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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없는 국토종단 준비물
 끝 없는 국토종단 준비물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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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슬리퍼'라고 받아적은 후 지금까지 적은 목록을 다시 읽어봤다. 내복. 초경량 잠바. 등산화. 지퍼백. 텐트. 세면도구.

"병따개도 적어. 맥주를 따야지."

'병따개'에 밑줄을 치고 옆에 별표까지 쳤다. 더스틴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낄낄댔다. 2014년의 한때는 국토종단 여행에 가지고 갈 물건들의 목록을 적으며 철없이 웃어 젖히는 여름밤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그렇게 적어본 준비물은 다음과 같다.

트레킹화. 걷는 게 목적이자 수단인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다. 텐트. 숙소를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비상용품이지만 예산 절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배낭. 여행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담을,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30L짜리 도이터 배낭을 가지고 간다. 보조가방. 필요할 때 금방금방 꺼내 써야 하는, 예를 들어 휴지나 볼펜, 카메라 따위의 물건을 담는 용도다. 카메라나 노트북 같은 비교적 값나가는 물건 또한 보조가방에 담는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배낭은 버리고 보조가방만 들고 튄다는 치밀한 계획대로 행동한다. 그 밖에 땀 증발이 잘 되는 기능성 셔츠와 속옷, 슬리퍼, 캠핑용 조리도구, 에너지바 따위의 비상식량, 나침판, 플래시 라이트, 헤드랜턴….

국토종단 여행 짐 싸기란 수학여행 준비물 목록을 보고 챙기면 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꽤 완성도 높은 준비물 목록을 적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필요할 것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 어제는 마트에서 스파게티 면을 사다가, 오늘은 회사에서 스캔을 뜨다가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목록을 추가하고 다시 빼며 수정하는 데에 일주일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죽여도 죽여도 새어 나오는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튀어나오는 물건의 목록을 추가하고 삭제하며 수정하는 동시에 물건을 구매하고 환불하고 교환하는 무한의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두 달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더스틴은 맡고 있던 수업을 모두 정리했다. 시간이 더 많아진 우리는 동대문 등산용품점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리스트에 적힌 항목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노트 위에 적힌 까만 단어로만 존재하던 물건의 목록들이 실물이 되어 노란 방바닥 위에 늘어졌다. 퇴직 선물로 받은 트레킹화. 엄마 옷장에서 빼낸 핑크색 등산 모자. 비가 올 경우 짐을 보호하기 위해 돈깨나 들여 산 애벌레 색 우비. 등산용 양말 세 켤레. 속옷 세 벌. 발열 내의 한 벌. 바람막이 잠바. 슬리퍼. 30만 원을 웃도는 가격상의 부담 때문에 울트라 라이트는 포기하고 9만 원이라는 가격에 만족해서 산 라이트 텐트. 텐트 리페어 키트. 침낭. 캠핑용 버너. 휴대용 가스. 캠핑용 냄비 겸용 컵. 스푼과 포크가 함께 달렸다는 이유로 무려 만 원이나 주고 산 스포크. 접이식 컵 두 개. 호루라기 딸린 나침판. 정수 기능이 달린 물통. 측량 비율이 터무니없이 큰 대한민국전도. 에너지바 네 개. 태국 여행을 다녀온 직장 동료가 선물로 준 튜브에 담긴 꿀. 닭가슴살 캔 두 개. 육포. 커피 티백.

끝이 아니다. 인간 하나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는 자질구레하고 무거운 물건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 한 달용 렌즈, 렌즈 세척액, 안경케이스, 머리빗, 생리대, 휴대용 티슈, 선크림, 로션, 샴푸, 린스, 바디샴푸, 세안 비누, 칫솔, 치약, 수건. 모기퇴치 스프레이와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 상처용 연고, 밴드, 근육통에 쓸 파스와 연고, 땀띠 방지용 베이비 파우더, 물집방지대, 상처용 거즈, 알레르기 치료제, 정제수.

이쯤이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짐은 갖춰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둘 순 없다.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의식주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국토종단이라는 쓸데없는 짓을 하기로 작정한 우리라도 말이다.

물론 밥 먹고 자는 게 제일 급하고 중요하지만 책도 읽어야 하고 일기도 써야 한다. 무거운 책을 여러 권 가져가는 대신 독서는 태블릿 PC를 이용하기로 했다. 일기는 노트북으로 쓸 테지만 만약을 대비해 공책도 두 권 챙겼다. 인터넷 검색과 내비게이션, 카메라, 경로 기록, MP3가 되어줄 아이폰에는 무제한 데이터 플랜을 달았다. 이어폰 세 벌과 포터블 충전기 두 개, 휴대용 스피커도 챙겼다. 이런저런 전자기기용 충전 케이블만 다섯 개다. 국토종단 예산과 경비, 경로 정보 등을 적어 놓은 다이어리 한 권만 해도 무게가 꽤 나간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더스틴을 위해 그림용 펜과 색연필, 컬러 펜 세트, 워터컬러 붓 하나, 스케치 노트 두 권도 챙겼다.

쓸모있어 보이지만 사실 딱히 없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은 물건, 당장은 쓸모가 없겠지만 언젠가는 꼭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물건들로 30L들이 배낭이 가득 채워졌다. 뚱뚱해진 배낭은 막 전학 온 학생처럼 방 한구석에 꼿꼿이 선 채 불편하고 어색하게 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나의 짐이자 집이자 '웬수'이자 모든 것이 될, 여행 가방.

이 여행은 모든 걸 바꿔줄 거니까...

"논에서 일해보기."
"네가? 잘도."
"아 왜?"
"아 알았어 알았어. 일단 적는다. 논에서 일해본다. 나는…. 할머니들과 수다를 떤다."
"고기잡이배를 탄다."
"뭐? 흠…. 그럼 난. 감자를 캔다."
"닭을 잡아본다."
"정말? 진짜?"
"내 오래된 생각이야. 도시에서 먹는 음식은 너무 추상적이야. 치킨을 먹고 있는데 내가 먹는 이 치킨과 닭볏을 달고 있는 저 치킨이 연결이 안 되는 거지. 내가 먹는 게 뭔지, 나 자신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얼씨구. 짐 목록을 적은 노트 뒷장엔 국토종단을 하는 동안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적었다. 목록은 꽤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낯선 이의 대문을 두드려 하룻밤 잘 곳을 구한다. (우리같이 수줍은 인간들이?) 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마을 사람들을 도와 추수를 한다. (우리같이 게으른 인간들이?)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가 새벽 낚시를 한다. (우리같이 겁 많은 인간들이?) 우리는 가수나 우주비행사 따위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유치원생들처럼 다가올 미래와 약속된 여행이 주는 환상의 세계에 취해 있었다. 이 여행은 모든 걸 바꿔줄 거니까.

이 여행이라면, 일상은 지루하지 않고 늘 새로울 것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배려 깊을 것이다. 나와 더스틴은 뭉뚱그려진 집단으로서가 아닌 얼굴과 색채가 있는, 의지와 개성과 의견을 가진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게 우린 다시, 완벽한 인간으로의 요구에서 벗어난 제 나름의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직선으로 빠르게 따라가야 하는 굵고 단단한 선 같은 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외국인, 외국인과 결혼한 여자로 규정지어지는 다름 너머의 동등한 인간으로 이해될 것이다.

침대에 모로 누운 더스틴의 짙은 눈썹 사이로 두 개의 굵은 선이 그려졌다. 나는 눈썹 사이를 다리듯 살살 만졌다. 넌 이방인. 잠시 살다 떠날 사람. '우리'가 일궈 놓은 경제에 감사해야 할 사람. 김치를 좋아하면 기특한 사람. 하지만 아무리 기특해도 절대 '우리' 안의 울타리에는 들어올 수 없는 사람. 이제 달라질 거야. 이 여행은 모든 걸 바꿔 놓을 테니까. 넌 받아들여질 거야. 굳이 이 땅의 끝과 끝을 걸어서 여행하는 진심을 보인다면, '우리'도 마음을 열거야.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그리고 그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나의 짐이자 집이자 웬수이자 모든 것이 될, 여행 가방.
 나의 짐이자 집이자 웬수이자 모든 것이 될, 여행 가방.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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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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