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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들이 하늘을 날으는 것은 /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날으는 것은 /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축복'이란 시 한 구절이다. 장시간 버스나 기차를 탈 땐 시가 적힌 카드를 한두 장 들고 탄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계곡과 들판, 숲과 강을 구경하면서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입속으로 암송하는 재미는 각별하다. 옆 사람에게 불편주지 않으면서 차타는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다.

이번 여행에는 '축복(피천득)'과 '봄길(정호승)'이란 시 카드를 동반했다. "나무가 강가에 서있는 것은 /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있는 것은 /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 나무들이 나란히 서있는 강가도 스쳐지나간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으는 기쁨', 사람이 되어 차를 타고 이렇게 날아가니 새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된다. 이게 바로 여행을 하는 즐거움이구나!

한 해가 저무는 연말이다.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밀려든다.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끼어든다. 왜 여행인가? 사람들은 "지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파"라고 말한다. 여행칼럼니스트 황희연은 '잠적하고픈 욕망'을 얘기한다. '수 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 마감임박, 지옥철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잠적, 실종하고픈 욕망'을 이야기한다. 어떤 젊은이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세계여행길에 나선다. 이 젊은이는 일상에 지쳐 엄청난 일을 결행한 것이 아니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 넘쳐 벌인 일이다.

일상에서 멀리 오래 떠나는 여행은 돈과 시간을 요구한다. 남다른 열정도 필요하다. 돈, 시간, 열정, 우선순위가 어찌 될까? 그러나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인가, 소시민에겐 가깝고 짧은 당일치기도 여행이다. 열정만 있어도 된다. 두어 시간 달리던 버스가 바다 위를 날아간다. 몇 년 전 만해도 페리를 타야 건너던 섬 고하도가 목적지이다. 남해바다 푸른 하늘을 목포대교가 하얗게 선을 그으며 뚫고 지나간다. 고하도주차장에 내린다.

버스길이 끝나면 걷는 길이다. '용오름 둘레숲길'의 시작점이다. 종점인 '용머리'까지 2.8km, 그러니까 우리가 배낭을 메고 나선 시작점은 용꼬리인 셈이다. '날개를 펴고 바다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등허리를 타고 걷는 길',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용 등허리, 오솔길은 단장되지 않은 흙길 그대로 수북한 소나무 낙엽이 푹신푹신하다. 밟는 대로 짙은 솔향기가 피어오른다.

길 오른쪽은 내리막 절벽이다. 밑으로 짙푸른 바닷물이 철석거리고 띠 같은 바다 건너 유달산과 목포해양대가 그림처럼 따라온다. 두어 차례 오름과 내림을 거치자 용머리, 용오름 길의 끝이다. 더 앞으로 나아갈 데가 없다. 우뚝 선 목포대교의 하연 주탑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용머리 바위에는 오래 머물 수 없다. 댓 명이 앉을 만큼 넓지도 않다. 용머리에 잠깐 앉아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

등허리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이번에는 유달산이 왼쪽에서 따라온다. 등허리 중간쯤 전망대 벤치에 앉자, 동행하던 젊은이들이 배낭에서 막걸리를 꺼내놓는다. 바다건너 유달산을 바라보며 무등산막걸리를 마신다. 빈속이라 두 잔에 알딸딸해진다. "행복하세요!" 지나치는 인사도 달리 들린다. 왕복 5.6km, 2시간 반 동안 시원한 바닷바람과 솔향기 듬뿍 마셨다. 솔향기 가득한 바닷바람, 이게 바로 '승천하는 용의 기운'이겠지!

귀가도 버스로 두 시간 길이다. 황혼녘을 달리는 귀가버스에선 '축복'보다 '봄길' 시구가 더 마음에 닿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 ".

이제 겨울이 깊어지면 봄이 올 것이다. 겨울길은 봄길로 이어진다. 최고의 여행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여행처럼 만든다. 겨울길도 봄길로 만든다. 가슴 가득 '용의 기운'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봄길'이다.


태그:#여행, #고하도, #봄길, #축복,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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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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