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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행복하니?" 거울 앞에서 물었다. 이 질문의 답은 '사표'였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 기자 말
샹그릴라 ⓒ 김동우
[이야기 1] 샹그릴라 햇빛 아래 엉덩이를 내밀다

"버스 안에서 신발을 벗지 마세요."

호도협 트레킹을 마치고 샹그릴라행 버스에 오르자 버스기사는 영어로 된 푯말을 꺼낸다. 등산화가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순토시계의 고도계는 멈출 줄 모르고 치솟았다. 파란 하늘 위를 수놓고 있는 뭉게구름이 쉽게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야크들은 초록 들판 위에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샹그릴라였다.

샹그릴라의 유일한 한인 게스트하우스 '자희랑'에 도착했다. '자희랑'은 자유(FREE), 희망(HOPE), 사랑(LOVE)의 줄임말이다. 태준이 형(자희랑 사장님)의 형수(흐진시우)가 수줍은 미소로 날 반겨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라면+김치+공기밥을 주문했다. 면발을 흡입하며 "사장님 어디 가셨나요?"라고 물으니 "아직 취침 중"이란 아주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은 오후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라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니 태준이 형이 눈을 비비며 인사를 건넨다. 어제 과음을 했는데 고산에서는 술이 잘 깨지 않는다고 했다.

형수는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봤다. 형수는 나시족이다. 모계사회 전통을 간직한 나시족은 여자들이 집안일을 거의 다 한다고 알려졌다. 오후 6시에 기상하는 남편에게 별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모습은 전형적인 모계사회의 모습처럼 보였다.

"형님, 장가 한번 잘 가셨네요!"
"모계사회는 무슨, 그거 다 100년 전 일이고 한국 남자들은 왜 이렇게 빈둥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형수가 정색하며 말을 받았다.
샹그릴라 트레킹 ⓒ 김동우
자희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난 태준이 형의 생활습관을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고소 적응을 핑계로 빈둥빈둥 자고 먹고, 먹고 자며 하루를 보냈다.

"한량이 한 명 더 있네, 남편보다 더한 사람은 처음 보네, 쯧쯧."

형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동우야! 이건 와이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인데..."

실제로 이곳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숨이 차올랐다. 해발 3000m가 넘는 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형은 티베트 마을 투어에 참여해 몸 상태를 테스트해보라고 했다. 초원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계획으로 투어 전날 형과 함께 버너를 사러 나갔다. 이건 내 전공이었다. 장비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태준이 형이 날 의지했다. 장비를 사서 돌아와 태준이 형과 맥주를 한 잔했다. 두당 2~3병쯤 마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날 마신 꽁술로 인해 형수의 눈치까지 봐야 했다. 엄살을 떨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한 번 흐트러진 컨디션은 살아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고산에서는 술이 깨지 않는다는 말이 실언이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배낭에 2리터짜리 생수병 3개를 쑤셔 넣고 숙소를 나섰다. 1일 포터를 하는 대신 투어비를 면제받기로 했다.
샹그릴라 ⓒ 김동우
5명이 함께하는 투어였다. 그중 내 상태가 가장 좋지 못했다. 걷기만 하면 머릿속이 쿵쿵 울렸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초원의 야생화들이 놓쳐선 안 될 장관을 만들고 있었지만 깨질 것 같은 두통에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잃어버린 지평선 투어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장관은 바로 야생화들이다. 티베트 초원 위를 오색의 야생화가 뒤덮고 있는 광경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현지인 마을에 들어가 이들의 삶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난 어서 빨리 이 길이 끝났으면 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구토의 고비를 몇 번 넘기고 점심 장소로 점찍어둔 움막에 도착했다. 어제 산 버너와 가스를 꺼냈다. 그리고 가져온 물을 코펠에 붓고 라면 끓일 준비를 마쳤다. 태준이 형이 버너와 가스를 체결하고 불을 붙였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왜요?"
"불이 안 붙어!"

형과 내 눈빛이 마주치며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태준이 형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먹을 거라고는 라면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이 초원에서 물을 끓이지 못한다면 앞으로 3시간은 더 공복 상태로 걸어야 하는데 그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버너가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형편없지는 않았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이었지만 버너가 작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냄비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버너와 가스통을 살폈다. 이리저리 만지작거려보고 가스통을 뺐다 다시 체결도 해보았다. 그리고 재차 불을 붙여 보았다. '슈~우~앙~' 버너가 불을 뿜으며 달아올랐다. 잿빛이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피어올랐다. 꽁술에 꽁트레킹을 와서 진상을 부리고 있는 나였다. 그나마 밥값은 한 것 같아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니 이번에는 슬슬 아랫배가 아파왔다. 어제 마신 고산주의 여파가 지금에서야 장을 헤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을 지그시 바라봤다. 전부가 화장실이거나 아예 숨을 곳이 없는 곳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산이라면 은폐엄폐가 되지만 난감한 상황이었다.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딱히 거기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나무를 향해 걷다 보니 다행히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외부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 사이 내 괄약근의 힘은 점점 빠져가고 있었다. 뜨거운 샹그릴라의 햇빛 아래 엉덩이를 내밀었다. 6시간의 초원 트레킹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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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해발고도가 3459m나 되는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내 마음속의 해와 달'이란 뜻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지명으로 유명하다. 이 소설에서 샹그릴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로 묘사돼 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발 빠르게 중뎬(中甸)이 샹그릴라라고 공식 발표해 버렸다. 그 뒤부터 중뎬은 샹그릴라로 불리게 됐다. 사실 여기가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배경인지는 확실치 않다. 누구는 파키스탄 훈자지역을 꼽기도 한다.

샹그릴라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추앙하는 매리설산에 다녀올 수 있다. 이 산은 6000m가 넘는 13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시간과 체력이 있는 트레커라면 매리설산 외선코라에 도전하는 것도 멋진 일이 될 거다.

외선코라는 매리설산 외곽을 한 바퀴 도는 순례길을 말한다. 코라 순례는 티베트인들이 산의 외곽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기원을 드리는 일종의 종교 행위다. 이 코라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와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해발 4000m급 고개를 밥 먹듯 넘어야 하고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가이드가 있어야 하고, 짐을 나를 말도 필요하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이 코스를 10박 11일 일정으로 끝마친다고 한다. 외선코라는 천국으로 가는 꿈의 길로 알려져 있지만, 이 코스가 힘들다면 단기 코스로 내선코라를 선택할 수도 있다.
샹그릴라 ⓒ 김동우
[이야기 2] 중국 오프로드의 아찔한 경험

샹그릴라에서 다음 목적지인 야딩으로 길을 나섰다. 야딩은 중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곳으로, 수려한 풍광으로 트레커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야딩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따오청에서 1박을 해야 했다. 따오청은 티베트어로 '넓은 산골짜기'란 뜻이다.

샹그릴라에서 따오청까지는 버스로 10시간을 가야 하는 먼길이었다. 해발 4000m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험난한 여정이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막상 버스가 출발하자 걱정이 앞섰다. 버스는 포장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물론 우리나라의 버스 승차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3시간 정도 달린 버스는 산간마을의 한 식당 앞에 정차했다. 승객들을 쫓아 화장실로 향했다.

"으악!"

'최악'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코끝을 찔러대는 악취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문 없는 뒷간에 태연하게 앉아 볼일을 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제대로 조준할 겨를도 없이 숨을 꾹 참고 볼일을 마친 뒤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프~아~핫.' 참았던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내게 한 중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앞으로 식사할 곳이 없다며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밥알을 넘기기 위해서는 방금 본 화면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는 게 급선무였다. 앞으로 7시간을 좁은 버스 안에서 버텨야 했다.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최대한 가벼운 음식인 '미판(밥)'에 감자볶음을 주문했다.
야딩가는 길 ⓒ 김동우
하지만 밥알은 목구멍에 걸리기 일쑤였다. 오전 11시쯤 버스가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 기사는 바뀌어 있었다. 장거리 여정인 탓에 2명이 교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버스는 여기서부터 비포장도로를 3시간 넘게 달렸다. 중국여행에서 처음 경험하는 오프로드였다. 버스가 마치 돌 위를 통통 튕겨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꼬리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공포의 텀블링은 계속됐다. 버스의 흔들림에 목뼈가 신기의 춤사위를 펼쳐냈다.

버스가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들었다. 급커브에서조차 속도를 줄이는 법이 없었다. 반대편에서 차가 나타나면 그대로 정면충돌하는 아찔한 상황이 수시로 연출됐지만 가볍게 경적을 울리는 게 다였다. 새삼 쿤밍~따리~리장으로 이어지는 버스여행이 떠올랐다. 당시엔 그게 최고로 힘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고정된 자세로 지속적인 충격이 가해지자 고통은 배가됐다. 그나마 대설산의 아름다움이 위안이었다. 생경한 풍광에 정신을 놓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찍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카메라의 '흔들림 방지기능'은 무용지물이었다.

버스 기사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3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를 달린 끝에 버스는 다시 포장길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사정이 나아진 건 없었다. 군데군데 파인 도로는 포장길이란 말을 무색케 했다. 차는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순토시계의 고도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해발 4000m가 넘는 곳에 휴게소 같지 않은 휴게소가 있었다. 지친 승객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사이 버스 기사는 차량 내부 물탱크를 채우고 과열된 타이어에 물을 뿌렸다.
야딩가는 길 ⓒ 김동우
야딩가는 길 ⓒ 김동우
냉각수로 부동액을 쓰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된 냉각장치도 없는 차가 이 험한 길을 달려오다니. 운전병으로 군생활을 마친 나에게 버스 기사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기사 아저씨 찌아요~' 그렇게 버스는 4000m 이상의 고산을 굽이굽이 돌고 넘어 10시간 30분 만에 따오청에 도착했다.

온몸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고, 목 근육은 어찌나 딱딱하게 굳었는지 깁스 환자처럼 고개를 못 돌릴 지경이었다. 머릿속은 살인적인 비포장도로의 추억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버스 트렁크가 열렸다. 배낭은 머릿속만큼이나 하얀 순백으로 탈색돼 있었다.

숙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힘겨웠던 여정이 하나씩 생생하게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육체의 고통이 곧 정신적 고통은 아니다. 내일이면 고대하던 야딩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금세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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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자유여행으로 다닌다면 버스나 기차를 꼭 타게 된다. 이 중 버스여행은 이만저만한 고행이 아니다. 버스 자체가 낡은 것은 물론이고, 도심을 벗어나면 길도 대개 비포장이다. 중국에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장거리 노선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식수를 충분히 챙기고, 뱃속을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게 좋다. 한국처럼 1~2시간마다 휴게소에 정차하는 안락한 여행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중국에서의 버스 여행은 체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야기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따시델레'

티엔아이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곧장 롱롱빠로 향했다. 롱롱빠는 야딩 트레킹의 관문 같은 곳이다. 1일차 야딩 트레킹은 롱롱빠에서 진주해(3960m)까지로 잡았다. 본격적인 트레킹은 고소적응을 마친 다음날로 정했다.

진주해가 야딩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4000m에 육박하는 높이다. 이번 세계 일주에서 목표로 삼은 곳을 둘러볼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따오청 ⓒ 김동우
야딩 ⓒ 김동우
진주해를 보려면 일단 충고사까지 가야 했다. 롱롱빠에서 충고사까지는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길에 들어서자 소나무 가지에 송라(소나무겨우살이)가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다. 누구는 원시림 같다고 했지만 내겐 공포영화에 나오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야간 트레킹이었다면 줄행랑을 쳤을지 모른다.

송라 지대가 끝나자 길옆으로 '마니퇴'가 보였다. '옴마니반메훔'과 같은 진언을 조각한 돌을 마니석이라 하고 그 무더기를 마니퇴라고 부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작은 돌을 주워 심호흡을크게 한 번 했다. 그리곤 합장한 뒤 주운 돌을 마니퇴 한쪽에 살며시 올렸다. '무사히 이 여행을 마치길...' 참고로 난 가톨릭신자다.

걸음을 옮길수록 호흡이 가빠왔다. 숨을 쌕쌕 몰아쉬며 걷다 보니 어느 틈에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왼쪽으로 선내일 설산(6032m)이 시야에 들어왔다. 믿기지 않는 비경이었다. 충고사 옆 쉼터에서 바라본 풍경은 알프스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아!" 입이 떡 벌어졌다.

흔히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한다. 그런데 내겐 고산의 날씨가 딱 여자 마음 같았다. 선내일 설산은 부끄러운 듯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번에 허락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구름이 걷히길 기다렸지만,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야딩 ⓒ 김동우
충고사로 방향을 잡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잘 닦인 길을 살방살방 걸으면 됐다. 길은 선내일 설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산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충고사에서 진주해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잠시 뒤 비취빛 진주해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세계 일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가 연상되는 황홀한 색이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진주해를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고 있었다. 나도 꼭 한 번 찍어보고 싶던 사진이었다.

"하나, 둘, 셋! 점프!" 단 한 번의 점프는 내 폐 기능을 한계치에 도달하게 했다. "헉~ 헉~" 심장이 미친 듯 펌프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호수를 바라봤다.
야딩 ⓒ 김동우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어제 다녀왔던 길을 다시 걸어 쉼터에 도착했다. 전동차를 타고 낙용목장(4100m)으로 향했다. 2일차 일정은 낙용목장에서 우유해(4500m)와 오색해(4600m)를 왕복하는 코스였다. 5~6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낙용목장에 도착하자 양만용산 등의 5000m급 고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관광객들 사이로 티베트 순례자들이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어 돌릴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든 통. 마니차는 티베트인들의 신앙도구로, 한 번 돌릴 때마다 경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오체투지와 함께 대표 수행방식 중 하나다.)를 돌리고 마니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절을 시작했다.
야딩 ⓒ 김동우
야딩의 풍경만큼이나 관심을 끄는 모습이었다. 순례자들은, 종교를 떠나 충분히 존경의 대상이었다. 절을 마친 순례자들을 좇아 길을 나섰다. 낙용목장부터 펼쳐지는 푸른 초원은 내가 세계 일주에서 보고자 하는 걸 그대로 응축해 놓은 듯했다. 샹그릴라에서 매리설산을 포기하고 야딩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 사이 순례자들은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빨랐고 난 느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내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갈수록 무거워졌다. 순례자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장족 아저씨 한 명이 성큼성큼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따시델레!"

티베트인들은 '따시델레(행운, 축복이 있기를 기원한다는 티벳의 인사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는 생면부지의 날 위해 고맙게도 행운을 기원해 주고 갔다. 나도 그의 앞길에 행복을 빌어주었다. 평지가 끝나고 오르막이 시작됐다. 호도협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몰이꾼들의 무대가 펼쳐졌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여행자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 위에서 날 내려다 봤다. 당장에라도 마부를 세워 흥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트레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쓴웃음으로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걸로 자존심의 마지노선을 꾸역꾸역 지켜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색 타르초(티베트 불교 경전을 적은 색색깔 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바람에 일렁이는 타르초에 소박한 소망을 담아 야딩의 하늘로 날려 보냈다. 먼발치서 그들은 합장을 한 채 절을 하고 있었다. 작은 봇짐 하나, 형편없는 신발 한 켤레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값비싼 등산장비가 이 순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야딩 ⓒ 김동우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난 숨을 헐떡일 뿐 그들을 따라 나서지 못했다. 남루한 신발만도 못한 처지였다.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었다. 발을 땅에 질질 끄는 수준이었다. 머릿속은 멍했고, 고통스러웠다. 고산증이었다. 능선을 오르자 내 기대와는 달리 길은 또 다른 능선으로 이어졌다.

'휴~' 긴 한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그러다 도저히 못 가겠다고 생각될 때쯤 불쑥 우유해 위로 햇빛이 부서지며 은빛 옥구슬을 만들어내는 장관을 만났다. 눈이 부셨다. 얼마 못 가 얄미운 구름이 해를 가렸다. 꼭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검게 그을린 티베트 순례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따시델레!"
야딩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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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를 했지만 이 정도 풍경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얀 설산이 고원을 뒤덮고 있고, 그 아래로 야크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낙원 같은 모습이 야딩의 첫인상이었다. 야딩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태곳적 풍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야딩은 '신선이 사는 땅'으로 불린다. 1928년 3월, 영국인 탐험가 루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곳은, 그 압도적인 풍경으로 '최후의 샹그릴라'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야딩 주위에는 6000m급 산이 하나, 5000m급 산이 10개, 4500m급 산이 32개 있다.

특히 선내일 설산(6,032m), 하랑다길 설산(5,958m), 양만용산(5,958m)은 티베트인들이 각각 관세음보살, 금강보살, 문수보살로 섬기는 신성한 곳이다. 이 세 설산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 모양 혹은 品 자 모양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티베트 불교에서는 '세 주인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산'이란 뜻으로 '일송공포(日松貢布)'라고 부른단다. 야딩은 세계 불교 24성지 중 하나다.

단, 고소적응을 해야 야딩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태그:#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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