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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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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스스로 별칭을 '빅풋(BigFoot) 부부'라고 붙였습니다. 실제 두 사람 모두 '큰 발'은 아니지만, 동네 골목부터 세상 곳곳을 걸어 다니며 여행하기를 좋아해 그리 이름을 붙였지요. 내 작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새로움을 발견하는 거대한 발자국이 된다고 믿으며 우리 부부는 세상 곳곳을 우리만의 걸음으로 여행합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만든 여행 영상도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 기자 말

말라가에 머물며 장대한 종유동굴이 유명한 네르하(Nerja)와 또 하나의 하얀 마을 프리힐리아나(Frigiliana)를 다녀온 다음날, 우린 론다(Ronda)로 향했습니다. 스페인 여행을 하는 많은 이들이 꼬불꼬불 산길 길을 달려 해발 700m 고지의 암벽 위에 자리한 론다를 빼놓지 않고 들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100m 깊이의 아찔한 계곡에 걸쳐져 있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의 장관을 보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파라도르(Parador)에 숙소를 잡은 이들은 성을 개조해 만든 멋진 호텔에서 묵으며 그 누에보 다리의 절경을 여유롭게 보기 위해서일 겁니다. 우리 부부가 론다를 찾은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론다의 파라도르에서 바라본 누에보 다리 많은 여행자들이 이 경치를 보기 위해 론다를 찾는다. ⓒ 박성경
스페인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하는 여러 조언들 중에는 '파라도르에서 꼭 한 번 묵어보라'는 말이 빠지지 않습니다. 파라도르(Parador)란 스페인 정부에서 수도원이나 고성, 궁전 같은 역사적인 건물을 개조해 운영하는 고급 숙박시설을 말합니다. 특히 론다의 파라도르는 론다에서 가장 유명한 누에보 다리가 있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어, 스페인의 파라도르 중에서도 인기순위 1, 2위를 다투는 곳이지요. 헤밍웨이가 묵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부부도 스페인 여행 중에 꼭 한 번은 파라도르에서 묵어보자는 결심을 했고, 그곳을 론다로 정했습니다. 비수기인 겨울에 여행하면 좋은 점, 여행을 일찍 준비하면 좋은 점 중 하나가 호텔을 저렴하게 예약할 수 있다는 거겠죠. 론다에서 그 장점이 제대로 발휘됐는데요, 파라도르의 전망 좋은 더블 룸이 100유로(한화 13만 원 정도)!

파라도르에 도착한 우리는 습관처럼 "좋은 방으로 주세요, 경관이 멋진 곳으로요~"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묵을 방은 배정돼 있겠지만, 우린 그래도 꼭 그렇게 말해봅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습관적으로 "우리 호텔의 모든 방이 다 좋아요~" 합니다. 그런데 론다의 파라도르 직원 반응은 좀 달랐어요.

"정말 좋은 방으로 드렸어요. 정말 멋진 방이에요!"

그 말을 듣고도 기간 한정 행사가격에 나온 방이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니 정말, 바라던 그대로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방도 널찍하고 앤티크한 가구 장식도 멋졌으며 방만큼이나 넓은 테라스에 선탠을 위한 베드까지 갖춰져 있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방에 딸린 그 테라스 끝에 서니 론다의 절경, 누에보 다리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멋진 풍경으로 펼쳐졌습니다.
알라메다 델 타호(Alameda del Tajo) 전망대 여기서 보는 론다의 풍경도 멋지지만 하프 선율에 맞춘 거리 음악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따스한 햇살이 어우러져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 박성경
론다를 방문하는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한결 여유로워진 걸음으로 파라도르를 나섰습니다. 알라메다 델 타호(Alameda del Tajo) 전망대에 서니, 700m 고지에서 내려보는 자연의 절경이 눈으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성큼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거기에 하프 선율에 맞춘 거리 음악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따스한 햇살까지 어우러져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풍경을 이뤄냈지요.

론다는 근대 투우의 발상지로도 유명합니다. 원래 투우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경기를 했던 데서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투우의 모습이 시작된 게 바로 론다에서였다고 합니다. 그 중심에는 대대로 유명한 투우사를 배출한 로메로 가문이 있었죠.
론다의 투우장 근대 투우의 발상지로 유명한 론다의 이 투우장은 1785년 지어진 것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 박성경
론타의 투우장 136개의 기둥이 투우장 내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고 무려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 박성경
론다의 신시가지에 서 있는 이 거대한 투우장은 1785년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입니다. 136개의 기둥이 투우장 내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고 무려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는데요, 과거 내로라하는 투우사들은 이 론다 투우장에 한 번 서보는 것이 평생의 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투우 경기가 열리진 않고 관광용으로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둥근 투우장의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내부 박물관에는 투우사들의 의상과 사진 등 론다 투우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돼 있고, 투우를 소재로 한 고야의 판화작품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투우장이란 게 거기서 거기라 생각할 수도 있고 투우를 관람하지 않으면 뭐 볼 게 있을까 싶지만, 론다의 투우장은 그저 박물관으로도 볼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투우장의 중심에 서니 론다 투우의 지난 역사와 함성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대는 흥미로운 곳이었습니다.
론다 투우장 내부 박물관 론다 투우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돼 있고, 투우를 소재로 한 고야의 판화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 박성경
우리 부부의 다음 행선지는 그 많던 론다의 다국적 관광객들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관광객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던 '모로 왕의 집(Casa del Rey Moro)'. 내부로 첫 발을 딛고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가 떠올랐어요. 볼 게 없어 관광객이 없는지 관광객이 없어 제대로 볼거리를 갖춰놓지 않는 것인지 정말 모를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입구엔 떡하니 입장료를 받고 표를 파는 직원이 있고 입장료가 싸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보라고는 18세기 아랍인들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저택으로 강으로 내려가는 365개의 계단이 있다는 게 전부. 첫 느낌은 정말 폐허 같았습니다. 정원도 제대로 가꿔지지 않았고 저택이라 이름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폐건물만이 입장도 불가능인 상태로 서 있었죠. 그래도 위로가 됐던 건, 강으로 내려가는 길이 표시돼 있고 간간이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는 겁니다.
모로 왕의 집(Casa del Rey Moro) 18세기 아랍인들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저택인데, 우리 부부가 방문했을 때 건물은 폐허 수준이었다. ⓒ 박성경
모로 왕의 집(Casa del Rey Moro) 365개 계단을 내려가면 수 세기 전 누군가 숨겨놓은 아지트 같은 계곡이 나타난다. ⓒ 박성경
둘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내려가지 못했을 정도로 축축하고 캄캄하며 괴기스러움 마저 자아내던 길은 놀랍게도, 정말 초록빛 강물로 연결됐고 신비로운 계곡 풍경을 선사했습니다. 수 세기 전 누군가 숨겨놓은 아지트를 찾아낸 것 같은 가슴 떨림이 있었고, 이곳에 선 관광객이 몇이나 있었을까 싶어 자부심마저 들었습니다.

멋모르고 내려갔던 365계단을 올라 나오려니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폐허 같은 정원으로 고개를 밀고 나서야 이 장소가 지닌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모로 왕의 집은 울타리 안 낡은 건물이나 몇몇 정원수를 보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담 너머 아기자기한 마을 전경과 부드럽게 이어진 길들, 드넓게 펼쳐진 평야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보고 가슴 가득 안고 가라고 '모로 왕의 집'은 자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모로 왕의 집 담 너머로 펼쳐진 풍경 확 트인 풍경이 비싼 입장료와 폐허같은 건물에서 느껴던 속상함을 보상해줬다. ⓒ 박성경
탁 트인 론다의 풍경은 모로 왕의 집을 나와서도 한참동안 우리를 따라옵니다. 남아메리카 인디언 모습이 이상야릇한 조각으로 꾸며졌다는 살바티에라 후작 궁전(Palacio del M.Salvatierra)의 정면이 흥미를 끌었지만 일단 그 모습만 보고 지나칩니다. 이어서 도착한 몬드라곤 궁전((Palacio de Mondragon)은 멋지게 장식된 궁전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장을 해봅니다.
살바티에라 후작 궁전(Palacio del M.Salvatierra)의 정면 이상야릇한 조각이란 평가도 있는데, 귀엽고 재미있는 모습이다. ⓒ 박성경
몬드라곤 궁전(Palacio de Mondragon)의 중정 이슬람식 모자이크와 석고 세공으로 꾸며진 중정은 원래 모습 그대로다. ⓒ 박성경
내부에 들어서니 궁전이라 하기에 규모는 작지만 구석구석 정성스런 손길이 닿아 꾸며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몬드라곤 궁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이베리아반도 재정복 전쟁(771년~1492년,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벌인 국토회복전쟁) 이후에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고 하는데, 아치가 있는 중정은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슬람식 모자이크와 석고 세공으로 꾸며진 작고 단아한 모습이 조용함과 편안함과 멋스러움을 한아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지붕에 얹은 기와가 우리 한옥의 모습과 닮아있어 정겨움까지 더해집니다.

그런데 이곳엔 살바티에라 후작 궁전의 정면보다 훨씬 이상야릇하고 기괴한 모습이 숨어있었습니다. 궁전 내부에 갑자기 동굴이 보이고 갖가지 자세의 유골들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툭툭 눈앞에 나타납니다. 배경음악까지 어둡게 깔려 두려운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부서진 토기나 도구들을 비롯해 고대 유물을 전시해놓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궁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런 유물들이 발굴돼 그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몬드라곤 궁전 내부에 전시된 옛 유적 중 일부 모습이다. ⓒ 박성경
지는 햇살을 받고 있는 론다의 누에보 다리 ⓒ 박성경
론다의 겨울 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즈음, 우리는 누에보 다리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전망대로 향합니다. 100m 높이의 타호 계곡 아래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계곡물과 아찔하게 걸려있는 누에보 다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지는 햇살을 받아 구석구석 숨겨놓은 아름다움까지 모두 내놓고 있는 론다의 풍경을 보며 우리는 하루 여행을 마감합니다.

다음 날 아침, 론다는 안개 자욱한 모습입니다.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야 하는 짧은 일정이라 론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고 가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섭니다. 안개에 휩싸인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마치 중세시대의 론다 골목을 거니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론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었던 곳은 시청과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Iglesia Santa Maria la Mayor).

시청건물은 20세기에 개조돼 큰 의미가 없다 할 수 있지만, 구건물의 일부가 통합되어 있어 독특한 모습을 보입니다. 2층으로 된 아치가 정면에 있어 '시청'이란 말이 지니는 딱딱한 느낌을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론다의 시청 2층 아치가 특징적이다. ⓒ 박성경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Iglesia Santa Maria la Mayor) 15-16세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것으로 이슬람 사원 때의 철제 아치와 당시의 탑을 개조해 만든 종루가 남아있다. ⓒ 박성경
시청 건너편에 자리한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은 15~16세기에 걸쳐 지어진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것으로 이슬람 사원 때의 철제 아치와 당시의 탑을 개조해 만든 종루가 남아있습니다.

내부는 바로크와 고딕, 프라테레스코(Plataresque, 지중해 조형예술의 조화를 중시하면서 아랍 영향을 받아 섬세한 장식을 뽐낸다)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섞여 있답니다. 어려운 건축 양식은 잘 몰라도 화려하고 섬세한 제단과 성가대석,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소 성당들은 조용히 둘러보기 딱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성당 내부에는 우리 부부의 눈길을 사로잡은 부조가 있었는데요, 성서의 장면들을 정말 인상적으로 새겨놓았습니다. 극적인 묘사에, 정말 표현이 뛰어난 부조였어요. 획이 굵고 빠른 서체를 본 느낌이었다 할까요.

입장료가 좀 비싼 편이어서 처음엔 입장을 좀 망설이게 됐지만, 2층의 전시관을 비롯해 각종 성물과 섬세하게 필사된 중세시대의 성서, 성가 악보까지 박물관의 볼거리도 훌륭해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Iglesia Santa Maria la Mayor) 성서의 장면들을 극적인 표현으로 조각해놓은 조각이 인상적이다. ⓒ 박성경
스페인 광장에서 노화가가 론다의 풍경을 조용히 화폭에 그려넣고 있다. ⓒ 박성경
다시 누에보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넘어온 우리 부부. 우리는 파라도르 앞 스페인 광장에 앉아 론다를 떠나기 전 남은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론다의 아름다움을 조용히 화폭에 담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이고, 장난감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발을 구르는 아이가 보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웃음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론다의 풍경 속에 '우리'도 있음이 보입니다.

*론다의 아름다운 풍경, 역사 깊은 장소들을 두루 여행한 우리 부부의 여정이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태그:#스페인 여행, #론다, #부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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