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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수 막걸리를 맛봤다. 이것은 마치 숨을 쉬면서, 처음으로 내가 사는 동네의 공기를 의식적으로 들이켜는 것과 다름 없는 행위였다. 적어도 서울에서는 그렇다. 서울의 어느 음식점을 가든, 장수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그냥 막걸리를 달라고 하면, 장수 막걸리가 나온다. 서울 음식점에서 막걸리의 선택권은 거의 없다. 서울 식당을 진로 참이슬이 점령하고 있듯이, 장수 막걸리가 점령하고 있다. 진로 참이슬이 전체 소주 소비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장수 막걸리가 전체 막걸리 소비량의 절반을 육박하는 이유는 수도권에 전 국민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맛있음과 맛없음으로 갈리는 소비량이 아니다. 서울 사람이 서울 땅을 딛고 사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현실이다.

지역을 주름잡고 있는 막걸리들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해 맛본 대도시 막걸리들.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해 맛본 대도시 막걸리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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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말은 전라도말이나 경상도말과 부딪쳤을 때 그 특징이 살아난다. 술맛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서울 장수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서 지방의 맹주 격인 막걸리를 모아놓고 막걸리학교에서 여럿이 함께 맛보기로 했다.

우선 지역 맹주로 군림하는 대표 막걸리 브랜드를 꼽아봤다. 서울 장수, 부산 생탁, 인천 소성주, 대구 불로, 울산 태화루, 광주 무등산 막걸리, 전주 막걸리, 대전 원막걸리, 제주 생막걸리를 꼽을 수 있다. 지역 연고를 갖고 있지 않지만 매출이 큰 국순당의 대박 막걸리를 여기에 추가했다.

이들 맹주 막걸리의 1년 매출은 서울 장수가 1000억 원이 넘고, 대박이 500억 원이 넘고, 부산 생탁, 대구 불로, 인천 소성주가 200억 원이 넘는다. 광주 무등산, 제주 생막걸리, 전주 막걸리, 대전 원막걸리는 50억 원을 넘나드는 제품군이다. 이렇게 모두 10종류를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대도시 맹주 막걸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지역 막걸리들을 파는 진승통상, 조은세상, 도원결의 등의 유통회사가 있지만, 이들도 맹주 막걸리는 모아놓고 팔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직접 연락하여 택배 주문을 시도했다. 하지만 제조장에서 소비자에게 직거래가 안 된다며, 지역 유통회사를 소개해줬다. 그런데 지역 대리점은 택배 시스템이 없고 단발성 주문에 시큰둥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 제주 쌀막걸리만이 서울에서 유통점을 통해서 살 수 있었고, 나머지는 막걸리학교에서 시음용으로 쓰려고 한다는 읍소를 한 뒤에야 택배로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냉매를 넣어 배달해주는 곳은 한 곳도 없어서, 유통 중에 술이 변할까봐 노심초사하며, 최소 물량인 20병이 든 한 상자씩 택배로 받았다. 그렇게 했지만 태화루 막걸리는 결국 주문처를 찾을 수 없어서, 무등산 막걸리는 배달 착오로 시음하기로 한 날에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다.       

장수-생탁-불로-소성주, 참 닮았네

서로 맛과 디자인이 닮은 장수, 생탁, 불로, 소성주 막걸리.
 서로 맛과 디자인이 닮은 장수, 생탁, 불로, 소성주 막걸리.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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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8개의 맹주 막걸리, 서울 장수, 국순당 대박, 인천 소성주, 부산 생탁, 대구 불로, 제주 생막걸리, 대전 원막걸리, 전주 막걸리를 모아 놓고 비교 시음을 했다.

막걸리의 색깔은 우유빛에 가까운 술과 쌀색이나 아이보리색에 가까운 색까지 차이가 났지만 흰색 톤은 엇비슷했다. 눈으로 보고, 잔을 흔들어 향을 맡고 맛을 봤을 때, 서울 장수, 부산 생탁, 대구 불로, 인천 소성주가 서로 향과 맛이 닮아있었다. 한 양조장에서 나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있었다.

이들은 탄산기포가 올라와 상쾌하고 청량하면서도, 알코올의 날카로움이 없고, 입안에서 달보드레하게 감돌다가 부담없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장수막걸리는 출고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름철이어서인지 탄산기도 단맛도 많이 빠져있어, 여느 때의 쏴아한 청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부산 생탁에서는 누룽지에서 느껴지는 구수한 맛이 돌았다. 인천 소성주는 탄산감이 강했지만, 맛이 묵직했다. 대구 불로는 튀는 맛이 없고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이들 맹주 막걸리 맛은, 옛날 텁텁하고 묵직한 막걸리 두 병에 사이다 1병을 섞은 듯이 맑아졌고 시원해졌고 청량해졌다. 그런데 이들 맹주 막걸리에서 똑같이 느껴지는 향기 하나는 물 젖은 광목천에서 올라오는 듯한 곰곰한 냄새였다.

그 냄새가 전혀 나지 않은 게 국순당 대박이었다. 대박 막걸리에서는 날 곡물의 향이 났는데, 함께 맛본 누군가가 치즈향이 난다고 외치자, 구수한 치즈향이 더 강하게 돌았다. 맛이란, 향이란 참 이상하다. 누군가 어떻다고 말하면, 그 말이 파문처럼 번진다. 숨어있는 맛, 미묘한 향을 찾아내려면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맛보아야 한다.

발효제의 차이, 향의 차이를 만들다

누룩이 다른 대박, 물엿류가 안들어간 제주와 전주막걸리, 단맛이 강한 대전 원막걸리
 누룩이 다른 대박, 물엿류가 안들어간 제주와 전주막걸리, 단맛이 강한 대전 원막걸리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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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개의 맹주 막걸리(장수, 생탁, 불로, 소성주)와 대박 막걸리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 젖은 광목천에서 나는 곰곰함과 치즈향의 차이는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차이는 발효제다. 4개의 맹주 막걸리에는 백국균을 사용한 쌀누룩이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올라온 향으로 여겨진다. 대박 막걸리에는 쌀누룩이 들어가지 않고, 개량된 라이조프스균이 들어간 발효제를 쓴다. 대박 막걸리의 치즈향은 소량 들어가는 누룩보다는, 효모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맛본 이들 중에서 제주 생막걸리가 호감이 가고 인상적이라는 이들이 많았다. 다른 맹주 막걸리에 견주었을 때 제주 막걸리는 거칠었고 쌉쓸한 맛까지 돌았다. 다른 맹주 막걸리가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라면, 제주 막걸리는 한라산 중간산 마을의 흙길이었다. 울퉁불퉁했지만, 휠씬 더 자연스러운 맛이었다.

앞서 4개의 맹주 막걸리와 제주 막걸리는 무엇이 다를까? 비교해 보았다. 감미료가 들어간 것은 똑같다. 다만 제주 막걸리에는 올리고당류의 물엿이 들어있지 않았다. 대도시 맹주 막걸리에 들어있는 당류로 이소말토올리고당, 전분당, 물엿들이 있다. 모든 전분이나 당을 액화시킨 상태로 발효 후반에 술덧에 들어가는데, 술맛을 매끄럽고 부드럽게 만들고, 안정된 후발효를 이끌어내서 탄산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 물엿류가 제주 막걸리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제주 막걸리처럼 거칠게 돌출된 맛이 전주 막걸리에서도 느껴졌다. 전주 삼천동, 서신동, 효자동 막걸리 골목을 주름잡고 있는 전주 막걸리에도 물엿이 들어있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대전 원막걸리의 맛은 가장 풍부하고 달았다. 대전은 한때 지역 맹주를 잃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원막걸리가 대전의 맹주로 올라섰다. 대전은 접근성이 좋고 지역성이 약해서, 사방에서 다양한 막걸리 제품들이 치고들어온다. 그곳에서 막강한 유통라인을 구축하면서 맹주로 올라선 원막걸리는, 단맛으로 내공을 강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재료 비율, 같은 균주 그리고 저렴한 원료 선택

부산 생탁 제조장, 노사 갈등이 벌어진 지 2년이 넘었는데도 해결 보지 못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회사는 모름지기 직원들을 만족스럽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음식에 정성이 담긴다.
 부산 생탁 제조장, 노사 갈등이 벌어진 지 2년이 넘었는데도 해결 보지 못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회사는 모름지기 직원들을 만족스럽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음식에 정성이 담긴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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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맹주 막걸리를 맛보면서, 서로 닮아있는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닮은 것일까? 소비자의 입맛을 쫓다보니까, 똑같은 길로 들어선 것일까?

막걸리 소비자들의 입맛은 철저히 제조자의 전략과 행정가의 정책에 이끌려왔다. 기호 식품으로서의 다양성을 누릴 겨를없이, 대도시 맹주 막걸리가 내놓는 단일한 술맛에 젖어서 살아왔다. 맹주 막걸리 회사들은 막걸리 판매 구역 제한이 풀리기 전인 2000년 12월 말까지 지역 독점을 할 수 있었기에, 굳이 다양한 막걸리를 만들어 팔지 않았다. 그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표 브랜드 하나만을 밀어댄다.

제조법도 국세청기술연구소(현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에서 권장했던 방식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았다. 지역 맹주 막걸리들의 재료는, 정제수라는 물을 빼면 쌀 90%, 물엿류 10%, 아스파탐을 사용한다. 쌀 90% 안에 백국균으로 만든 쌀누룩이 들어 있다. 재료의 비율이 같고, 같은 균주를 사용하니 맛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대구 불로 제조장의 규모있는 누룩방, 불로의 안정된 맛은 이 누룩방에서 나온다.
 대구 불로 제조장의 규모있는 누룩방, 불로의 안정된 맛은 이 누룩방에서 나온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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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경쟁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저마다 저렴한 원료를 사용하는 것도 닮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쌀, 브랜드화 쌀을 사용하지 않고, 수입쌀을 사용한다. 그리고 지역 이름을 앞세워 유통 마진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시장을 독점하는 데 주력한다.  

탄산감이 있고 달보드레한 맹주 막걸리들의 맛은 오늘 이 순간 한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맛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생산자와 정책가가 일방적으로 이끌며 유도한 맛이지만, 따져보면 소비자가 담합하고 있는 한국의 맛이다.

모든 상품에는 저렴한 제품군이 존재하니 이 맛을 부러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지만, 이 맛으로 귀결된 기술적·문화적 기반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좋은 맛으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맛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다른 가치를 부여한 새로운 맛과 만날 수 있고, 새로운 막걸리와 만날 수 있다.


태그:#막걸리, #장수막걸리, #생탁막걸리, #소성주, #불로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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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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