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은 없다>의 완성도가 못내 아쉽다.

영화 <비밀은 없다>의 완성도가 못내 아쉽다. ⓒ CJ엔터테인먼트


지난 23일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우선 이경미 감독이 7년 만에 연출한 신작 영화다. 안면홍조로 고생하는 양미숙(공효진 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무후무한 캐릭터였기에 오래도록 회자됐다. 이경미 감독이 오랜만에 또 다른 여자 주인공 연홍(손예진 분)을 앞세워 '스릴러'로 돌아왔다고 했을 때, <미쓰 홍당무>의 세계가 7년 간의 숙성 과정을 거쳐 어떻게 변화됐을지 기대했다.

여기에 결혼을 한 번 더 하겠다는 아내에게 차라리 별을 따달라고 요구하라며 무기력한 호소를 하던 <아내가 결혼했다>의 김주혁이 손예진의 상대역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후 다시 부부로 만난 김주혁, 손예진 커플이 이번에는 어떤 기막힌 인연을 보여줄까도 관심의 대상이 됐다.

다시 돌아온 이경미, 이번엔 양미숙 대신 연홍?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었던 김주혁, 손예진 부부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순탄치 않은 결혼을 했다. 두 배우는 사랑의 독점을 두고 승강이를 벌이던 풋풋한 부부(<아내가 결혼했다>)에서, 8년 후 딸을 둔 중년 부부(<비밀은 없다>)로 등장한다. 이들은 앵커 출신의 소장파 정치인으로 지역색이 강한 도시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젊은 후보 종찬(김주혁 분)과, 그 지역 사람들이 배척하는 지역 출신 아내로 물심양면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아내 연홍(손예진 분)으로 돌아왔다.

국회의원 투표를 15일을 앞둔 어느 날, 종찬의 참모들로 분주한 종찬의 집. 아내 연홍은 아침부터 김밥을 싸느라 딸 민진과 눈을 맞출 새도 없다. 그런 엄마의 분주함을 이해한다는 듯 민진은 친구와 함께 숙제를 하고 오겠다고 하고. 엄마는 못 미더운 듯 친구의 전화번호를 남기라 하며 딸 입에 김밥 하나를 넣어준다. 이것이 딸과 엄마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남편의 당선을 위해, 불리한 자신의 출신지까지 감수하며 선거 운동에 매달렸던 아내는 딸의 실종으로 가속도를 내던 선거의 리듬에서 튕겨져 나온다. 제아무리 남편의 선거가 중요하다 해도, 부모에게 피붙이보다 더한 존재가 있으랴. 그런데 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연홍과 달리, 아버지인 남편의 태도가 이상하다. 그는 아버지의 자리보다 정치인의 자리가 우선인 듯하다.

영화는 정치인 종찬의 선거 운동과 딸의 실종, 한국 정치의 지역색,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타 지역 출신의 정치인 아내 연홍의 모습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다. 딸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당황스러워하는 엄마 연홍과 냉혹한 정치인의 면모를 보인 아빠 종찬의 모습은 이 부부 관계의 파멸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스릴러의 개연성 대신 연홍이라는 캐릭터의 폭주

 <비밀은 없다> 속 연홍(손예진)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또 하나의 영화적 즐거움이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 속 연홍(손예진)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또 하나의 영화적 즐거움이다. 하지만 ⓒ CJ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영화가 스릴러로서 개연성을 쌓아가는 건 거기까지다. 영화는 선거에 끝까지 임하겠다는 종찬에 배신감을 느끼며 홀로 딸을 찾아 나서는 연홍을 보여준다. 딸을 찾아 나서느라 산발이 된 연홍의 머리카락, 이를 통해 영화는 연홍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드러내지만, 그녀의 상태만큼 영화 또한 혼란스러워진다.

이경미 감독의 전작 <미쓰 홍당무>가 기괴한, 혹은 기발한 캐릭터인 양미숙을 통해 그녀의 '짝사랑 사수 작전'을 설명해내듯, <비밀은 없다>에서도 현모양처 연홍의 이면과 폭주를 통해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정치인 종찬이 처한 선거와 그를 둘러싼 정치판, 강고한 지역색의 압박을 드러내는 듯 싶다가, 딸의 친구라기엔 어딘지 수상쩍은 최미옥(김소희 분), 그를 통해 살짝살짝 드러난 딸의 이면을 보여주다가도, 곧 맹목적 모정의 폭주에 집중한다. 그 폭주의 절정에서 무당의 서슬 퍼런 칼춤 아래 초점을 잃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투리로 속내를 털어놓는 연홍. 정치인인 남편을 따라 낯선 지역으로 이사 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아내 연홍. 정치인의 아내로 살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덮은 채 현모양처로 포장해왔지만, 알고 보면 딸 못지않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엄마 연홍. 이 연홍이라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딸을 잃은 모정의 질주를 설명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예진이란 배우를 통해 드러난 또 하나의 신선한 캐릭터 연홍은, 스릴러 장르로서의 <비밀은 없다>와 충돌한다. 영화 초반, 딸의 실종 스릴러로 시작한 영화는 중반 이후 모정의 질주를 통해, 딸을 잃은 엄마의 절망을 호소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스릴러물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안긴다. 차라리 연홍의 정신없는 폭주 대신 차곡차곡 침착하게 스릴러로 개연성을 쌓았다면 꽤 설득력 있는 장르물이 됐을 것이다. <비밀은 없다>는 감독 이경미의 스타일에 대한 천착으로 개연성 대신 기괴한 분위기를 남긴다.

영화가 다시 스릴러로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건 후반부 미옥의 속내가 드러나면서부터다. 미옥의 속내가 드러나고, 엄마의 복수가 진행된다. <비밀은 없다>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보는 관객은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엄마인 연홍의 혼돈과 불안, 그리고 배신감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정체가 모호했던 미옥의 속내가 갑자기 드러난 이유와, 정치인 종찬 캐릭터는 단편적으로 다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 분위기를 잡았던 '지방색'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아이러니는 그저 정치인 종찬의 당선을 위한 소모품으로 소비된다.

이경미 감독에겐 양미숙을 뛰어넘을 또 하나의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 숙제였을까? <비밀은 없다>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독자적 분투를 하는 연홍의 모성으로 스릴러 장르로서 차곡차곡 쌓인 개연성을 기대하는 관객들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안타깝게도 <미쓰 홍당무>처럼 캐릭터로 '퉁치기'엔 묵직하고 불친절한 스릴러였다. 초반에 벌인 판과, 후반부 해결 방식 등 매력적인 요소는 분명하지만 7년의 장고가 안타깝다. 조금 더 관객들과 호흡할 가능성이 있었던 <비밀은 없다>가 그래서 더 아쉽다.

 <비밀은 없다>에 조금 더 개연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비밀은 없다>에 조금 더 개연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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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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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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