만원을 "가진 게 전부"라며,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구독료로 냈다. 초등학교 4학년, 6학년을 둔 아빠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공평한 세상서 살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 아빠의 이름으로 신장섭(51)씨는 민중총궐기대회 1차 집회시위현장서 10만인클럽 회원에 가입했다. 경찰의 물대포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 날이고 농민 백남기 어르신이 물대포 직사에 맞아 쓰러져 혼수상태가 된 날이다. 그날 그는 꼬깃꼬깃 접힌 지폐 9장, 담배를 끊으며 모인 비상금 9만원을 "가진 게 전부"라며,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구독료로 냈다. 초등학교 4학년, 6학년을 둔 아빠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공평한 세상서 살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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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래 지갑 안에 있었을까. 지폐의 주름이 선명했다. 손으로 한 장씩 세어봤다. 하나, 둘, 셋...아홉. 신장섭(51)씨는 1차 민중총궐기 현장에서 10만인클럽 회원에 가입했다. 그 때 구급차 소리가 광화문 광장 하늘에 울려 퍼졌다. 농민 백남기 어르신이 경찰의 물대포 직사에 맞아 혼수 상태가 된 날이다.  

그날은 만 원권 9장의 사연을 듣지 못했다. 시끄러운 거리였기에. 그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신씨가 사는 경기도 안양으로 기자가 찾아갔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을 학원에 바래다주고 왔다는 그와 커피를 마셨다. 기자가 먼저 입을 뗐다.

중년의 남자가 홀로 집회현장 가는 까닭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경찰 차벽앞에서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강한 수압으로 발사한 경찰 물대포를 맞은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구조하려하자 경찰은 부상자와 구조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경찰 차벽앞에서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강한 수압으로 발사한 경찰 물대포를 맞은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구조하려하자 경찰은 부상자와 구조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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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무슨 일로 갔나?
"국정화 반대 시위가 있다고 해서 갔다. 직장에서 퇴근한 뒤 안양에서 지하철을 타고 혼자서 갔다. 소속 단체는 없다. 그냥 일반 시민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집회가 있는 날이면, 혼자서 가곤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엔 더더욱 그렇다.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힘이 될 것 같아서다. 결혼 전 애기 엄마와 데이트할 때도 미선이 효순이 추모촛불 시위 현장을 찾았다."

- 왜, 홀로 시위현장에 가나?
"부채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충남 천안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광주에 가고 싶었다. 당시 신문 배달을 해서 다른 학생들과 달리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왜곡된 이야기만 실었다. <동아일보>를 봐야 광주 이야기를 좀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군대와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국민을 살해했다. 피가 끓었다. 싸우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광주로 갈 방법을 몰랐고 차비도 없었다. 아니 무서웠다. 비겁했던 내 모습에 실망했다. 그 이후로 혼자라도 시위현장에 간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갓 제대한 후인데, 집회에 갔다."

누구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숨기고 싶은 비밀 말이다. 아픈 기억을 꺼내서일까.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에게 자기 밑바닥을 보이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 힘이 없다.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런 그에게 "짠! 한번 할까요"하고 커피잔을 내밀었다.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그가 겸연쩍게 웃는다. 때론, 말보다 행동이 위로가 된다.

<오마이뉴스> 후원은 나를 위한 투자

6.10 항쟁 기념일인 지난 2008년 6월 10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일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며 촛불 행진을 하고 있다.
 6.10 항쟁 기념일인 지난 2008년 6월 10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일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며 촛불 행진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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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 <오마이뉴스>를 알았나?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추모촛불 시위 때부터다. 사실, 컴퓨터를 잘 모른다. 종이신문을 주로 본다. <오마이뉴스>를 처음 안 것도 인터넷이 아니라 종이신문이었다. 가판대서 <오마이뉴스> 주간지를 판매했다. 출퇴근길에 사봤다. 언제부터인가 판매를 안 해서 궁금했는데 나중에야 인터넷신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는 <오마이뉴스> 생중계를 지켜보며, 거의 모든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6개월 가량 주말이면 현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 <오마이뉴스>에 자발적 구독료를 내는 10만인클럽에 후원을 결심한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언론지형이 매우 안 좋다.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대다. 회사 동료가 TV조선을 보고 세월호 유가족을 욕하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안산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말을 할 수 있는지. 진실을 말하는 언론, 진보언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오마이뉴스>에 후원하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한 투자다. 힘든 때지만 어려워도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 기울어진 언론지형에서 <오마이뉴스>가 해야 할 일은?
"사실을 넘어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역사공부를 하다보면, 하나의 사실이 있고 이를 해석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좌파적 견해가 뚜렷해야 한다. 박노자 오슬로대학교수처럼 말이다. <조선일보>를 봐라. 어제했던 이야기와 오늘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모든 것을 극우적으로 해석한다. 물론, <조선일보>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좌파적 견해로 사실을 해석할 필요가 있고 그런 기사가 많았으면 좋겠다."

기계적 중립만 내세운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향한 따끔한 충고다. 기계적 중립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상 극우적 시각만을 세뇌시키는 수구 언론에 대한 비판이다. 찬반의견을 싣는 게 중립적 보도가 아니란 거다. 미국 연방대법관을 재직한 벤저민 카프도조는 '중립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을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재임 중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

기레기를 뛰어넘어 '언레기(언론+쓰레기)'라 비판받는 시대이기에 그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인 게 부끄러워졌다.

담배 끊어 모은 비상금, 아이들 공평한 세상서 살길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세종로네거리 부근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생방송중이던 <오마이뉴스> 방송팀 박정호 기자를 향해 경찰 물대포가 캡사이신 섞인 물대포를 얼굴을 향해 발사하고 있다. 박정호 기자는 극심한 호흡곤란과 고통을 받았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 생중계 도중 물대포 얼굴에 맞은 <오마이뉴스> 기자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세종로네거리 부근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생방송중이던 <오마이뉴스> 방송팀 박정호 기자를 향해 경찰 물대포가 캡사이신 섞인 물대포를 얼굴을 향해 발사하고 있다. 박정호 기자는 극심한 호흡곤란과 고통을 받았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 RT방송 화면 캡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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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직한 기자, 당당한 언론이 필요한 이유는?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아이들이 공평한 사회에서 살아갔으면 한다. 돈 없다고 교육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다면 신분제 사회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다. 선진국이라 말하지만 유럽과 비교하면, 부러우면서 한편으론 부끄럽다. 이 땅에 수천만명이 노동자인데도 그들 스스로 '노동자'란 단어를 꺼려 한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정부와 언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더는 안 된다. 내 아이들에게는 이런 나라, 그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려면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인터뷰가 끝난 뒤, 안양역 앞에서 그와 헤어지며 마지막으로 꼬깃꼬깃 접었던 지폐의 정체를 물었다. 

"사실, 그 돈(자발적 구독료)은 담배를 끊으면서 조금씩 모은 비상금이다. 한 달씩 모아 책 값으로 쓰는데, 그날 경찰이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는 모습을 보고 그냥 갈 수 없었다. 현장을 지키는 언론을 돕고 싶었다. 배가 고파서 맥주 한 캔으로 저녁을 때우고 9만 원이 남았다. 앞으로도 진실을 보도해 달라."

그를 만난 11월 17일, <오마이뉴스> 톱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단독] 경찰 물대포, 백씨의 머리를 노렸다'
'TV조선의 막말, "시위대 두둘겨 패야"'
'방송기자 따라다닌 물대포, 경찰청장의 사과 요구합니다'
'정말 백남기씨 맞냐? 의문 풀어줄 또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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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만인보, #신장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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