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웃고 울며 살다. 삶은 흉터를 새기고 흉은 후회를 남긴다. 그래도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공리가 주연한 영화 <인생>을 보고 쓴 한 구절이다. 영화를 보고 십년이 흘러 같은 제목의 원작소설을 읽고나니 과연 감상이 그때와 같았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진실이 담긴 작품이란 시간을 넘어 살아남는 법을 안다.

소설은 민요를 수집하는 남자가 푸구이라는 촌로를 만나 그의 지난 삶에 대해 듣는 액자식 구성을 갖고 있다. 민요를 수집하는 남자는 화자가 되고 푸구이는 주인공인데 액자식 구성을 가진 작품이 많이들 그러하듯 좀처럼 믿기 힘든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 표지
▲ 인생 책 표지
ⓒ 푸른숲

관련사진보기

이야기는 청나라 말기 중국의 농촌에서 시작된다. 마을에서 제일 가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젊은 나이에 도박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집과 전답이 노름빚으로 모두 넘어가게 되자 아버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푸구이는 어머니와 아내, 딸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졸지에 가난한 농부가 된 푸구이는 병든 어머니를 봐줄 의원을 찾으러 성안에 나갔다가 국민당 병사로 징집돼 국공내전에 끌려간다. 국공내전에서 죽을 둥 살 둥 온갖 어려움을 겪던 그는 공산당의 포로가 돼 집에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다.

푸구이는 아내인 자전과 딸 펑샤, 아들 유칭과 함께 험난한 세월을 헤쳐나가려 하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격동하는 중국의 역사 가운데 그들 가족의 운명도 순조롭지만은 않다.

푸구이가 한 생애 동안 겪어낸 곡절은 제법 세파에 단련된 사람이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저자 위화는 처절하고 참담한 푸구이의 생애를 묘사하는데 너무 담담해서 우화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것이 <인생>이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격동하는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한 가족의 삶은 얼마나 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가. 한 사람, 한 가족의 삶을 통해 그들이 살아간 시대를 내보이는 건 과장을 조금 섞어, 수도 없이 쓰여온 수법이다. 하지만 <인생>과 같이 인물의 삶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그가 겪은 고난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담담하게 그리는 작품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위화는 푸구이의 처절한 삶을 액자식 구성과 특유의 우화적 표현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가장 좋을 때는 추락하고 가장 나쁠 때는 다시 솟아오르며 거듭 등락을 반복하는 푸구이의 삶. 새옹의 고사에서처럼 운명이란 예측불허의 것이어서 받아들여 감당하는 것 외에는 당해낼 방법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얼핏 한 걸음 떨어져 당해내기 어려운 재앙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듯도 하지만 위화의 소설에선 어떤 종류의 진실이 읽힌다. 그건 삶 그 자체를 위한 삶이라는 것, 어떤 원대한 목표나 포부가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노년이 된 푸구이의 초연한 모습에서 어떠한 패배감도 엿보이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아내인 자전과 손자인 쿠건을 살려 푸구이의 아픈 삶 가운데 희망을 심어두었던 영화 <인생>과 달리 소설은 푸구이에게 단 하나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희망이 있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 둘 모두에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감상은 삶이란 무언가를 감당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때로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지라도 감당하고 나아가는 것이 곧 삶임을 소설과 영화는 내보이고 있다.

삶이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삶은 흉터를 새기고 흉은 후회를 남기지만 그래도 꿋꿋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 말하는 인생이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바로 이러한 시점으로 나는 미국의 민요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 늙은 흑인 노예는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언제나처럼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이 노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소설을 쓰기로 했고, 그것이 바로 이 책 <인생>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 서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푸른숲(2007)


태그:#인생, #위화, #백원담, #푸른숲, #김성호의 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