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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7년 '중2병'을 지독히 앓았던 나는 1988년 부산시 범천동 한 지하상가 안에 불시착했다. 10살 때 헤어진 엄마와 함께 살고 싶어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비행청소년을 자청해 집안 어른들의 눈 밖에 난 후 '오냐, 그래 그렇게 소원이면 니 에미 옆에 가서 한번 살아봐라.'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려주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진 않았지만, 난생 처음 걸어보는 길을 지나 엄마 가까이 도착했다. 7년여 만에 만난 엄마는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내 엄마라고 단박에 달려가 안기지는 않았지만, 엄마를 다시 마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찰나 같은 순간이 지난 뒤 누군가 엄마 옆자리에 와 서 있는 걸 보기 전까지는).

"엄마, 일 도와주는 아저씨다. 이 식당만 자리 잡으면 아저씨 일 하러 갈 끼다."

믿고 싶었다기보다는 지난 시간 내가 엄마만을 갈구하며 살았듯 엄마도 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차선책이란 없었다. 나에게 있어 엄마가 유일무이한 존재이듯 엄마에게 있어 나 또한 그런 존재다… 라는 게 나의 신념이었으므로.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은 메뉴가 수십 가지는 족히 됐다. 김밥, 라면, 당면의 분식에서 시작하여 김치찌개, 된장찌개의 정식과 두루치기, 쇠고기 전골 등의 술안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메뉴들을 엄마 혼자 만들어내고 있었다. 홀서빙과 배달, 호객행위를 전담하는 이모 두 사람 그리고 엄마의 아저씨 이렇게 네 사람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식당에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988년 내가 살기 시작한 범천동 지하상가 주변은 너무나 지저분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리는 'W의 비극' '돌아이'가 동시 상영하는, 온갖 추접스러운 일들이 난무하는 보림극장이 있었다. 우리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을 포함 범천동 지하상가 내 수많은 식당가의 생계를 쥐락펴락하는 삼화고무라는 큰 신발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은 1일 2교대를 하는데 저녁 교대시간이 되면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나보다 겨우 몇 살위인 그들을 바라보는 건 그 시절 내겐 신세계였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단골식당이 있었고, 본인 이름 석 자가 적힌 외상장부들이 있었고, 삼화고무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받기 위해 공장 정문 앞을 지키는 인근 점포의 상인들이 일하는 사람들의 월급 봉투를 삽시간에 홀쭉하게 만들곤 했다. 한 달을 벌어 지난 한 달 외상값을 갚고, 시골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또다시 한 달 외상인생을 살고, 다음 달이면 또다시 홀쭉한 월급봉투를 손에 쥐고 허전해 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1988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원래 있던 곳에서 쫒겨난 덕분에 매일아침 40분 이상 터지기 직전인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 등학교를 했다. 범천동 보림극장 주변 구석구석엔 바바리맨들도 있었다(물론 지금 현재 그들은 바바리조차 걸치고 있지 못하지만). 골목길 어둠 속에서, 인적 없는 육교 위에서 길을 걷는 꽃다운 그녀들을 위협했다.

형태는 달랐지만 이런 범죄자들은 만원버스 안에도 있었다. 매일 왕복 40분 이상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했던 나는 틈만 나면 발생하는 이런 행위 때문에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마음 편히 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했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엄마는 나를 보고 웃어줬다. 학교를 마치고 파김치가 돼 지하상가 식당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언제나 나를 반겨줬다.

"왔나. 배고프제, 뭐 주꼬?" 속성으로 라면을 끓여주기도 하고, 참기름 반지르르한 김밥을 썰어주기도 하고, 맛있게 매운 쫄면을 비벼주기도 하면서 나를 한껏 우쭐하게 해줬다. 내게도 이런 엄마가 있다. 엄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음식을 먹은 뒤 나는 독서실로 가서 엄마가 식당일을 마칠 때까지 공부를 했다.

그때 당시 엄마는 반지하 셋방보다 더 열악한 '하꼬방'과 같은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어른 셋이 누우면 방이 꽉 차는 곳에 장롱하나 없이, 곤로 하나 없이 살고 있었다. 내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느라 갖은 패악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실상 엄마는 나를 데리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꼬방에서 엄마는 아저씨와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가 툭 하고 떨어졌으니 실제상황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 금슬 좋은 재혼 부부 사이는 나로 인해 자주 금이 가곤 했다.

평일에는 삼화고무 일꾼들에게 외상밥과 외상술을 팔고, 일요일이면 인근 결혼식장에서 예식을 치르는 단체손님을 받아 갈비탕과 비빔밥을 팔았다. 봄·가을철에는 나들이 가는 단체 관광객들에게 김밥 도시락을 팔기 위해 새벽 2~3시까지 김밥을 말기도 했다. "아저씨는 곧 자기 일 보러 간다"는 엄마의 빈말을 믿으면서 하루는 무당 이모네 집에서 잠을 자고, 하루는 계란 이모네 집에서 방을 얻어 잠을 자면서 엄마의 하꼬방에서 아저씨가 철수하길 기다렸다.

무당 이모는 엄마 식당에서 홀서빙과 배달을 전담하는 이모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해서 붙임성이 아주 좋았다.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딸 아이가 다섯 살때 사고로 죽고 그 딸의 혼이 이모에게 실려 무당이 됐다고 한다. 무당 이모네엔 법당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점을 봐주지는 않았다.

대신 이모는 아침저녁 기도를 하고 엄마 식당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번다. 죽은 딸이 생각나는지 유난히 나를 좋아했다. 탤런트 박주아를 닮아 귀엽기도 한 이모는 저녁 엄마 식당 일을 마치고 나이트클럽에 가 신나게 노는 걸 좋아했는데, 나이트클럽에 가지 않는 날이면 나를 데려다 이모네 집에서 재워주기도 했다.

이모네 집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장군복·선녀복이 쌓아올려진, 과일이 차려진 법당 아래서 잠을 잤다. 그때 내 처지는 죽은 령을 무서워 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고 불편했으므로 이모가 나이트클럽을 가지 않기를, '오늘 이모집에 가서 자자'라고 날 불러주길 기다렸다.

계란 이모는 엄마 식당에 계란을 공급해 주는 이모다. 1988년 당시 스물 몇 살짜리 딸이 있었고,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었고, 남편이 있었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엄마는 계란 이모를 언니라고 불렀다.

범천지하상가 내에서 누구보다 엄마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누구보다 엄마의 어제오늘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계신 분이었다. 연세에 비해 흰머리가 많아 한갓진 날이면 이모의 흰머리를 내가 뽑아드리곤 하였다.

계란 이모의 딸, 내게는 언니가 되는 이의 방을 빌려 잠을 자곤 하였다. 닭벼슬처럼 앞머리를 뻣뻣하게 올려 스프레이로 고정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은 언니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는 날 저녁,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영국에서 전해져 온 행운의 편지를 편지지에 열심히 옮겨 적었다. 이른 새벽 범천동 골목골목 낯선 이의 집 대문 아래 행운의 편지를 집어넣어 준 이는 계란 이모의 아들이었다.

엄마를 기다리게 해주는 원동력, 무당 이모와 계란 이모 따뜻함 사이에서 열심히 식당일을 도와가며 1988년 겨울을 맞았다. 무심히 엄마와 아저씨가 말다툼 소리를 듣게 됐다.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내 학비를 두고 엄마와 아저씨는 다투고 계셨다. 엄마의 거짓말이 들려왔다. 아이 학비는 아이 아버지 회사에서 나온다고, 처음부터 그러기로 하고 데리고 온 것이라고….

아저씨는 '처음 식당을 인수할 때 얻은 빚도 아직 정리를 못했고, 하꼬방 신세도 면치 못했는데, 아이 고등학교 학비까지 감당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보란 듯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학비는 나의 아버지 회사에서 학자금으로 별도의 돈이 나온다고. 의류회사 운전기사였던 아버지가 회사에서 받아올 수 있는 자녀학자금제도 같은 건 없었다.

어쩐지, 그래서 그동안 엄마가 그랬던 것이구나.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엄마는 내게 용돈치고는 과하다 싶을 만큼의 돈을 틈틈이 주셨다. 처음 돈을 주던 때에는 은행에 가서 통장을 하나 만들어 오라고 하셨고, 나는 학교 밑 은행에서 보통예금 통장을 만들어 왔었다.

삼화고무 월급날, 수금이 됐거나 일요일 단체 잔치 손님을 치른 날 저녁이면 영업시간이 끝난 뒤 식당 정리정돈을 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돈을 주곤 하셨다. 한 달 치 독서실비를 주는 날에도 엄마는 독서실 비용보다 더 얹은 금액을 내게 주곤 하셨다. 남는 돈은 통장에 넣어두라고 말이다.

엄마가 내게 돈을 줄 때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엄마를 따라다니던 아저씨도 없었고, 무당 이모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엄마는 내게 불쑥 돈을 건네주곤 하였다. 그렇게 지난 1년간 내가 받아 차곡차곡 저금해놓은 돈들이, 이듬해 내가 들어갈 고등학교 학비였고, 자율적으로 입게 될지 모르는 교복비였고, 운동화 살 돈이었다.

치사하고 구차했다. 누구보다 빨리 식당 문을 열고, 누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가 피곤한 육신을 뉘여 그저 잠만 잔 채로 다음날이면 또다시 누구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하면서 벌어놓은 엄마의 돈인데, 엄마는 지금 당당하지 못하게 거짓말하고 있는 게다. 있지도 않은 학자금이 있다고 하면서.

학교 따위는 가지 않아도 좋았다. 처음부터 학교를 다니려고 엄마에게 온 게 아니었다. 엄마랑 같이 알콩달콩 살려고 온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자 마음을 먹었다. 나도 삼화고무를 다니는, 꽃보다 예쁜 언니들처럼 일요일 아침이면 좋은 냄새 풀풀 풍기며 목욕가방을 들고선 만둣국을 먹으러 가야겠다 결심했다.

일요일 아침, 이제 갓 목욕을 마친 그녀들이 식당을 들어서면 형언할 수 없는 향내들이 진동한다. 처음에는 무조건 세숫비누를 많이 문지르면 좋은 냄새가 널리 퍼지는 줄 알고, 목욕탕에 가서 내내 비누만 문질러 보기도 했다. 실패였다.

향기 좋은 목욕비누라는 게 따로 있는 줄을 몰랐다. 머리 감을 때도 샴푸만 있으면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질 줄 알고, 비누는 샴푸처럼, 샴푸는 린스처럼 쓰던 내게 일요일 아침 그녀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교 때려치우고 삼화고무에 취직해서 나도 목욕비누를 내 돈 주고 사 쓰면서 멋지게 살아갈 테다. 하꼬방 생활 오늘부로 땡. 엄마와 아저씨가 싸우는 소리를 뒤로한 채 가출했다.

그런데 나는 하루 만에 잡혔다. 무당 이모네 법당 아래 숨어 있다가 엄마와 이모에 의해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다. 내일이면 삼화고무 작업반장 아저씨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식당 외상장부에서 이름 석자도 똑똑하게 외워뒀는데,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엄마의 하꼬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1989년 2월 범천동 지하식당가에서 나는 자진철수했다. 내 나름 오랜 기다림을 접어버린 것이다. 엄마와 아저씨가 부부 사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사실을 간과하여 매번 헛된희망을 놓지 못했던 지난 1년간의 미련을 접었다. 고등학교 학비를 가지고 눈치는 보지 않아도 좋을 피붙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는 게 힘든 엄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일이기도 했따. 1988년 1년 동안 모인 돈이 찍힌 통장과 평소 손님 음식 해대느라 정작 끼니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해 속쓰림을 달고 사는 엄마의 상비약 '겔포스' 통째로 두고 돌아왔다.

1988년 나의 한해를 책임져준 무당 이모와 계란 이모의 따뜻함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았다. 1988년 우리는 많이 가난했고, 나는 너무나 철이 없었다. 엄마 말고는 아무런 관심도 알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게 엄마를 힘들게 했다. 1989년 엄마를 떠나오면서 기도했다. 이제부터라도 엄마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엄마가 건강하기를…. 나의 1988은 이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응답하라 1988> 공모 응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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