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로마에서 발생한 이별살인의 희생자 사라 디 피에트란토니오(22)와 그를 살해한 전 남자친구 빈센조 파두아노(27). 이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여성혐오 문화의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로마에서 발생한 이별살인의 희생자 사라 디 피에트란토니오(22)와 그를 살해한 전 남자친구 빈센조 파두아노(27). 이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여성혐오 문화의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공개자료

관련사진보기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을 때, 이탈리아에서도 끔찍한 살인이 일어났다. 지난달 29일, 로마에서 27세 남자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산 채로 태워 죽인 것이다. 가해자는 전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것을 알고는, 새 남자친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전 여자친구가 혼자 나타나자, 남자는 뒤를 밟았고, 그녀가 승용차에 오르는 순간 차에 따라 탔다. 남자는 차 안에서 강제로 입을 맞추고 성행위를 하려고 했으나 거부 당했다. 그러자 범인은 여자 몸과 차 안에 알코올을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

여자는 가까스로 문을 열고 달아났지만, 가해자는 쫓아가 기어이 몸에 불을 붙였다. 피해자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딸의 귀가가 늦어져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경찰은 감시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보고 용의자를 체포했고, 그는 범행을 계속 부인하다가 8시간 넘는 취조 끝에야 자백했다. 범인은 "여자친구와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을 담당한 한 수사관은 "경찰 생활 25년 동안 이토록 잔인한 범죄는 처음봤다"며 경악했다.

유럽과 영미 언론은 이 사건을 이탈리아에 만연한 '여성살해(femicide)'의 사례로 보도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올해 들어서만, 이 사건을 포함해 55명의 여자가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피살되었다.

'개인 탓'으로 돌리는 한국, '여혐 해결책' 찾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최근 일어난 잔혹한 이별살인은 가부장적 문화의 폭력성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와 연대를 상징하는 붉은 색 구두와 옷, 우산, 현수막 등을 들고 '목소리를 내자'며 시위하는 로마 시민들.
 로마에서 최근 일어난 잔혹한 이별살인은 가부장적 문화의 폭력성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와 연대를 상징하는 붉은 색 구두와 옷, 우산, 현수막 등을 들고 '목소리를 내자'며 시위하는 로마 시민들.
ⓒ Anna Lodeserto

관련사진보기


어느 나라든 정부와 공권력은 충격적인 범죄를 개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국민들이 범죄를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민들이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더욱 골치 아파진다.

충격적인 사건 뒤에 '우울증'과 '정신질환'이라는 말이 단골로 따라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이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정신 나간' 사람 한 명이 벌인 개별적인 사건으로 인식시키고 싶은 것이다. 범죄를 이런 식으로 고립시키면 국민 다수도 마음이 편해진다. 정상적인 '우리'와 상관없는 '그들' 일인 만큼, 홀가분하게 '잠재적 가해자'의 혐의를 벗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탈리아의 '이별 살인' 역시 전 세계를 경악시킨 잔혹한 범죄라는 점에서, '개인화'의 유혹이 컸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만들기 쉬운 사건이기도 했다. 평생 경찰에 몸담았던 수사관마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수법이 잔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상적 사고'을 지닌 '멀쩡한 사람'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겠는가?"라며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찰, 검찰, 의회, 시민사회는 그렇게 손쉽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다른 여성혐오 범죄와의 연결 고리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남성이 헤어지려는 여자를 협박하고 구타해서 붙잡아두려고 하거나, 사적인 사진이나 동영상을 유포해 복수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이별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이탈리아의 라우라 볼드리니 하원의장은 즉시 성명을 발표하고 "(여성에게 폭력적인) 문화적 사고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며, 이 변화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학교 교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그저 치안 확대 등의 조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국민 인식의 문제라는 사실을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

'혐오 범죄'가 없다는 한국

지난달 22일 있었던 서초경찰서의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심리결과 발표 보도
 지난달 22일 있었던 서초경찰서의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심리결과 발표 보도
ⓒ 연합뉴스tv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볼드리니 의장은 '성 인권 교육'과 의식개혁 캠페인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 창밖에 붉은 기를 내걸었다. 붉은 색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안타깝게 죽임을 당한 여성에 대한 추모는 '여성살해 문화 뿌리뽑기 운동'으로 번져가고 있으며, 유력 정치인이 이 사회운동의 선두에 선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몬텔레오네 검사도 시민들에게 "더 이상 주위 여성 폭력을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여성들에게는 "당신을 사랑한다면서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며, 사소한 협박과 폭력의 조짐을 느끼는 즉시 주위 사람들과 경찰에 알려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수치를 느껴야 할 사람은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지,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현재 이탈리아 전역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말하자"나 "우리는 살고 싶다"등의 피켓과 현수막을 든 시가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온라인 시위도 날로 확산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왓츠앱 등에 붉은 구두나 머플러 등 빨간색 물건을 찍어 올리며 연대를 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추모와 더불어 여성에게 폭력적인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부와 공권력이 '한국에는 여성 혐오 범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여성에 폭력적인 사회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당연한 제안을 '남성 혐오'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5월 강신명 경찰청장은 "특정 대상을 겨냥한 범죄사례가 국내에 축적된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직 대한민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고 단언했다. 일부 남성들은 "범죄자는 혐오를 했지만 사회는 여성혐오를 유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피켓을 든 채 시위까지 벌였다. 민관이 합동으로 '한국은 여혐 청정지역'임을 공언한 셈이다.

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지난달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지난달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여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체득해 여성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차별적 사고는 남자가 여자보다 대체로 물리적 힘이 더 세다는 사실에 기초해 '자연의 질서'인 것처럼 합리화되기도 한다. 고릴라나 오랑우탄이 사람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이 존재의 우위를 증명하지 않듯, 힘이나 신체구조가 남녀관계의 우위나 폭력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와 한국 모두 '마초 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고 있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 나라는 그런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바로잡으려 하는 한편, 한 나라는 아예 그런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여성 혐오'가 없다는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학대, 폭행, 살인이 잇따르며, 어떻게 '안전 이별'이 신조어가 될 만큼 암담한 현실이 되었을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이를 갈 만큼 여성을 증오해야만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인정 받으려면, 여성을 향해 폭발하는 혐오감을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범행해야 하고, 이때 범인의 정신상태는 아주 온전해야 하며, 사후에는 범인 스스로 여성혐오자임을 자백해야 한다(경찰은 강남역 살인이 혐오범죄가 아니라면서, 범인이 여성혐오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살해'로 분류된다. '여성살해'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세계적으로 '혐오범죄(hate crime)'로 분류된다. 강남 살인사건 범인은 "여자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진술했고, 실제로 기다리고 있다가 여자를 골라 범행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여성살해이고, 혐오범죄다.

범인은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여자를 살해했지만, 그는 살면서 남자들로부터 훨씬 많은 무시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들로부터 겪은 수모는 당연시하면서 여성들로부터 당한 수모만 기억했다. 명백히 차별적인 시선이고, 여성혐오적 태도다.

남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여자가 해주지 않으면 '무시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것'이나 '나와 성관계해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가정폭력이나 이별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학대'와 '사랑'도 구분 못하는 이들이 '혐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달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달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여성살해' 통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

앞에서 로마에서 일어난 잔혹한 '이별 살인'을 계기로, 여성폭력에 둔감한 문화와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어떤가? 물론 '혐오범죄'가 없는 나라이니, '이별살인'이나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도구로 삼는 집단 성폭행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경찰청 자료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2014년 사이 애인 관계에 발생한 폭행, 상해나 강간·강제추행, 살인미수 등 5개 범죄 피해자의 수가 무려 3만6362명에 달했다. 이런 범죄가 한 해 평균 7272건이나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에게 살해당하는 여성들은 몇 명이나 될까? 답은 '알 수 없다'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 경찰은 '여성살해'를 별도로 집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해, 102명이 연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로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사례만 보아도, 지난해 1월 경북 포항에서는 40대 남자가 헤어지려는 여자친구를 차로 네 차례나 들이받아 살해하려 했고, 5월에는 20대 남성이 상습폭행을 견디다 못해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제천의 야산에 시멘트로 암매장한 뒤 검거되었다. 12월에는 서울 용산구에서 40대 남자가 데이트 폭력에 못 견뎌 헤어지려는 여자친구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올 1월에 경남 창원에서는 40대 남성이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의 머리를 벽돌로 네 차례 내리쳐 살인 미수로 구속되었고, 2월에는 전남 화순에서 10대 청년이 여자친구를 목졸라 살해한 뒤 검거되었고, 4월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하고 도주한 30대 남성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여성살해는 지역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고 있으며,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입 냄새'와 같은 여성혐오

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지난달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지난달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한국에서는 지난 6년간 사흘에 한 번꼴로 이별살인이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아니어도, 한국에서 여성을 겨냥한 폭력과 살인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선 상태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런 사건 뒤에 자리 잡은 여성 혐오 정서가 더 이상 소수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이 '여혐 청정국'이라고 믿는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영국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이데올로기는 입 냄새와 같다"고 말했다. 자기 입 냄새를 맡기 어렵듯, 자신의 편견을 보기도 어려운 법이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 나라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지를 구체적 사례와 통계수치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 입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한 번 맡아보도록 하자. 참고로, 구취를 없애는 방법은 부인하는 게 아니라 양치질하는 것이다.


태그:#강남살인, #여성살해, #이별살인, #여성혐오, #혐오범죄
댓글3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