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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만 4년여 전인 그때,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세간에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아래 '나꼼수') 멤버 중 하나인 <시사IN> 주진우 기자였습니다.

주 기자는 대뜸 "고 선배, 저희 방송에 한번 나오셔야죠"라고 제안했습니다. 2012년 8월 1일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사건,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외부 가격흔과 관련된 '나꼼수' 특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연하게 된 '나꼼수 봉주 19회 - 납량 특집 / 장준하와 공작들'.

'나꼼수'를 접한 청취자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방송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소름 끼치도록 무섭게 들었다고 하셨고, 또 어떤 분은 이 사건의 뒷이야기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 한켠에서는 이 방송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은 '그날 다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당시 '나꼼수'에서 차마 다할 수 없었던 비밀을 이제 밝히려 합니다. 때가 오면 밝히겠다면서 혼자만 삼켰던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또 다른 가설',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저의 확신입니다.

1993년 처음 알게 된 장준하, 그것은 운명

지난해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지난해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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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그날은 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제2기 조사관으로 새로 임명된 날이었습니다. 조사관 임명장을 받고 난 뒤 위원회가 제게 배당한 사건은 1975년 8월 17일 의문사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 사건이었습니다.

재야인사 장준하. 저는 장준하 선생님(아래 '장준하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처음 장준하 선생을 알게 된 계기부터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장준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3월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후 재야 인권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시청하게된 방송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특집.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출범한 그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과거 독재 권력 하에서 발생한 의문사를 방송에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장준하 선생 의문사였습니다.

방송을 통해 저는 장준하 선생을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 진짜 애국자' 장준하. 해방 전에는 광복군으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백범 선생의 비서로, 이후 백범 서거 후에는 <사상계> 사장으로 언론 운동을 했으며 훗날에는 국회의원으로서 또 재야 민주인사로서 박정희 독재와 맞섰던 '민주주의자' 장준하.

그런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됨으로써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신 독재자인 박정희와 마지막 순간까지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등반 중 실족 추락사했다"고 발표한 정부 수사 결과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은 '사실은 박정희 독재권력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수군거렸고, 그 의혹은 사후 41주기가 지나가는 오늘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바로 이러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의혹을 집대성한 수작 중 수작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을 보고 이후 2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히지 않는 명 대사가 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추적한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자였던 배우 문성근씨가 던진 마지막 내레이션이었습니다.

10년 후, '그 사건'의 조사관이 되다

"이제 이 사건은 단순 변사사건도 아니고 더 이상 의문사도 아닙니다. 명백한 타살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취재를 마무리짓기로 했습니다. 18년 전의 사건이라서(주 - 1993년 당시) 법적인 공소시효는 이미 지났습니다. 유가족은 고인의 죽음에 얽힌 진실만 밝혀진다면 가해자가 누구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장막에 가려진 장준하 사건의 한구석을 조금 열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 속에는 왜곡된 사실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들께서도 이제는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장면,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이 내레이션에서 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저 역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의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있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연은 놀라웠습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만 10년이 되던 2003년 7월, 제가 바로 그 '책임 있는 곳에서' 장준하 선생 사건의 의문사를 조사하는 '책임있는 조사관으로' 임명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욕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사건의 진실을 '미치도록' 밝히고 싶었습니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계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비밀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완벽하게 밝혀내는 일, 그것은 저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1기 위원회가 남긴 수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조사 자료와 또 2기에서 추가 입수한 문서를 넘나들며 밤을 새우고, 날을 보냈습니다. 사건 현장인 약사봉을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30여 년 세월이 흐른 그곳에서 세월 속에 사라진 바위를 찾고 달라진 지형 지물을 헤집으며 그렇게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한 명백한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준하 선생은 실족 추락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족 추락사했다는 근거보다는, 인위적인 원인으로 한 사망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더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의문은 한 가지였습니다. '누가 장준하 선생을 사망케 했는가' 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이 실족 추락사가 아니라면 분명 장준하 선생을 가해한 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목한 '가해 의심 기관'은 다음과 같은 세 곳이었습니다.

장준하 타살 의심? '중정'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령부'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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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역시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였습니다. 박정희의 18년 장기 독재를 가능케 해 준 최악의 폭압 기구.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장준하 선생과 유력 야당 정치인까지 제 맘대로 연행하고, 고문하고, 또 감시한 중정의 악행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청와대 경호실'이었습니다. 특히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기 직전인 1974년 새로 임명된 청와대 경호실장을 주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 '차지철'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총격사건으로 육영수씨가 사망하자 대통령 박정희는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교체합니다.

그리고 이때, 새로이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이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상당히 다른 경호 철학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우리가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을 의심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누구나 알 듯 청와대 경호실의 주 업무는 대통령 신변 안전입니다. 즉, '신체 경호'입니다. 그런데 차지철은 달랐습니다. 그는 '누구도 대통령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심기 경호'와 함께 '정치적 생명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보위 경호'를 새로운 경호 철학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그는 우리가 매우 주목할 만한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이 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될 그 책의 제목, '암살사'였습니다. '저자 차지철'로 된 이 책은 장준하 선생의 암살 의혹을 조사하는 제 입장에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강력한 의혹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국군 보안사령부'(약칭 '보안사')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포천 약사봉은 장준하 선생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군사 지역으로 묶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고 직후 보안사 소속 군인들이 여러 차례 사건 현장에 나타납니다. 민간인 사망 현장에 군인이 나타나 어떤 일을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워진 조사기간은 불과 1년 남짓. 이 조사 기간동안 모든 기관의 의혹을 충분하게 조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의혹이 집중된 기관을 중심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우리가 선택한 집중 조사기관은 '중정'이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장준하 선생의 가해 기관으로 중정을 의심한 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실 관계만 언급해도 그 이유는 충분합니다. 1975년 8월 17일, 사건이 일어난 현장 주변에서 '중정의 짙은 그림자'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장준하와 중정의 악연, 몇 가지 사례

가장 큰 의심은 사건 발생일인 1975년 8월 17일 이전에 중정이 세운 비밀 계획의 확인입니다. 1975년 3월 31일, 중정은 장준하 선생을 대상으로 하는 '3급 비밀' 계획을 수립합니다. 감옥을 보내고 <사상계>를 부도내는 등 온갖 핍박을 해도 물러서지 않는 장준하는 중정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골칫덩어리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1974년 1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을 긴급조치 위반죄로 15년 징역에 처했지만 이 역시 실패합니다.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장준하 선생을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중정은 이때 '매우 비상한 내용의' 보고서를 비밀리에 작성합니다.

그것이 바로 1975년 3월 31일 중정이 작성한 3급 기밀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였습니다. 장준하를 '위해 분자'로 규정짓고, 그러한 '위해 분자' 장준하가 '유사시 위해 행위를 할 경우', 이를 사전에 탐지 봉쇄하도록 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보고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약 5개월 후, 장준하 선생은 끝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정은 왜 1975년 3월 31일 이 '위험한' 계획을 수립했을까요? 그 날에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랬습니다. 바로 그날은 장준하에게도, 그리고 중정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유신 독재를 깨기 위해 두 번째 야권 통합에 나선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날 장준하는 야당 지도자인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훗날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김영삼씨와 양일동 통일당 당수를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이는 오직 장준하 선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 야권통합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박정희 독재 권력을 깨는 무서운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신헌법 발효 후 재야 및 야당 정치권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순간, 더 이상 장준하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을 중정이 내리기에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바로 그날,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를 수립한 날이었습니다.

사고 유일한 목격자? 누구인가, 그는

이처럼 장준하 선생 사망을 전후해 확인된 중정의 특이 동향 외에도 우리가 중정을 의심한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장준하 선생은 등반 중 실족 추락사한 것"이라고 남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의혹입니다. 그 사람, 김용환씨입니다.

문제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의 진술이 과연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과 약사봉을 함께 등반하다 사고를 목격했다는 그의 주장은 유감스럽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조사팀의 최종 결론이었습니다. 조사 기간 중 20번 만나 그중 15번 진술조서를 작성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는 이 많은 진술 과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봤다는 장준하 선생 추락 상황에서 '팔색조 진술'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추락 장면을 봤다고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추락하는 것은 못 보고 단지 짧은 비명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때는 그저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만 봤다고 했고, 심지어는 "그런 소나무 가지 발언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사고 후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통해 알았다"는 황당한 답변도 거듭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굉장히 단순한 일입니다. 함께 등반하다가 내려오던 중 자신이 봤다는 목격 사실만 자연스럽게 증언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기억이 엇갈릴 수 있지 않냐고요?

아닙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고 불과 3일 후인 1975년 8월 20일 빈소에서 처음으로 사건 목격에 대한 진술을 시작합니다. 사고 직후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용환씨는 장준하 선생의 발인 전날에서야 갑자기 나타납니다. 사건 경위를 모르는 이들은 사고 목격자라는 그를 사방으로 애타게 찾았으나 어디론가 사라진 그가 나타나지 않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그런데 사라진 목격자가 마침내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급했을까요? 그래서 당시 빈소에 있던 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계훈제, 문동환, 김준엽 총장 등이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에게 사건 경위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날도 그의 진술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가 본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는 김용환씨에 대한 의혹이 더욱 가중돼 가던 그때, 2기 의문사위 조사팀은 정말 뜻밖의 문서 한 장을 찾게 됩니다. 중정이 제출한 문서 중에서 발견한 그 자료의 명칭은 '특수인물 존안카드'. 그리고 이 카드 주인의 이름난에는 '김용환'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목격자를 자처하던 사람의 이름 석 자였습니다.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 속 그 남자 정체

돌아보면 사건 목격자를 자처하던 김용환씨에 대한 의혹은 제가 새로 조사팀을 맡기 전부터 상당했습니다. 사고 상황을 목격을 했다는 그가 도대체 누구냐는 의혹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장준하 선생을 따르는 충실한 사람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실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의 연결 선상에서는 늘 중정과의 연관성이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혹은 그저 의혹으로만 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1기 의문사위는 김용환씨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라는 진술을 중정 간부로부터 확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용환씨는 중정의 정식 채용 정보원은 아니지만 일정한 보수를 주며 중정이 채용한 사설 요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을 한 중정 간부는 2기 조사에서 말을 번복합니다. "김용환씨가 사설 정보원이 정말 맞냐"는 확인 조사에서 그는 "1기 위원회 조사 당시 그럴 수 있다는 취지로 답했을 뿐 정확히는 알 수 없다"면서 "답한 것이 전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2기 조사팀은 이 부분에 대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 원점에서부터 다시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찾게 된 한 장의 중정 존안 문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의 확인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자처하던 김용환씨와 중정이 '사실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음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를 찾아낸 것입니다. 목격자를 자처하는 이의 이름으로 된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

이 자료가 발견되기 전까지 김용환씨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자신은 중정과 그 어떤 연관도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장준하 선생님을 스승처럼 믿고 의지하는 동지였다며 그러한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정이 존안하고 있던 김용환 명의의 '특수인물 존안카드'에 대한 중정 관계자의 진술은 달랐습니다. 조사팀은 1975년 당시 이 존안 카드를 작성하는 데 관여한 중정 간부 B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김용환씨 명의로 작성된 '특수인물 존안카드'에 대해 작성 경위 및 용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답변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장준하가 위원장을 맡던 신민당 동대문지구당 간사가 김용환씨였다는 점에서 이는 서울시경 정보과 형사가 김용환씨를 중정의 '사설 정보원'으로 활용토록 추천,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큰 비중이 없는 김용환씨를 상대로 이 같은 '특수인물 존안카드'를 만들 이유가 없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혹에 대해 김용환씨는 전면 부인했습니다. 그는 이 의혹 외에도 명백하고 분명한 자신의 모든 의혹을 막무가내로 부인했습니다. 지면 관계상 모두 언급할 수 없는 중대 의혹을 그는 무조건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결코 단순한 사고 목격자가 아니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한 진짜 그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특히 사건 당일, 현장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당수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날은 1975년 여름 중에서도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푹푹 찌는 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사건 현장인 산속에 나타났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중정이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중정의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 수립과 이후 사고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가 '사실은'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로 관리되고 있던 내부자라는 점, 그런 사람과 함께 등반후 변사체로 발견된 장준하 선생의 몸이 일반적인 추락사로 보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이 사건이 중정 개입에 의한 사건으로 판단하기에 무리가 없었습니다.

정말 의심스러운 정황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를 작성했던 중정 책임자가 장준하 선생 사망 후 휴가를 떠났다는 점입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자신이 3급 비밀로 감시하던 자가 사망했는데 바로 당일 휴가를 떠났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날 담당자가 휴가를 떠났다는 것은 이 매우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에는 '1975년 3월 31일부터 계획 종료시까지'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즉,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자 장준하 선생을 관찰하던 담당자가 휴가를 떠났다는 것은 바로 '계획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 전반에서 확인한 중정의 짙은 의혹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법으로 보장받은 조사 기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혹이 해소돼 조사를 마친 것이 아니라 '확인해야 할 의혹만 남긴 채' 법적 조사기간 종료로 조사의 문의 강제로 닫힌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만 12년 전,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반전, 그러나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

생전의 장준하 선생
 생전의 장준하 선생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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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저의 확신에 결정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지난 2012년 8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에 있어 중정이 깊숙이 개입했다고 확신해 온 제게, 어쩌면 이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강력한 의문이 든 것입니다. 2012년 9월 초, 제가 출연한 '나꼼수'에서 다 말하지 못한 진실, 그것은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지금까지 읽어온 분이라면 적지 않게 놀랄 듯합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고 무려 41년이 지난 오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위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타살설을 믿는 사람들은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이 사건에서 중정이 무엇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반대편 사람들은 "그간 중정에 대해 조사했지만 더 밝혀질 사실이 없다"며 '조사 무용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 옥신각신으로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이 유력하다는 발표가 있지만 더 이상의 국가 차원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2012년 8월 1일 장준하 선생 묘 이장 과정에서 '새로 드러난 명백한 진실'입니다. 당시 서울대 의대 법의학 교수 출신의 이정빈 박사는 이장 과정에서 확인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을 부검한 결과,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실족 추락에 의한 사망'이라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타살 가능성이 보다 분명해진 지금, "그렇다면 누가 장준하 선생을 이처럼 사망케 하고 이후 실족 추락사로 위장한 것이냐"는 가해 의심 기관은 어디일까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할 것입니다. 바로 그 가해 의심기관, 바로 '국군 보안사령부'라는 새로운 가설을 제기합니다.

왜 가해 의심 기관이 지금까지 제기된 중정이 아니고 보안사인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이며 왜 이 사실을 지금 밝히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다음 기사에서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대한민국 진짜 애국자', 고 장준하 선생님의 41주기 기일을 추모합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태그:#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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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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