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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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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움켜진 손아귀를 펴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새로 손에 쥔 그 무엇은, 그동안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었고, 놓기 전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였다. 요단강을 건너는 심정으로 사표를 만지작거렸다.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해 놓았던 버킷리스트 중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던 계획을 전격 감행하기로 했다. 평범하게 살던 어느 직장인의 세계 일주는 그렇게 갑작스러우면서 갑작스럽지 않게 시작됐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 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 기자 말
탄자니아 여행 ⓒ 김동우
[이야기 1] 킬리만자로 앞에서 드러눕다

탄자니아로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두통이 찾아왔다. 순토시계는 해발 2000m 정도를 찍었다. 고산증이 올 고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끈거리는 두통은 심해졌다. 내 여행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어둠의 그림자가 서서히 날 덮쳐오고 있었다.

승객들 대부분은 세렝게티에서 가까운 아루샤에 하차했고 이곳에서 킬리만자로가 가까운 모시로 향하는 승객은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를 갈아타려고 보니 호객꾼들이 모여들었다. 5일짜리 킬리만자로 트레킹은 1000달러 정도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아프리카 제2봉 케냐산이 절반 가격인 걸 보면 아프리카 최고봉이라는 타이틀에 붙은 프리미엄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킬리만자로 트레킹은 크게 4박 5일 또는 5박 6일짜리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등정 성공률은 6일짜리 코스가 당연히 높다. 고소적응이 관건인 셈이다.
탄자니아 여행 ⓒ 김동우
내 이름을 묻는 한 호객꾼에게 명함을 받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1시간 30분을 더 달려 모시에 도착했다. 케냐 나이로비를 출발한 지 8시간 만이었다. 저 멀리 만년설산 킬리만자로의 위풍당당한 풍채가 눈에 들어왔다.

'왔구나!'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한 사내가 'KIM'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버스 승객 중 99%가 서양인이었다. 분명 날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안 봐도 CCTV였다. 아루샤에서 내 이름을 듣고 모시에 있는 회사 직원에게 미리 연락을 해둔 거였다. '우사인 볼트'를 능가하는 민첩함에 미소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케냐 일정이 무지막지하게 앞당겨져 마땅히 찾아놓은 숙소가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독일 친구에게 숙소 정보를 물으니 '킬리만자로 백패커스'란 곳에 가자고 했다. 조지란 호객꾼도 우리를 쫓아왔다. 킬리만자로 백패커스는 아침식사 포함에 도미토리가 10달러, 싱글룸이 12달러였다. 이상하리만큼 도미토리와 싱글룸의 가격 차이가 적었다. 방을 보니 이유가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싸고 좋은 건 없다. 싱글룸은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작았다.

그래도 혼자 지내는 게 편했다. 작은 골방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곤 식당을 찾아 스파게티를 잔치국수 먹듯 격하게 위 속으로 쓸어 담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탄자니아 여행 ⓒ 김동우
새벽녘 추위와 복통 그리고 두통에 눈을 떴다. 복통은 누군가 내 내장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듯했고, 추위는 오한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몸살 기운이 있나 싶어 다운재킷을 꺼내 입고 아스피린을 한 알 삼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다시 눈을 뜨니 증상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지친 몸이 여행을 견디다 못해 탈이 난 것 같았다. 이번 여행 중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종합감기약을 빈속에 털어 넣었다. 복통은 계속됐고 시간이 흘러도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그 사이 다운재킷은 식은땀으로 완전히 젖었다. 그렇게 2~3시간을 좁다란 방안에서 홀로 웅크린 채 신음했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독감이나 몸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지독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켜 리셉션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레임이 시미엔산에서 나한테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나, 무지 아파..."

내 이마를 짚어본 리셉션 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사경을 헤맬 것 같았다. 내 몸도, 숙소직원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몸에서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내 몸의 면역체계가 뭔가 심각한 병균과 치열하게 공방전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 싸움에서 난 계속 패하고 있었다.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아프리카에서 맞는 겨울이었다.

숙소직원은 이 상태로는 혼자서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어제 왔던 조지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호객꾼이 날 간호하면 나중에 진짜 코가 끼는 상황이 올 텐데, 싫다고 할 수도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시 뒤 조지가 도착했다.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출발했다. 모시에서 제일 큰 병원은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동네 작은 의원으로 향했다.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병원에 들어서니 검은 시선들이 모두 내게 쏠렸다. 강원도 오지 시골의원에 노랑머리 서양인이 들어선 격이었다.

커튼으로 가려놓은 작은 진료실에는 덩치 좋은 흑인의사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청진기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각종 차트로 어지러웠다. 병원에서 흔히 보던 의사의 깔끔한 책상이 아니었다.

의사는 상태를 말해보라고 했다. 춥고, 어지럽고, 열나고, 머리 아프고, 배 아프고, 목이 마르다고 했다. 의사는 조지보다 영어를 못했다. 조지가 내 말을 성의껏 통역해주었다. 도저히 의사를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병만 더 키울 것 같았다. 의사는 일단 혈압과 체온을 체크했다. 혈압은 정상이었으나 체온은 38도까지 올라 있었다. 의사는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할 테니 입원실에 누워 있으라고 했다.

입원실에 누워 있는 내게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찾아왔다. 어색했지만 그에게 노란 내 엉덩이를 내밀었다. 간호사는 내 엉덩이 살점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바늘을 한 방에 찔러 넣었다. 처음 접해보는 주사법이었다.

"앗! 으~흑~"

투여량도 엄청났다. 도대체 내 몸에 뭘 밀어 넣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간호사는 내 검붉은 피를 필요 이상으로 뽑아 갔다.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재생 주사기를 쓰면 어쩌나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한 시간 뒤 의사가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비지땀으로 계속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마치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의사는 분명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순간 마음이 놓였다. 의사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말라리아야."
"오 마이 가뜨!!!"

의사의 한 마디는 날 충격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무서운 병이 내 몸속에 퍼져 있었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지금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말라리아 아니던가. 그런데 말라리아도 모자라 문제가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의사는 목마름 증상이 설사로 인한 것일 수 있는데 일단 소변검사까지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오! 하느님.'

의사의 진단이 끝나고 간호사는 지독하게 아픈 주사를 한 대 더 놔주었다. 조지는 3일이면 완쾌된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날 안심시켰다.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눈을 감고 목 놓아 울부짖었다. 온통 집 생각뿐이었다. 조지는 이런 내가 안쓰러운지 "I know, I know"라고 답했다. 잠시 뒤 간호사가 와서는 샘플향수만한 크기의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오줌을 받아오라는 얘기였다. 도저히 내 소변 실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채뇨 병이었다.

소변검사결과 의사는 나쁜 음식을 먹고 박테리아인지 바이러스인지 때문에 배가 아픈 거라고 했다. 말라리아도 모자라 세균성 장염까지...

'아프리카 와서 몸이 만신창이가 나는구나. 휴~'

조지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를 나선 지 8시간 만에 다시 골방에 몸을 누였다. 그리곤 3일을 앓았다. 침대 하나 덜렁 있는 탄자니아 모시의 작디작은 여행자 숙소는 외로움에 몸서리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가끔 조지와 리셉션 직원이 내 상태를 체크한다고 방문을 두드렸다.

리셉션 직원은 숙소에서 송장을 치르는 게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발병 3일째 아침. 독한 약을 견디다 못해 구역질이 올라왔다. 말라리아도 약도 독했지만 난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구토를 하고 나니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여행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킬리만자로 앞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빈대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곳. 친구들이 있는 곳. 우리 집 진돗개가 있는 집에 가고 싶었다. 이번 여행 최대 위기였다.

"나 돌아갈래~!"
여행 정보

말라리아는 모기에 의해 감염되며 증상은 몸살감기와 비슷해 감기로 착각할 수 있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사망률이 높아진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보다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말라리아 약이 나오기 전까지는 모기 한 마리 앞에서 벌벌 떨어야 했던 게 인간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목숨을 잃어 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말라리아 예방백신이 없다는 게 문제다. 예방약은 있으나 위험지역에 가기 전 일주일 전부터 복용해야 하고 갔다 와서도 일정 기간 약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발병을 100% 막아주는 것도 아니다. 독한 성분 탓에 간에 부담을 많이 줄뿐더러 탈모 등의 부작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탄자니아 여행 ⓒ 김동우
[이야기 2] 이를 악물다

말라리아 발병 3일째 저녁이었다. 가벼운 거동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컨디션은 많이 회복돼 있었다.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영국 신사 알렉스였다. 그는 내 병세를 묻고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영국 친구들 대부분이 신사적이고 따뜻했다. 확실히 미국인과는 달랐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사 내내 알렉스는 북한에 대해 물었다. 안 그래도 영어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데 현재 컨디션으로는 어려운 주제였다.

"플리즈 알렉스~"

가볍지 않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 중 하나로 생각했다.

다음날 짐을 챙겼다. 감옥같이 답답한 숙소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병자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돈을 더 쓰더라도 휴식에 적합한 환경이 필요했다. 숙소 직원은 아픈데 어딜 가냐며 놀라는 눈치였다. 차마 숙소를 옮긴다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고 돌아서려 하는데, 여직원은 체크아웃시간이 지났다며 하루치 방값을 더 내야 한다고 했다. 역시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난 낮 12시가 체크아웃 시간인 줄 알았고 여직원은 오전 10시가 체크아웃 시간이라고 했다. 아픈 와중에도 내 방문을 두들기며 방값을 받으러 오는 인간들이었다. 오죽하겠는가. 순간 하루 더 있다가 다음날 숙소를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관처럼 비좁은 방을 생각하니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속에선 여러 말이 튀어나왔지만 컨디션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갑을 꺼내 방값을 내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모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숙소 YMCA에 오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레스토랑과 수영장이 있는 환경은 놀고먹기 안성맞춤이었다. 무엇보다 방의 크기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격차를 보였다.

짐을 풀고 조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를 통해 킬리만자로를 오르든 그렇지 않든 한 번은 꼭 봐야 했다. 병원에 갔을 때 조지가 대신 낸 병원비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숙소를 나왔으니 조지가 이 사실을 알면 내가 '대낮도주'를 한 걸로 생각할게 뻔했다. 생각만 해도 개운치 않은 상황이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그새 조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돈을 건넸다.

그 후 '와신상담'하며 4일을 더 놀고먹었다. 저 멀리 보이는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며 먹고 자고, 자고 먹으며 체력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식욕이 없었지만 억지로 입속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오기였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와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에 도전해 보는 게 이번 여행 중 가장 큰 목표이자 도전이었다. 이 두 산이 아니었다면 평상시 쓰지도 않는 각종 트레킹 장비를 힘겹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킬리만자로가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난 올라야 했다. 그래야만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여행 정보

스와힐리어로 '번쩍이는 산'을 뜻하는 킬리만자로는 오세아니아 칼스텐츠(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아의 경계, 4884m), 북아메리카 매킨리(미국 알래스카, 6195m), 유럽 엘부르즈(러시아, 5642m), 남극 빈슨 매시프(남극대륙, 4897m), 아시아 에베레스트(네팔, 8848m), 남아메리카 아콩카구아(아르헨티나, 6959m)와 더불어 대륙별 최고봉 중 하나다.

킬리만자로는 5895m의 키보, 5149m의 마웬지, 4006m의 쉬라 등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킬리만자로의 실제 등정 성공률은 50% 미만이며 일정이 길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두통 등의 고산증을 겪는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현지에서는 한국인의 등정 성공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태그:#킬리만자로, #아프리카여행,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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