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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내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내가 강인한 성품을 지녔거나 자존감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나는 순전히 고집과 두려움으로 글을 썼다. 내가 정말 작가인지 아니면 교외에서 미쳐가는 애 엄마일 뿐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가운데.

그저 글 쓰는 게 좋았다. 바버라 애버크롬비가 쓴 책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최근 <작가의 시작> 이름으로 개정판이 나왔다)에서 '작가의 소명' '진짜 작가'를 읽을 때는 가슴이 '쿵쿵' 거렸다.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곁에서 씩씩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것 같다. 대작가들도 너와 같은 고민을 매일 했다고. 주위 시선 따위 상관 말라고. 실패해도 다 과정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일단 쓰라고.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넌 작가라고.' - 작가의 페이스북 글 가운데

어릴 적부터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뭐라도 끄적였다. 가장 힘들었던 (스스로 '어둠의 시간'이라 표현하는) 그 시절에 나를 지키기 위해 쓴 글, 그런 글을 사람들이 진지하게 읽어줄까 걱정도 했다. 엄마는 말했다.

"삶을 이야기하는데 나이는 상관없어.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을 쓸 수 있어. 넌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글 실력이 서툴다 하더라도 네가 타인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해하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스물 일곱,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렇게 남들이 다 말리는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버티기도 어려운 일. 월급은 반 이상 줄었고 주말은 반납해야 했으며 사무실은 집이 되었다. 그래도 얻은 게 더 많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인간극장>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작가의 이야기다.

그리고 2년 전, 고 작가는 더 늦기 전에 온전히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고자 방송작가 일도 관뒀다. 꿈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은 벌었지만, 순탄치 않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그런 고 작가를 또 한번 견디게 한 건 다시 글이었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 그제야 <인간극장> 막내 작가 고수리는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이번에는 진짜 작가.

자기 글을 쓰면서 '미처 잊고 살았지만 삶의 무대에서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작가 고수리'가 주인공인 삶의 드라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달 27일 고 작가와 만나 책에서는 알 수 없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인간극장> 막내작가가 진짜 작가가 되기까지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작가.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작가.
ⓒ 고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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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책인데, <인간극장> 출신 방송작가의 책이라는 게 많이 알려진 것 같다.
"방송작가 일은 2012년 시작했다. 4년 정도. 그 중 1년 반 동안 <인간극장>에서 일했다. 말이 좋아 방송작가지 사실 막내 작가였다. 그 전에 광고회사 피디를 했는데, 성취감이 없고 재미가 없었다. 다들 말렸지만, 더 늦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방송작가가 되고 월급은 반 이상이 줄었지만(웃음) 좋은 경험이었다."

- 어떤 책인지 좀 소개해 달라.
"삶의 모습들을 진솔하게 써내려간 일기 같은 글이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삶에도 드라마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법한 일상 속 에피소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 엄마와 딸 사이의 뭉클한 이야기들이 있다. <인간극장> 작가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도 있고. 모두가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삶의 풍경들. '아! 나도 그랬는데'라며 찔끔 눈물 흘리거나,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그런 글들이다."

- 책에 실린 글은 방송작가를 그만 두고 쓰기 시작한 건가.
"새로 쓴 것도 있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개인 소장용(?)으로 써놓은 글이 있었다. 남에게 보일 글은 아니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쓴 글,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쓴 글들이었다. 그걸 공식적으로 처음 오픈한 게 '브런치'였다. 브런치는 글을 올리기 전에 작가 승인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작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30일 동안 매일매일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뭘 쓸지 모르지만 매일 쓰는 글이니, 일단 '그녀들의 요일'이라고 콘셉트를 잡고, 월요일에는 커피, 화요일에는 컴퓨터 뭐 이런 식으로 매일 썼다. 더 쓸 게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쓸 게 생기더라. 그렇게 총 100여 편이 넘는 글을 썼고 그 글들이 대부분 책에 실렸다."

- 열심히 쓴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금상도 받고, 책도 나오고.
"브런치 북 프로젝트 대상은 지정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데, 금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글을 올리면서 출판사 몇 군데에서 책을 내보자는 연락이 왔다. 몇몇은 미팅도 했는데 그 중 첫눈출판사에 가장 마음이 갔다. 처음 편집자 미팅하던 날, 편집자가 내가 쓴 글에 대한 감상을 일일이 적어 왔더라. 좋았던 글,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책으로 이렇게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의견까지. 정성이랄까, 출판사를 선택하는 데 있어 그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그거 하나 믿고 시작했는데, 책 만드는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 그런 편집자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무명 작가가 처음 내는 책인데, 내 의견을 정말 많이 반영해 주셨다. '작가님에게 좋은 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면서. 사실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될 수도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이야기를 많이 넣었다. 편집자나 저나 둘 다 서툴지만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는 그런 공감이 있었던 것 같다."

- 작가도 말했듯 이번 책은 고수리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수리 작가 엄마 이야기로도 읽혔다.
"엄마는...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처음 제 이야기를 글로 쓴 것도 아빠와 헤어지고 살던 곳을 떠나게 된 풍경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가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를 위해 살았던 것도 있고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었으니까. 취업 준비할 때, 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돈을 벌어야 하나 싶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 엄마도 작가의 꿈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책에 이런 대목 있잖나. '엄마는 매화야, 매화는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아. 그러니 딸 가난하게 살아도 네 마음을 팔지는 마',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가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화장실에도 책이 쌓여 있을 만큼. 문학소녀셨는데, 집안 사정으로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럼 감성이 살아 있다. 시를 적어서 벽에 붙여 놓고 한지에 시 적어서 커튼으로 활용하고. 애초 브런치에 글을 쓸 때는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출판계약을 하고 나중에야 말씀을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법정 스님이나 박완서 작가를 무척 좋아하시는데 그분들처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외할머니 이야기를 쓴 자작나무 글은 엄마가 제안해서 쓸 수 있었다."

"비로소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 평생 글 쓰며 살고 싶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작가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작가
ⓒ 고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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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제목도 그렇고 '힘들어하는 청춘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라는 소개에 비해 그런 내용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맞다. 가족에 대한 글이 더 많다. 뒤끝이 싸한 글도 많이 썼는데, 책 원고 수정하면서 좀 희망적으로 바꾸기도 하고 그랬다. 너무 어두워서(웃음). 사실 출판사에서 에세이집을 내자고 했을 때, 좀 당황스러웠다. 내 글이 에세이인가 싶어서. 평소에도 에세이 류의 책은 거의 보지 않았는데... 에세이 특유의 어떤 오글거리는(?) 글은 잘 못 쓴다고 생각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일기? 생활글에 가깝다고 봤다. 출판계약을 하고 나서 다른 에세이를 찾아 봤는데, 역시 내 글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대단히 추상적이고 만져지지 않는 걸 굉장히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그에 반해 내 글은 투박하지 않나. 대화도 들어가고 에피소드가 들어가니까.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데 에세이라니."

- 에세이에 대한 기준은 다르니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힘들었던 가정사 그리고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겪은 일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데, 자전적인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 같다.
"가족 중 일부는 반대도 했다. 아마도 결혼 전에 글을 썼다면 더 솔직하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특히 ('열일곱살 때 헤어진, 술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 책 속에서) 아빠에 대한 글을 쓸 때 정말 고민이 많았다. 그 부분을 빼자는 의견도 있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글에 다 아빠가 있는데 그걸 쓰지 않는 것에 내 자신이 설득이 안 됐다. 그래서 동생을 인터뷰했다. 나와 같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내 글이지만,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내가 어떤 글을 썼으면 좋을지 물었다. 동생은 책에 실린 '밤의 피크닉' 글이 좋다고 했다. 동생도 나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이상하게. 너무나 불안정한 상황이었는데도 작은 차 안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댄 채,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던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 동생이 말했다. '왜 피해자는 왜 숨 죽이면서 살아야 하냐'고.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작가가 된다는 거 자체가 험난한 길인데, 왜 피하려 하냐'고. 결국 쓰기로 했고, 마지막까지 가장 많이 퇴고한 글이 됐다."

- 쓰고 싶은 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쩌다 보니 자전적인 이야기로 첫 책을 냈다. 작가로서 어떤 한계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이야기를 훌훌 털어내고 나니까 내 안의 상처로 끙끙 앓던 것들, 이젠 그만 아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 다음 가벼워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리고나니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라.

<인간극장>을 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나름의 스킬이 생겼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주는 새로운 연재도 시작했고, 길에서 만난 사람을 인터뷰 하는 '휴먼스 오브 서울(Humans of Seoul)'(현재 10만여 명이 구독 중인 페이스북 페이지 - 기자말) 작업에도 관심이 간다. 평생 쭉 글을 쓰며 살 거니까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방송작가 일도 그랬고 내 인생도 그랬고 하루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았으니까(웃음). 장르 불문하고 동화, 청소년 소설, 에세이, 소설 등 언젠가는 뭔가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쓸 거다. 그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지음, 첫눈(2016)


태그:#고수리, #우린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첫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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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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