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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97년전 이 땅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분개한 온 민초가 분연히 일어나 자주독립을 목놓아 외치며 흔드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해방의 열망이 도미노처럼 온 나라를 휩쓸었던 그날, 독립의 갈망이 가슴 벅차게 물결치던 그 백성들의 가슴에는 절절한 애국의 노래도 흐르고 있었다.  

애국가.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다. 일제의 찬탈과 갖은 탄압속에서 죽어간 순국 선열들과 백성들의 한이 서렸을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먼저 간 고운 이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의 소야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 곱고 절절한 애국가의 지은이가 정확히 누군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지금은 '윤치호'설과 '안창호'설로 압축, 치열한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월에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서울신학대학교 주최로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 규명'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날도 두 인물중 누가 애국가를 지었느냐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윤치호설과 안창호설은 지금까지 각각 나름대로의 증거물과 증언들이 끊임없이 제시되어 왔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안창호의 습작 노트에 실린 '무궁화가 2'의 가사가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비슷하다는 주장, 1910년 미주 신한민보에 애국가 4절을 국민가로 소개하며 '윤치호 작사'로 보도했다는 주장 등이 각각 제시됐다.  

애국가는 과연 누가 지었을까. 한평생 애국적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순국한 안창호일까, 자발적 친일 거두의 삶을 살다 일본의 귀족이 된 매국자 윤치호일까.

일각에서는 애국, 매국 이런 잣대와 애국가 지은이 규명과는 별개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전혀 별개 문제라고 단정짓는 것도 어렵다. 그 사람의 평소 사고와 심리적 행태, 시대사상적인 철학적 습성과 패턴이 애국가의 가삿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전혀 끼치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울 수 없는 '윤치호설'에 대한 의심

윤치호는 10대때 신사 유람단원으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청년이 되어 중국에서 근대 교육을, 미국에서 신학과 인문사회,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영어에 능통한 수재중의 수재였다. 청소년기때부터 신문물과 신학문을 접하며 근대화된 일본을 동경했고 조선을 낙후된 사회라 비판했다.

물론 청년기에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15년 출감한 이후로는 자발적으로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강제병합이 숙명이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일제신민론(日帝臣民論)을 주장했고 3.1운동후에는 조선독립불능론을 주장했다.

그의 친일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고 자신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일종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똘똥 뭉쳐 있었으며 종국에는 일본 귀족 '이도오 찌꼬오(伊東致昊)'가 된다.

그는 평생 영어로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는 금전출납 내용과 아주 시시콜콜한 얘기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꼼꼼하다 못해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그의 일기장에는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도 없다. 그런 그는 해방이 되자 뜬금없이 애국가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나선다. 

평소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없는 윤치호. 해방후에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했음에도 60년 일기중에는 한줄도 이런 내용이 없지만 그가 지었다는 찬미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애국가에 작사자라며 그의 이름이 적힌 자료가 나오고 있다.

커져가는 '안창호설'에 대한 궁금증

애국의 표상인 안창호의 삶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고,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니라는 근거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 자신이 애국가을 지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최근의 동향은 이와 다르다.

지난해 3월,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흥사단이 주최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새로운 증언도 나왔다. 1907년 3월, 안창호가 선천예배당에서 애국찬미가 시상을 착상했고 이 대화를 나눈 사람인 윤형관 집사의 막내 동생인 윤형갑의 종손 윤정경이 전언되어 채록된 자료를 공개한 것인데, 애국가에 등장하는 무궁화는 근화(槿花)라는 식물(植物)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무궁(無窮)한 억조(億兆)창생(蒼生)을 지칭하기 위해 안창호 선생이 창작한 낱말이라고 안창호 선생이 직접 말했다는 것. 

거기에 애국가가 민중의 노래가 되기 위해 인쇄물이 아닌 구두로 이를 전파했고 임시정부내에서도 독립운동 세력간 다툼이 있어 나(안창호)의 작품으로 얘기하는 것이 부작용이 있을 것이니 내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도 새롭게 나온 증언이다.

2013년에 타계한 독립운동가 구익균 옹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동아일보(2011.10.25.)와의 대담을 통해 애국가 지은이가 누구냐 묻자 웃으시며 "내가 지었다"고 말했다는 것.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안창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추청된다며 공개한 무궁화가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안창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추청된다며 공개한 무궁화가
ⓒ 안용환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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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무궁화가가 안창호과 관여되어 있다는 주장, 주요한의 <안도산전서>에서 애국가 원래 끝 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점,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에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안창호가 수정했고 결국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 등을 무시하기 어렵다.

과연 누구인가

안창호는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하지 않았다는데도 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증언은 계속 제기되어 왔고, 이제는 하나둘씩 안창호 스스로 내가 지었다는 한 증언도 나오고 있다.

윤치호는 자신이 지었다고도 했고 그가 지었다고 기록된 자료도 다수 존재하지만 윤치호가 애국가의 지은이라고 선뜻 수용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마저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분명한 건 둘중 한사람은 분명 애국가를 지었거나 또는 가삿말이 나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은 자라면 안창호가 가삿말을 자의적으로 바꿔 임시정부에서 부르는데 이미 친일 매국의 영화로운 길을 걷던 그는 왜 이를 문제삼지 않았을까. 1920년 3월 1일, 상해에서 열린 제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3.1정신을 잊지말고 영원히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였던 안창호가 과연 애국가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누가 지었거나 말거나 그냥 빙그레 웃으며 흐지부지 모른 척했으므로 애국가 지은이가 아니고, 1919년 3월 1일 직후 약자는 강자에게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조선독립불능론을 주장한 윤치호가 애국가 지은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애국가의 작사자에 대한 계속되는 미스터리는 언제 끝이 날까. 애국가의 지은이는 단순한 기록물 여부가 아니라 당시의 여러 정황과 역사적 상황에 바탕해 반드시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질곡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엄중한 책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위키트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애국가 작사자, #안창호,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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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NGO정책을 전공했다. 문화일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겨레 전문필진과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지금은 오마이뉴스와 시민사회신문, 인터넷저널을 비롯,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기사 및 칼럼을 주로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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