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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까말까
 갈까말까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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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젖은 수건처럼 무거웠다. 축 늘어진 공기는 게으르게 떠다니다 등위로 철썩철썩 달라붙기를 반복했다. 창문을 뻔뻔하게 넘나들어 하얀 먼지를 일렁이는 햇살은 분명 정오의 것이었다. 샤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다시 잠이 들었다. 묵직한 공기에 숨이 막혀 눈을 떴다.

새로 산 스케치북같이 넓고 반듯한 더스틴의 이마 위로 불쾌한 꿈을 꾸는 이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손을 뻗어 휘적이니 에어컨 리모컨이 걸려들었다. 어리광처럼 등에 매달려있던 습기 대신 퀴퀴한 에어컨 공기가 들이닥쳤다.

다시 선잠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화장실로 가 변기통 위에 몸을 맡겼다. 멍하니 앉아 화장실 타일 사이의 거뭇한 물때와 세탁기 사이에 낀 먼지를 들여다봤다. 샤워를 할까 하다 그만두고 손을 씻었다. 하얀 얼룩이 진 거울 위로 군만두처럼 기름지고 찐만두처럼 부어오른 토요일 낮 12시의 얼굴이 비쳤다.

더스틴은 자신을 괴롭히는 습기와 더위에 항복했다는 듯 두 팔을 쳐든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어이 이봐, 우리 너무 루저스러운 거 아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내내 기다려온 토요일 오후 풍경이 고작 이따위라니. 또 그 소리네. 그래, 루저라면 루저일 수 있지. 반박은 못 하겠다. 더스틴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나의 자책이 지루하다는 듯 아이팟을 만지작거리며 팟캐스트를 골랐다.

그래. 반박은 못 하겠다. 나는 프레임 없는 매트리스 위로 뛰어들었다. 잠시 머리가 어질, 하더니 천장이 빙빙 돌았다. 천장 위로 난 얼룩 자국이 오른쪽으로 빙, 빙빙 빙.

루저. 루저인가.

루저라는 생각은 천장에 난 곰팡이가 슬그머니 자라나듯 옆으로, 옆으로 퍼져 내 옷을, 신발을, 피부를, 어제와 오늘을 잠식했다. 으이그, 이 루저들. 서른이 넘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반지하 월세방에 직장은 계약직에 통장잔고는 밑바닥에 미래는 무계획에. 고약하게 잔소리를 해대는 엄마의 심정이 된 나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작정하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 건데? 평생 정규직 자리 한 번 얻을 수 있겠어? 못해도 전세는 구해야 할 텐데. 깝깝하다 깝깝해.

으이그, 이 루저들. 루저래요 루저. …. 근데, 그래서 뭐?

느닷없는 반박에 머릿속 엄마의 잔소리가 한풀 꺾였다. 며칠 전 맥주를 마시며 나눴던 더스틴과의 대화가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월세 내고 사는 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밥값 나가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닌가? 밥값이나 교통비처럼 살기 위해 써야 하는 그런 돈. 정규직 되는 게 그렇게 중요해? 무슨 일을 하고 뭘 배우고 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야? 통장 잔액은 그래,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굶어 죽기야 하겠어? 돈 없다고 죽진 않아. 하긴 그렇지. 엄마 아빠도 그런데 뭘. 노후 준비 하나 된 거 없어도 그럭저럭 살고 있는 걸.

"뭔 생각해?"
"어? …. 어. 아무것도 아님."

머릿속으로 바삐 엄마와 더스틴 사이의 논쟁을 주도하느라 정작 옆에 앉아있는 더스틴은 끼어들 틈이 없다. 어쨌든 오늘은 더스틴의 승. 그래, 월세가 어때서! 정규직 따위가 뭐가 중요해! 돈은 살만큼 충분히 있어!

으음.

더스틴의 도움으로(?) 머릿속 엄마와의 논쟁에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뒀음에도 기분은 찐득하게 달라붙은 공기처럼 영 상쾌하지가 않다. 오늘따라 나를 등지고 앉은 더스틴의 동그랗게 말린 등짝이 유난히도 얄밉다. 뭐야 이 불쾌한 기분은. 따져보면 루저이긴 해도 난 나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여름 장마철이면 곰팡이가 펴서 수 벌의 옷을 버려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숨 막히는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월세에 비해 평수가 넓고 작은 텃밭이 딸려있다는 장점 때문에 나 스스로 선택한 집. 계약직이긴 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배우는 것도 있는 게 사실인 회사일. 통장 잔액은 늘 아슬아슬하지만 그건 더스틴과 나 둘 다 돈 벌기를 그만두고 긴 여행을 다녀온 자발적 선택의 결과이고, 그 선택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으니 불만도 없음. 서른 넘은 나이에 아직도 자아와 적성을 찾아 헤매는 중학생 놀이를 하고 있지만, 꿋꿋이 내 멋대로 살고 있다는 건 나름대로 마음에 듦.

그래. 모든 게 다 나름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인데. 고장난 로봇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머리에 염색이나 할까. 아주 짧게 잘라볼까.

"우리 여행갈까?"

더스틴의 오른쪽 귀에 달린 이어폰을 잡아 뺐다. 하얗고 작은 스피커가 꽂혀있던 더스틴의 귓구멍으로 다시 한 번 나의 단어들을 새겨넣었다. 여, 행. 어디, 오사카?

길고 쓸데없고 고달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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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여행 말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긴 여행. 길고 쓸데없고 고달픈 여행."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긴 여행. 길고 쓸데없고 고달픈 여행. 고장 난 로봇의 여행. 고장나고 녹슬고 좀처럼 말을 들어 먹지 않는 깡통 로봇이 되어가는 여행. 완벽한 로봇보다는 고장난 로봇이 애착이 가잖아. 키보드에서 p를 누르면 세미콜론이 함께 써지는 내 컴퓨터처럼.

잘 모르겠다. 나는 좀 더 견고하고 빈틈없는 훌륭한 사회인이 되고 싶은 걸까, 어설퍼도 나름대로의 나이고 싶은 걸까. 엄마의 말을 따를 텐가, 더스틴과 함께 반발할 텐가. 이제 결정을 해야 할 때인데.

이제 서른이니까. 아니, 서른하나니까.

정규직원인가? 배우자의 직업은 탄탄한가? 본인 소유의 집이 있는가? 자가용이 있는가? 20평대 이상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가? 이런 조건들을 하나둘 차근차근 채워나가고 싶다면, 앞서가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결정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분발해서 뒤돌아보지 않고, 옆도 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직선의 길을 걸어야 한다. 매일 오전 8시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고, 봄이면 연간 계획을 짜고 여름이면 사업을 하고 가을이면 출장을 가고 겨울이면 정산을 해야 한다. 회사 선배의 말처럼 이젠 정말 나이를 생각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니까, 서른이 넘은 여자니까, 게다가 기혼이니까, 앞으로의 기회는 점점 더 적어질 것이다. 뭐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허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어설퍼도 나름의 나이고 싶다면. 나름의 나라는 게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투명한 실체에 조금이라도, 더디게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거야말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될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라면, 머리를 염색하는 것 따위로는 그 무한한 반복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금요일 퇴근 후 맥주 한두 잔을 마시는 것 가지고는 켜켜이 감춰진 속 안의 갈망을 결코 꺼내 놓지 못할 것이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오전 8시 반이면 지하철 2호선 2-1칸에 밀어 넣어진 채 얼굴도, 체취도, 표정도 없는 무색무취의 덩어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조직적이고 견고한 사회에 살면서도 나 자신일 수 있겠지만, 그건 매일매일의 치열한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투쟁이 없다면 내 삶은 점점 더 견고해지고 일반화될 것이며 30대 여성, 기혼자, 직장인 따위의 설문지 체크 항목의 뭉뚱그려진 단어 몇 가지로 이루어진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나름의 나에 가까워지는 여정을 택한다면 나는 다시는, 조건을 하나둘 채워나가는 직선의 길로 되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선택해야 할 때다. 이제, 서른하나니까.

 다시 이렇게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다. 이제, 서른하나니까.
 다시 이렇게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다. 이제, 서른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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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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