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MBC <무한도전>은 새해를 맞이해 '예능 총회'라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꾸몄다. 예능계의 대부라 불리는 이경규에서부터, 2015년 연예대상에 빛나는 김구라와 그의 아들 MC그리(김동현)까지, 예능계의 '대세'들이 총망라된, 주제 그대로의 총회였다.

그 자리에는 방송인 김성주와 윤종신, 예능계에 첫발을 디딘 서장훈까지 신구 예능인이 참석해 왕성한 토론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세 혹은 대세의 가능성을 가진 예능인들이 모인 자리에 여성 예능인은 JTBC <님과 함께2>를 통해 대중적 호응을 얻은 김숙과 개그우먼 박나래 두 사람뿐이었다.

이날 김숙의 활약은, 그녀와 함께 화제가 된 윤정수와 커플로서일 때가 대부분이었고, 박나래 역시 첫 등장 이후 카메라에 거의 잡히지 않고, 방송 후반에는 자리에서 사라져 시청자들을 의아하게 했다. 박나래에 비해 그나마 화면에 등장한 김숙은 <님과 함께> 속에서 윤정수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경규가 예능의 대부로 여전한 예능감을 뽐내고, 김구라가 예능계를 점칠 때, 김숙은 여전히 쇼윈도 커플의 아내로서 해야 할 역할만 부여받은 것이다.

2015년, 여성 예능인들의 가뭄

MBC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참석한 김숙와 윤정수 지난달 9일 방송된 <무한도전> 예능총회에는 이경규와 김구라를 비롯해 10여 명의 패널이 참석했다.

▲ MBC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참석한 김숙와 윤정수 지난달 9일 방송된 <무한도전> 예능총회에는 이경규와 김구라를 비롯해 10여 명의 패널이 참석했다. ⓒ MBC


이날 김숙은 2015년이 여성 예능인으로서 힘든 한 해였음을 토로했다. 오죽하면 유재석과 동년배인 송은이는 "나이 마흔셋에 적성 검사를 할 정도였고, 사무직이 적성에 맞는다는 결과에 뒤늦게 엑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일이 없는 여성 예능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없다는 걸 시사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개그맨들이 수면 위로 뜨고 졌지만, 최근 몇 년간은 특히 여성 개그 우먼들에게 가혹한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성공한 예능 프로그램이 남성 집단 체제를 택하면서 여성들의 입지가 줄었고, 그나마 남은 자리도 개그우먼보단 비 개그우먼 여성이 차지하기 일쑤였다. SBS 예능 <런닝맨>의 송지효가 그 예다. 상당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KBS <해피투게더>의 신봉선과 박미선도 개편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여성 개그우먼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2013년 특별편에서 호응을 얻고 2014년에 정규로 편성된 <인간의 조건-여자편>이 그것이다. 어렵게 주어진 기회였지만 당시 <인간의 조건>은 특유의 호흡을 개그우먼에게 맡기지 못한 채, 비 개그우먼 여성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스스로 호흡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션 또한 뻔해진 그저 그런 프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웃찾사>나, <개그 콘서트>, 혹은 <코미디 빅리그>에서 이국주, 홍윤화, 장도연, 박나래 등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개그 프로그램 밖 그녀들의 활약은 그다지 용이하지 못했다. <라디오스타>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장도연이 기세를 몰아 <썰전> 2부에 참여했지만, 시사 경제를 다룬 이 프로그램은 아직 그녀에겐 역부족으로 보인다.

송은이·김숙, '팟 캐스트'로 새 영역 진출

송은이와 김숙의 <비밀보장> 송은이와 김숙은 <비밀보장>을 통해 팟 캐스트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 송은이와 김숙의 <비밀보장> 송은이와 김숙은 <비밀보장>을 통해 팟 캐스트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 <비밀보장> 공식 홈페이지


그런 가운데, 2015년 10월 김숙은 윤정수와 함께 <님과 함께>에서 그 모습을 보였다. 이제껏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한 연예인들이 진짜 부부인 듯 행세하는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자신들이 쇼윈도 부부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프로그램에 새로운 질감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숙은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우월한 우리 사회에서, '가모장'이라는 새로운 부부 형태를 제시하며 예능적 입지를 만들어 갔다. 이제는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그들의 진짜 결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다.

김숙이 <님과 함께>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 이면을 보자. 거기엔 그녀의 영리함이 있었다. 송은이가 엑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지만 중년의 개그우먼들에게 돌아오지 않는 방송의 기회를 돌아 이들은 2015년 4월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빠진 5천만 결정장애 국민을 위한 방송'이라는 모토로 시작한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은 인기 순위에서 상위권에 매겨질 만큼 호응을 얻었고, 방송이 외면한 그들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렸다. 두 사람의 이런 입담은 잊혀왔던 이들의 능력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님과 함께> 출연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숙은 <님과 함께>를 넘어 또 다른 기회를 쟁취했다. 비록 모바일 예능이지만, 다섯 명의 개그우먼들이 평소에 이상형이었던 남성 게스트를 초대해 팬심, 사심을 뽐내는 <마녀를 부탁해>가 그것이다.

그간 방송가에 자리 잡은 '남자 예능 시대' 덕에 입지가 좁아지고, 사라져 갔던 개그우먼들은 이렇게 자력으로 자신들만이 가능한 캐릭터를 갖고 방송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부디 이런 그녀들의 귀환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고유한 사례로 자리 잡길 바란다.

2016년, 여성 예능인의 약진을 바란다

JTBC <마녀를 부탁해> 오는 16일부터 방송되는 <마녀를 부탁해>

▲ JTBC <마녀를 부탁해> 오는 16일부터 방송되는 <마녀를 부탁해> ⓒ JTBC


김숙의 가모장 캐릭터는, 그리고 박나래, 이국주가 보여주는 당당한 자기주장은 가부장제 세상의 안티 히어로같은 캐릭터다. 그녀들의 새 캐릭터가, 그저 뻔해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잠시의 바람처럼 소모되지 않고, 이 사회의 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가모장에 또 다른 변주가 필요할 것이다.

지난 7일 방영된 tvN <문제적 남자-설렌타인 특집>은 개그우먼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날 방송에서 김숙은 그 누구보다 비상한 두뇌 플레이를 보였고, 김민경은 우람한 덩치 이상의, 섬세한 언어적 감각을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김영희는 피아노 연주 실력으로 그녀만의 감성을 선보였다.

단발성 특집이었지만, <문제적 남자>의 그녀들은 예의 웃음기 외에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개그우먼들을 또 다른 효용으로 활용함으로써 프로그램 자체의 영역 확산과 동시에 개그우먼들의 활용 범위를 넓힌 것이다. 부디 <문제적 남자> 셀렌타인과 같은 기회가 그녀들에게 많이 주어지는 2016년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숙 송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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