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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상하게도, 그때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테라스 쪽으로 올라오는 것은, 으레 도시의 언어를 이루게 마련인 차량과 기계 소리들 대신 둔탁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웅성거림뿐이었는데, 그것은 무겁게 덮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윙윙거리는 재앙의 휘파람 소리에 리듬을 맞추는 수천의 구두창들이 고통스럽게 미끄러져 가는 소리였으며, 차츰차츰 온 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 그리고 그 당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맹목적인 고집에다가 저녁마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음울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저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 제3부

카뮈 <페스트> 민음사, 2011
 카뮈 <페스트> 민음사, 2011
ⓒ 김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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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가 점령한 도시의 언어는 차량이나 기계 소리가 아닌 '둔탁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웅성거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감금 상태나 귀양살이와 다름없는 격리된 공간에서 시민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제자리걸음도, 결코 위축될 것 같지 않던 페스트의 맹렬한 기세도 결국엔 끝이 나고 지나간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나아가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새삼 소개가 필요 없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 작품은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페스트가 발병해서 소멸하는 과정이 1부에서 5부까지 순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페스트의 발생과 소멸을 추적한 기록물도, 페스트를 물리친 영웅들의 얘기도 아니다. 이 책에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도 없고 페스트의 생성과 소멸을 과학적, 의학적으로 규명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도 없다.

'비둘기도 없고 나무도 없고 공원도 없어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도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도시, 요컨대 중성적인 장소일 뿐인' 평범한 도시 오랑에서 우연처럼 시작된 페스트가 우연처럼 사라진 현상은 알베르 카뮈의 지론인 부조리 바로 그것이다.

부조리의 사전적 의미는 '도리에 어긋나거나 이치에 맞지 아니함. 또는 그런 일'이다. 철학적으로는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부조리란 말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만큼 부조리, 실존주의 등은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다.

유기환의 <알베르 카뮈>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면, '세계 내에 던져진 실존에 부재하는 존재이유, 그리고 그 부재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불굴의 이성, 부조리는 양자 간의 화해 없는 대립, 괴리, 갈등으로부터 태어난다. 쉽게 말하면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 생명, 죽음, 우주, 존재, 무 등을 생각할 때 생기는 막막하고 아연한 감정, 그것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이다. …요컨대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카뮈에 의하면 인간도, 세계도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합리도 비합리도 아닌 부조리는 카오스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그것을 의식한다.

부조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일종의 깨달음이다. 거의 습관처럼 영위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문득 <왜?>라는 물음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주위의 모든 것은 낯설게 느껴지고 우리는 어렴풋이 부조리의 감정을 느낀다.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법은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

학창시절에 읽었던 <페스트>가 그냥 전염병에 관한 얘기였다면 시간이 흘러 재독, 삼독하는 <페스트>는 인간에게 공포와 불안을 초래하는 모든 것들(죽음, 고통, 전쟁, 파시즘, 자연재해 등)이 페스트로 치환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 예언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한' 오랑에 느닷없이 출몰한 페스트의 망령이 도시 전체를 서서히 공포와 불안으로 물들이고 마침내 정점을 찍었을 때 그것은 '끝없고 숨 막히는' 폭정을 휘두르는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짧은 분량으로 기술된 3부는 페스트의 생성과 소멸을 가름하는 변곡점에 해당하며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는 몰락의 전조인 셈이다.

이 책에서 오랑을 휩쓸고 간 페스트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였다면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리유, 타루, 랑베르 등의 희생과 헌신도 권태로울 정도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짓눌려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다.

바로 거기에 커다란 울림이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에 맞서서 반항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 즉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법은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야권 분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수도권에서 야당 지지율을 다 합치면 여당보다 높다는 얘기도 있어서 더 짙은 아쉬움을 자아낸다.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유권자들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때론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인 선거가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선거가 우리 뜻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유권자들의 입맛에 딱 맞게 차려지는 선거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희생이나 헌신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서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페스트>의 오랑과 지금 우리의 현실이 닮아 있다고 느낀다면 오랑의 시민들과 리유, 타루, 랑베르 등이 인간애로 결속되어 페스트와 맞서 싸웠듯이 우리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후보 단일화와 투표율 제고를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결코 잊어선 안 되겠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2011)


태그:#부조리,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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