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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마을 잔칫집에 일을 거들러 갔던 오누이의 엄마가 떡을 얻어 집으로 향한다. 이미 사방이 캄캄하다. 그런데 호랑이가 나타나 떡을 모두 뺏어 먹은 후 엄마까지 잡아먹는다. 그리고 오두막집으로 가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고 한다. 위기에 처한 남매가 하늘에 기도를 하자 동아줄이 내려온다. 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한다.

<내 생애 첫 우리말> 책표지.
 <내 생애 첫 우리말> 책표지.
ⓒ 천년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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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고, 내 아이들에게도 들려준 <해와 달이 된 오누이>란 전래동화 그 대략이다. 이 동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야기를 떠올리는 순간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 흉내를 내며 어린 아이와 부모가 장난을 치고 노는 정겨운 모습과, 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연상될 정도로 매우 친근한, 지금도 많은 어린이들이 듣고 자라는 우리의 전래동화 중 하나다.

윤구병 선생에 의하면 우리가 전래동화 정도로 알고 있는 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우리의 천지창조신화 중 하나다. 해와 달이 생겨난 이야기이자, 삭은 동아줄인 줄 모르고 남매를 쫓아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하필 수수밭에 떨어져 (호랑이의 핏물 때문에) 수수가 붉어졌다는 수수의 유래까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선생은 <내 생애 첫 우리말>(천년의상상 펴냄)을 통해 <해와 달이 된 오누이>나 <단군신화> 등과 같은 우리 신화들을 제대로, 그리고 훨씬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도록 길잡이 해준다.

"호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호랑이가 아니라 범이라고 해야 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호랑(虎狼)이라는 말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생긴 '신화'니까. 범을 호랑이로 잘못 알면 이 이야기의 알맹이를 만나지 못하고 꺼풀만 보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이 범이야. 중세 기록을 보면 범을 밤이라고 쓴 것이 있어. 그러니 이것을 범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밤이라고 생각하자고." - <내 생애 첫 우리말>에서.


일을 거들다 보니 해가 지고 말았고, 사방이 어두워진 후에야 오누이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숲을 지나야만 하는데 동네보다 어둠이 훨씬 짙어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오누이가 걱정되어 길을 재촉하던 엄마는 급한 마음에 넘어지기를 거듭하면서 함지박에 담겼던 떡들을 하나 둘 놓치다가 결국 모두 잃고 만다.

떡을 모두 잃은 엄마는 성큼 짙어진 어둠 때문에 자신의 팔이며 다리까지 보이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엄마의 떡을 앗아간 범, 그러니까 밤(어둠)이 결국 어머니마저 삼키고 만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는데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가물가물하던 등잔불마저 꺼져버리자 오누이는 무섭다. 오누이는 하늘에 도움을 청해 어둠(밤) 속에서 빠져 나온다. 

책을 통해 이처럼 '호랑이→범, 범→밤'으로 바꿔 읽으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이제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딱히 표현할 수 없으나 뭔가 중요한, 깊고, 묵직한 그런 여운과 함께 말이다.

'(…)전 세계 신화를 보면 달의 신은 여신이고 해의 신은 남신이다. 모계사회의 신화를 부계사회의 신화가 완전히 뒤집어서 중요한 신은 다 남신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오히려 해의 신이 여신이고 달의 신이 남신이다. 이런 점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나는 이렇게 해석해. 정설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건 꼭 알아야지. 호랑이가 아니라 범이다. 호랑이가 아니라 우리말 범으로 읽어야 한다. 범은 밤이라고 했다. 우리말로 지어낸 우리 이야기는 우리말로 풀어야지, 외국에서 들여온 말로 풀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아. 범, 밤이 아니라 중국에서 빌려온 말인 호랑이라고 해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져 버리는 거야. 호랑이라고 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면 잔혹하기만 해. 팔 떼고 다리 떼고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잡아먹어버리잖아. 그런데 그걸 밤이라고 하면 전혀 달라지지. 해석의 여지가 훨씬 늘어나고."-<내 생애 첫 우리말>에서.


이어 선생은 "단군신화도, 신라의 왕 박혁거세와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백제의 왕 온조 등이 등장하는 건국신화도 우리의 정서와 얼이 깃들어 있는 우리말로 풀어야(읽어야) 한다"며 우리말로 제대로 읽는 방법을 각각의 주제로 길잡이 해준다. 우리말로 신화를 풀어 설명해주는 선생의 글을 길잡이 삼아 다시 읽는 우리의 신화들은 이해가 훨씬 쉽다.

게다가 박혁거세가 여왕이었다?거나 백제와 온조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처럼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흥미로운 사실들까지 접할 수 있어서 우리 신화 전반을 다시 읽고 싶은 욕심까지 갖게 한다. 관련 사실이나 기록, 우리말에 담긴 뜻이나 우리 조상들이 썼던 말 등을 근거로 조목조목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에서 왜 하필 곰과 호랑이며, 쑥과 마늘일까? 왜 호랑이가 아닌 곰이 사람이 되었을까? 어떻게 사람이 알에서 탄생할 수 있을까? 필자처럼 이제까지 우리의 신화들을 '어느 정도의 허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신화니까'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받아들이고 억지로 이해했다면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다시, 꼭 읽어보길 권한다. 아울러 특정인들에 의해 우리들이 우리의 신화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최남선이 일본에서 전통 시문학을 새롭게 하는 신체시를 들여오고, 이인직 같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와서 일본이 서양에서 받아들인 서양문학 전통을 우리나라에 옮겨 심었어.(…)최남선이 저지른 가장 큰 문제는 친일 행위가 아니라 단군신화를 잘못 해석해서 우리 민족을 우주 창조 신화가 없는 민족으로 만든 거야.

-몇 년 전부터 '인문학' 바람이 불어.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고, 너도 나도 인문학공부를 하고 싶어 해. 그런데 인문학 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펴서 봐. 우리말이 거의 보이지 않아. 영미나 유럽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나 일본식 한자말 투성이야.

땅⟶대지 /풀밭⟶초원 /사람⟶인간 /집짐승⟶가축 /나물이나 남새⟶채소 /나무⟶목재 /굴⟶터널 /아랫도리⟶하체 /윗옷⟶상의 /힘⟶에너지 /목숨⟶생명 /숨쉬기⟶호흡 /배움⟶학습 /이야기⟶담론 /먼 바다⟶원양 /마파람⟶남풍 /저물녘⟶석양 /해뜸⟶일출…-<내 생애 첫 우리말>에서.

책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던 5세기 말~6세기 초, 신라의 지배자들이 중국의 한자말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중요한 땅이름이나 벼슬이름, 사람의 이름 등을 중국식 한자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받았거나, 사라졌거나, 다른 뜻으로 바뀌었거나, 외국말에 밀렸거나 한 우리말들의 본래뜻과 바람직한 쓰임새들을 5장에 걸쳐 조목조목 들려준다.

1976년에 한창기 선생과 함께 <뿌리깊은 나무>란 전설적인 잡지를 창간해 초대 편집장을 지낸 윤구병 선생(1943~)은 여러 권의 어린이 책들을 쓰기도 했다. 보리출판사를 만들어 교육과 어린이 이야기를 담아내는 책들을 주로 출간했다.

이런 선생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가꾸는 것은 다름 아닌 농사'라는 믿음으로 전북 부안에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다. 선생을 '농부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부터 '참살이'란 말과 함께 기억하고 있던 이름 윤구병. 어떤 책이든 선생의 정신이 스며있는 책 한 권 읽겠다고 염두에 두고서도 읽지 못하던 터라 반갑게 들었던 게 이 책이다. 책을 읽던 중 선생의 근황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안타깝게도 현재 간암 투병중이시란다. 어서 빨리 건강을 되찾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로라도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내 생애 첫 우리말>(윤구병) | 천년의상상 | 2016-07-01 | 정가 17,000원



내 생애 첫 우리말 - 보리국어사전을 편찬한 윤구병 선생님의

윤구병 지음, 천년의상상(2016)


태그:#우리말, #윤구병, #보리국어사전, #변산공동체 터, #뿌리깊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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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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