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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이면 자연스레 오가는 인사말일 겁니다. 설을 맞아 가까운 이들에게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는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설날에 쓰는 편지', 지금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아내를 졸라 선물로 받은 타자기로 직접 글자를 쳐서 쓴, 손편지보다 더 힘들었던 편지. 군데군데 오타가 보인다. 아내는 내가 쓴 편지를 모두 모아두었다.
▲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쓴 편지 아내를 졸라 선물로 받은 타자기로 직접 글자를 쳐서 쓴, 손편지보다 더 힘들었던 편지. 군데군데 오타가 보인다. 아내는 내가 쓴 편지를 모두 모아두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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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당신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타자기로 쳐서 쓴 편지가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어. 결혼 8년 차에 접어드니 가끔 생일도 잊고 넘어가는구려. 익숙해져선 안 될 것들에 대해 무뎌지는 게 두렵고 죄스러울 때가 있어. 당신이라는 존재감이 내겐 그래.

매년 명절 때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느라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정작 소중한 사람에게 감사의 말 한마디 못 전했네. 늘 고맙고 귀한 사람, 바로 당신이야. 막상 편지를 쓰려고 앉으니 조금 쑥스러워. 안 쓰던 근육을 쓸 때의 어색함처럼 손가락이 내 맘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용기를 내어볼게.

결국 눈물을 보인 당신... 깊이 반성 중이야

눈 구경하기 힘든 구미에 지난 주말 폭설이 내렸다. 아내 뒤편으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 눈 덮인 아파트 주차장에서 눈 구경하기 힘든 구미에 지난 주말 폭설이 내렸다. 아내 뒤편으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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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는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많았어. 어른들 말씀이 당신과 내가 함께 삼재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지. 그 날 기억나? 큰 아이 중등도 난청 진단을 받고, 늦은 밤 식탁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야기하던 날. 당신은 끝내 눈물을 보였고, 그런 당신을 토닥여 재우고는 나도 소주 한잔에 눈물을 훔쳤지.

더 심한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 않으냐며, 다음 날 씩씩하게 이야기하던 당신이 참 대단해 보였어. 매주 아이를 데리고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언어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서울까지 보청기 체크 받으러 다니느라 힘들었지? 저녁마다 아이와 책 읽기 훈련하는 당신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은 커지는데, 아빠로서 별로 해준 일이 없네. 깊이 반성 중이야.

당신은 늘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었어.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내가 지역 언론사를 만들겠다고 생떼를 부리자 묵묵히 자금을 지원해줬지. 불과 몇 달 만에 그 돈 다 까먹고, 참 당신 볼 면목이 없었어. 그럼에도 그 일에 대해 한마디 불평 없이 넘어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2014년 지방선거 시의원선거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을 때도, 힘들어하는 남편을 지켜보다 결국 거리로 나와 함께 선거운동을 해줬지. 낯가림이 심한 당신 성격에 얼마나 어렵고 고된 시간이었을까?

작년에 마을학교 협동조합 만든다고 만사를 제쳐놓고 앞장섰을 때도, 그 뒷수습은 결국 당신 몫이었어. 남편이 벌인 일이지만, 자기 일처럼 아이들과 목공교실, 바느질 교실 함께해주고, 저녁이면 녹초가 돼 돌아오곤 했지. 그런 당신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야. 난 당신에게 나무 같은 든든한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역할이 바뀐 듯해.

나 때문에 당신 뼈가 녹아내린 건 아닐까...

최근에 골다공증 진단을 받았을 때였지. 두 아들 연년생 출산보다 나 때문에 당신 뼈가 녹아내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 아욱국에 소고기에 칼슘 보충해야 한다고 며칠 난리를 피우다가 곧 시들해졌지만, 지금도 내 일정 알람에는 칼슘약 먹는 날이 저장돼 있어. 해마다 굵직한 사고를 치는 큰 아들(?) 키우고, 또 무슨 일 저지를까 노심초사하다 당신 속병이 난 게 아닌가 싶어.

어떤 때는 강하게만 보이는 당신이 안쓰러울 때가 있어. 제멋대로 사는 남편 뒷바라지에, 직장 일에, 아이들 키우고, 거기에 방통대 공부까지 병행하는 당신이 쓰러질 것 같아서 걱정되기도 해. 그 와중에도 장학금 3만 원밖에 못 받았다고 이번 학기에는 반액장학금이 목표라는 당신, 좀 쉬엄쉬엄하는 게 어때?

물론 당신이라는 사람 성격상 대충하고 넘어가는 일은 없겠지. 당신이 알뜰하게 생활해서 지금의 나와 우리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 아이들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기고, 결혼 전 입던 낡은 옷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검소한 아내가 내게는 축복일 수밖에. 아주 가끔 궁상맞다고 불평할 때도 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점 알아주면 좋겠어.

사과할 것이 또 한 가지 남아 있네. 작년 말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우울증을 앓게 되고, 본의 아니게 상처 주는 말들을 건넸지. 힘든 시기였지만, 당신의 보살핌과 애정으로 어두운 터널을 벗어났다고 생각해. 따지고 보면 우울증에 걸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을 텐데. 나처럼 현실 감각 없는 사람이랑 살아줘서 고마울 따름이야.

내겐 당신 스스로의 모습도 소중해

보청기를 껴야하는 난청을 가지고 태어난 큰 아이를 위해 아내가 많은 고생을 한다.
▲ 아내와 큰 아이 보청기를 껴야하는 난청을 가지고 태어난 큰 아이를 위해 아내가 많은 고생을 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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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고 난 지 이제 16년이 지나가네. 대학 선후배로 만나서 그런지 존칭을 쓰기가 쉽지 않아. 당신도 여전히 내게 오빠라고 부르듯이 말이야. 아이들이 아빠는 왜 '여보'라고 안 하고, '마눌'이라고 부르냐고 항의할 때 조금 뜨끔하긴 했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말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올해부터는 노력해 볼게.

늘 받기만한 당신에게 난 올해 특별한 제안을 했지. '한 달에 한 번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주말마다 아이들과 어디 나갈 생각만 했었지, 정작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 한 달에 한 번은 아이들 내게 맡기고, 친구들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에 여행도 다녀오도록 해. 두 아이의 엄마도 좋지만, 당신 스스로의 모습도 내겐 소중하니까.

올해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가는 해야. 지하 동아리방에서 어색하고 촌스럽게 만난 두 청춘이 이제 학부모가 되는 거지. 그래서 올해는 특히 가족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크게 사고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내 욕심 버리고 가족을 돌아보는 한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볼게.

요즘 기타로 연습하는 광석이형 노래 중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가 있어. 마지막 부분에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라는 구절을 들을 때마다 많이 울컥하곤 해.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 '한평생 당신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으니, 이제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시게, 안녕히 먼저 가 있으시게'라는 말로 들려. 그때까지 우리 행복하게 살자. 여보, 변함없이 사랑해.


태그:#명절,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학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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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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