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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적 실언(Freudian slip)'이라는 말이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용어로,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나 억눌려 온 의식이 말실수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 있는 애인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후보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 공약을 말하면서, 재원 확보 방안으로 "지하경제 활성화"를 약속했다. 한 번도 아니고, 기자간담회와 텔레비전 토론 등 중요한 공식 석상에서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비과세 감면 제도를 정비한다든지, 또 '지하경제를 활성화' 한다든가 이렇게 달성해서 매년 27조 원씩 5년간 135조 원의 재원을 마련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지하경제를 뭘 어떻게 하든, 대통령 말대로라면 지난 3년 반 동안 복지재원으로 쓸 100조 원 이상이 곳간에 쌓여있을 것이다. 여기서 '쇼미더머니'를 외치고 싶지만, 일단 글의 주제인 '실언'에 집중하기로 하자. 당시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이 '양성화'라고 쓰인 원고를 잘못 읽었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임기 1년 반 남겨 놓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그 발언이 꼭 '오독'만은 아니었다는 의심이 든다. 잠재된 무의식의 표출, 즉 '프로이트적 실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의혹을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듯, 최근 대통령은 언론사 편집 편집·보도국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정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대국민 소통' 자리에서 논의된 '공직자 접대 보호책'

뉴스 채널 와이티엔(YTN)이 "공직자 골프 금지 풀렸나"라는 주제로 대통령의 골프 활성화 발언을 주요 '이슈분석'으로 다루고 있다.
▲ YTN 뉴스 채널 와이티엔(YTN)이 "공직자 골프 금지 풀렸나"라는 주제로 대통령의 골프 활성화 발언을 주요 '이슈분석'으로 다루고 있다.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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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박 대통령은 언론사 간부들을 청와대에 불러모았다. 언론은 대통령이 총선 패배 뒤 처음으로 가진 '대국민 소통' 노력이라고 치켜세우며 "국정 반전 승부수", "소통행보 시동?", "박 대통령, 민심청취 스타트" 따위의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이후 쏟아져 나온 뉴스를 보면,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에 관한 법(일명'김영란법') 에 대해 깊은 시름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박 대통령 '김영란법, 내수 위축시킬까 걱정...공직자골프 OK"라며, 대통령의 깊은 고뇌가 담긴 인용문을 기사의 제목으로 달았다. <동아일보>는 "朴 대통령, 김영란법 '부정적 견해' 밝혀…개정 논의 본격화 되나"라며 스스로 나서서 법개정 논의를 본격화했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은 "(김영란법이) 실제 이대로 되면 우리 경제를 너무 위축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속으로 많이 했다"고 말문을 연 뒤, "위헌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좋은 취지로 시작한 게 내수까지 위축시킬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가 우리나라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고, 내수를 살리기 위해 '지하경제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과거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한 수단으로 지하경제를 언급했었는데, 그 '복지'란 결국 '공직자 복지'로서, 갈비세트· 굴비·난 등이 주력 아이템이다.

이어진 박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한국 경제의 '대 골프 의존도'를 무시해왔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공직자 골프 문제에 대해 "좀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여기(국내)서는 눈총에 마음이 불편해서 전부 해외로 가니까 내수만 위축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보수언론, FTA때도 안 하던 농어민 걱정?

"인간관계 꽁꽁 얼릴"..."30,000원법" 비판하는 <매경>
 "인간관계 꽁꽁 얼릴"..."30,000원법" 비판하는 <매경>
ⓒ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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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발언이 보도된 후, 한국 사회의 저급한 도덕 의식을 탄식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언론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물이라도 만난 듯 '김영란법 때리기' 수위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경제>는 법률 시행령 입법예고를 보도하며 매우 장황한 수식어를 앞에 붙였다.

"정부가 내수 경기 위축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마저 얼어붙게 해 한국 경제를 '겨울왕국'으로 전락시킬 것으로 염려해 온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5월 12일자 <조선일보>는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이라는 비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김영란법에 시름 커진 농·어민"이라는 표제 밑에 이렇게 썼다. "'5만원 넘는 선물 금지'로 한우8000억원 판로 막혀", "난·화환·인삼농가 등도 '아예 산업 자체 없애려 하나'". <동아일보>도 "축산-화훼-유통업계 울상"이라며 나섰다.

보수언론이 한-미, 한-유럽,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체결 때도 안 하던 농어민 걱정을 갑자기 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2012년 국내 축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으로 우려되던 쇠고기 수입 자유화와 한미 FTA 발효 당시, 농가에 '패배주의를 벗으라'고 충고하며, "개방 17년… 농업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15년 정부가 한-중 FTA 비준으로 위협받게 될 농민들을 위해 '농어촌 상생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는 두 신문 모두 '기업 삥 뜯기'니 '준조세'니 하며 반발했다.

기막힌 일이지만,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다. 대통령이 간담회때 했던 '문제 발언'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통령이 아니라 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영란법' 걱정하는 정-언 연합체

김영란법으로 농업과 축산업이 위기에 몰린다는 <조선일보> 보도.
 김영란법으로 농업과 축산업이 위기에 몰린다는 <조선일보> 보도.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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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자들이 고위 정치인들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기자들이 고르고 추린 내용만 간략히 보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간담회는 대화내용 전문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의 고질적인 '적폐'인정-정언 유착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을 만난 뒤 한국 언론은 '김영란법'에 대한 '우려'나 '공직자 골프 자유화' 관련 발언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물론 이 발언의 출처는 모두 대통령으로, 언론은 그의 말을 직접인용하며 상세히 보도했다. <미디어오늘>이 공개한 간담회 내용은, 그 발언의 주역들이 언론사 간부들임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권과 언론의 범상치 않은 관계는 연합뉴스 편집국장의 '건배사'에서부터 드러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은 이제 더 풍요롭고 더 합리적이고 더 품격 있는 나라로 도약해야 합니다. 국정의 중심에 계시는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 하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건배사는 아주 상투적인 것을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로 하겠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하면 '위하여'라고 하고 복창해 주십시오. 앞에 놓인 주스 잔 들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웃고 담소하는 와중에도 권력과 언론은 서늘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진 다른 언론사 기자의 발언은 그들이 '감시자'보다 '공모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과거 대통령이 했던 '골프칠 시간 있느냐'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 "국내 내수를 촉진시킬 것이 해외 골프로 나가고 이런 부작용도 연출되고 있다"며, 대통령에게 '골프쳐도 좋다'는 점을 분명히해 줄 수 있냐고 요구했다.

대통령의 '골프 OK' 발언은 이 '질문'의 대답으로 나왔다. 대통령은 "내수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하겠다 생각한다"며, '골프를 칠 시간이 있느냐' 하는 발언이 골프 금지령으로 해석된 데 대해 "확대 해석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 내가 말조심을 더 해야겠다"고 까지 말했다. 한국 언론은 이런 데서는 대통령의 사과까지 받아낼 만큼 용감무쌍했던 셈이다. 김영란법에 대한 대통령의 '우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기자들이었다.

"법률명은 깁니다마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에 관한 법, 김영란법입니다. 국회가 만들었습니다마는 9월 말에 시행이 될 텐데 법의 취지 또는 위헌성 여부는 차치하고 법이 시행될 경우에 경제를 위축시킬 우려가 큽니다. 우려가 상당 부분 나타나서 한우축산농가라든지 화훼농가, 과일 재배하는 사람들, 식당 이런 사람들이 내수경기 위축은 물론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고 실제 건의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혹시 김영란법이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혹시 우려 갖고 계신 것은 아닌지 여쭙고 싶습니다."

김영란법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 한국 언론

연습이라도 한 듯 척척 아귀가 맞는 대통령과 기자들의 문답은, 우리나라에 '김영란법'이 꼭 필요한 이유를 역으로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직후 '김영란법의 조속한 원안통과'를 국회에 주문했었다. 세월호 참사가 돈, 선물, 식사대접으로 매개된 공직자-업자 사이의 '따뜻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대통령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경제를 위해' 세월호를 잊기를 요구하더니, 이제 다시 '경제를 위해' 부패의 고리를 용인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다시 정부와 언론이 손잡고 나섰다.

대통령은 '공짜점심은 없다'는 말을 즐겨 쓴다. 생각해 보라. 왜 친구와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밥을 사고, 갈비를 보내고, 골프비를 내주는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경제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불의의 공모'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이 사실은 기자들이 청와대에서 얻어 먹은 밥이 3만 원짜리가 아니라 3천 원 짜리였어도 마찬가지다.

한편, 국민권익위원회는 오늘(24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에 대한 공청회를 연다.


태그:#김영란법, #기레기, #간담회, #박근혜,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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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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