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함양박물관
 함양박물관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여행에는 사전 공부와 자료 준비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현장에서 좀 더 많은 걸 보고,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 한, 당의 문화유산 들여다보기'라는 답사자료를 만들었다. 자료는 일정에 따라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날에는 공항에서 가까운 함양의 문화유산을 살펴본다. 둘째 날에는 서안 시내 중심부의 문화유산을 살펴본다. 셋째 날에는 서안 동부 진시황릉과 화청지 등을 살펴본다. 넷째 날에는 함양에 있는 법문사와 건릉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보면 서안 이틀, 함양 이틀을 구경하는 것이다. 첫날 자료는 함양박물관과 무릉(茂陵) 그리고 곽거병((霍去病)묘를 다루고 있다. 함양박물관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있는 박물관으로, 진(秦)과 한(漢) 시대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진과 한 왕조 시대의 유물 60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 박물관은 1371년 건설된 공자(孔子) 사당 문묘(文廟)를 활용해 1962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한무제 무릉
 한무제 무릉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무릉은 한무제(漢武帝)의 능이다. 한나라 황제릉 중 최대 규모다. 높이 46.5m, 동서 길이 39.5m, 남북 길이 40.6m나 된다.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주위에 이부인, 곽거병(霍去病), 위청(衛靑)의 묘가 있다. 무릉박물관에서는 금마(金馬), 석호(石虎), 석마(石馬), 와우(臥牛), 멧돼지(野豬) 등 석조유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비석

둘째 날 자료는 서안 성벽과 그 안에 있는 문화유산을 다루고 있다. 그중 청진대사(淸眞大寺)와 비림(碑林)이 특이하다. 청진대사는 이슬람사원이고, 비림은 비석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청진대사는 742년 불교사원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고 명, 청대 현재와 같은 양식으로 중건되었다. 사원은 4개의 진원(眞園)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바깥 4진원부터 가장 안쪽 1진원까지 패방과 누각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청진사
 청진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들 패방과 누각에는 글자와 편액이 새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진사, 칙사예배사(勅賜禮拜寺), 성심루(省心樓), 천감재자(天監在玆), 도법참천지(道法參天地)다. 아랍어로 쓰여진 패방도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현장에 가서 확인해볼 예정이다. 청진사에는 청대의 <꾸란>과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 지도가 있다. 그리고 청진사 밖에는 회교도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비림박물관에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비석 4000개 이상이 전시되어 있다. 비림은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成石經)이 황폐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문묘 뒤로 옮기고, 현종(玄宗) 황제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와 안진경(顔眞卿), 구양수(歐陽修), 저수량(褚遂良), 서호(徐浩), 몽영(夢瑛) 등이 쓴 돌비석을 그 주위에 세워 보존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명(明)나라의 성화(成化), 청(淸)나라의 강희(康熙)·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성석경
 개성석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럼 개성석경이란 무엇인가? 개성석경은 당나라 해서(楷書)의 표준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일명 당석경(唐石經)이라 부른다. 당 문종(文宗) 때인 대화(大和) 7년(833) 재상이던 정담(鄭覃)의 주청으로 시작해 개성(開成) 2년(837)에 완성되었다. 글의 내용은 <주역(周易)><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효경(孝經)> <논어(論語)> 등에서 따 왔다. 글씨는 애거회(艾居晦), 진개(陳玠) 등이 새겼다. 개성 석경은 114개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28면에 65만 252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기독교의 중국 전파를 알리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다. 이 비석은 당 건중(建中) 2년(781) 2월 페르시아 출신의 동삭방절도부사(同朔方節度副使) 이사(伊斯: Mar Yazdhozid)의 주청으로 대진사(大秦寺) 경내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총주교인 경정(景淨)과 신부(傳敎士)인 아당(亞當: Adam)이 짓고, 태주사 참군(台州司 参軍)을 지낸 여수암(呂秀岩)이 새겼다. 이수, 비신, 귀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수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제액(題額)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97㎝,전체 높이는 279㎝이다. 해서체 글씨로 32행이 쓰여 있으며, 한 행은 62자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1780개 글자가 있다. 이 비석은 명나라 희종(熹宗) 때인 1623년(天啓 3년)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150리 떨어진 주지현(周至縣) 오군성(五群城) 대진사(大秦寺)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1907년 현재의 비림으로 옮겨졌다.

대안탑과 소안탑에서 문명교류의 흔적을 찾다

둘째 날 보는 대안탑과 소안탑은 부처님의 법을 담은 불경을 간직하고 있다. 대안탑은 황실 사찰 자은사(慈恩寺)에 세워진 불탑이다. 자은사는 당 고종이 황태자였던 648년,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의 극락왕생을 위해 세운 절이다. 10여 개의 전각에 1897칸의 대규모로 만들어졌고, '대자은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玄獎, 602~664)을 맞이해서 상좌(上座)로 삼고, 번경원(翻經院)에서 역경에 전념케 했다. 현장을 대자은사 삼장법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은사 대안탑
 자은사 대안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현장이 가지고 온 경전과 불상을 수장하기 위해 652년 자은사에 인도식 5층 전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701년 이 탑은 높이 67m의 4각 7층탑으로 증축되었다. 제1층 남쪽벽에 유명한 안탑성교서비(雁塔聖敎序碑)가 감입(嵌入)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각층마다 부처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란과 지진 등으로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소안탑과 구별하기 위해 대안탑으로 불린다. 서안의 탑 중 높이가 가장 높다.

현장은 태종 원년 627년 장안을 떠나 육로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불경을 가지고 645년 2월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종의 칙명을 받아 3년 동안<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138개국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풍토, 불교를 기록한 대하 다큐여행기다.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 불경 번역에 전념해 <반야바라밀다경> 등 74부 1335권을 불경을 번역했다.

소안탑(小雁塔)은 707년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천복사(薦福寺) 경내에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15층탑이었으나 지진으로 2층이 무너지고 지금은 13층 43m만 남아있다. 대안탑이 깨끗하고 현대적이라면 소안탑은 옛 모습을 간직해 고답적이다.

의정은 현장과 달리 해로로 인도를 다녀왔다. 672년 11월 37세의 나이로 광주(廣州)를 출발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거쳐 2년 만에 인도 동부 갠지스 삼각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범어를 배운 뒤 불교학의 중심지 나란다(Nalanda, 那爛陀) 사원으로 간다. 그는 675년부터 685년까지 10년간 불교연구에 몰두한다.

천축국으로 법을 찾아 떠나는 승려의 모습
 천축국으로 법을 찾아 떠나는 승려의 모습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685년 12월 인도를 떠나 689년 광주에 도착한다. 그러나 다시 팔렘방으로 돌아가 4년을 머문 후, 694년 5월 팔렘방을 떠나 1개월 후 다시 광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695년 5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영접을 받으며 돌아왔다. 그때 의정의 나이는 61세였다. 25년만의 귀환이었다. 의정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산스크리트 원전을 천복사 소안탑에 안치하고 변경원(辨經院)에서 이들을 번역했다.

그때 가지고 온 불경은 68부 29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정은 자신의 인도 여행과 불교 공부를 위해 인도를 찾은 승려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간했다. 전자가<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이고, 후자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이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56명에 이르는 순례승들의 프로필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 7명은 신라승이고, 1명은 고구려승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

진시황릉
 진시황릉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세 번째 날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진시황릉(秦始皇陵)과 진시황 병마용갱(兵馬俑坑)이다. 진시황(기원전 259~210)은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고 황제에 등극한 사람이다. 그는 수도와 지방 군현을 연결하는 도로를 내고, 문자의 서체와 도량형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북방의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그들이 저술한 책을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기도 했다.

진시황릉은 서안 동쪽 임동(臨潼)에 있다. 능의 높이가 76m, 동서 길이 475m, 남북 길이 384m나 된다. 그가 즉위한 다음해인 기원전 24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208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 착공되었으며, 모두 70만이 넘는 죄수를 동원해 무덤을 완성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고,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능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화살 자동발사 장치까지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제
 진시황제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진시황이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러서 병이 생겼다. 진시황은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에 군신들도 감히 죽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황제는 병이 날로 심해지자 공자(公子) 부소에게 보내는 새서(璽書)를 써서 말하길, '돌아와서 상사(喪事)에 참여하고, 함양에 안장하라'고 한 뒤 봉인해 성지(聖旨)를 집행하는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관부(官府)에 놓아둔 채, 사자에게 주지는 않았다. 7월 병인일(丙寅日) 진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서거했다.

[…]

태자 호해가 제위를 계승해 2세 황제(二世皇帝)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여산(酈山)에 진시황을 안장했다. 옛날 진시황이 처음 즉위해 여산에 치산(治山) 공사를 벌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온 죄인 70만여 명을 시켜서 깊이 파게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설치했다. 모형으로 만든 궁관(宮觀), 백관(百官), 기기(奇器), 진괴(珍怪)들을 운반해 그 안에 가득 보관했다.

장인(匠人)에게 명령해 자동으로 발사되는 궁전(弓箭)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파내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다. 수은(水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해 흘러가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天文)의 도형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지리(地理)의 모형을 설치했다. 그리고 도롱뇽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했다."

흥선사와 법문사에서 만날 수 있는 삼보

흥선사 대웅보전
 흥선사 대웅보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흥선사(興善寺)는 이름처럼 선업을 많이 쌓은 절인 것 같다. 당나라 때 외국의 승려들이 가장 많이 머문 절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인도 불교의 큰스님인 선무외(善無畏, 637~735. Śubhakarasiṃha, 輸波迦羅, 淨獅子)가 밀교를 중국에 처음으로 전했다. 그리고 금강지(金剛智, 669~741. Vajrabodhi, 跋日羅菩提)와 불공(不空, 705~774. Amoghavajra, 不空三藏)이 그 뜻을 이어받아 밀교(密敎)를 널리 전파했다.

공개적인 가르침을 표방하는 현교(顯敎)와 달리, 밀교는 마음을 통해 비밀스럽게 가르침을 전파한다. 그러므로 밀교는 주술적인 요소가 많으며,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기 위해 진언과 다라니 같은 주문을 활용한다. 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만다라와 금강저(金剛杵)를 활용한다. 신라 출신의 혜초(慧超, 704~787) 스님이 중국으로 유학, 불교를 배운 곳이 바로 흥선사다. 혜초는 금강지의 권유로 해로와 육로로 인도를 다녀왔으며, 그 여행 기록을<왕오천축국전>으로 남겼다.

법문사(法門寺)는 말 그대로 법의 문을 연 절이다. 2세기 후반 후한 영제(靈帝) 때 건설되었으며, 창건 당시 이름은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사라고 하였다. 당시 아육왕탑이라는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618년 법문사로 개칭되었고, 당대(唐代)에 13층 전탑으로 개축되어 진신보탑(眞身寶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는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해서 역대 황제들의 사리공양이 행해졌다. 그때 바친 공양물이 지금 법문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법문사 사리장엄구
 법문사 사리장엄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태그:#서안과 함양, #절과 탑, #진시황릉, 무릉, 건릉, #함양박물관, 섬서역사박물관, 비림박물관, #화청궁과 병마용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