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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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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차량을 타고 월정리역에 들어가려던 우리의 시도는 '민간인 출입 금지'라는 상사의 명령으로 좌절되었다. (관련기사: 비장하게 시작한 국토종단 첫날, 결과는…) 백마고지역 관광안내소에서 한 번, 군부대 앞에서 한 번, 군용차량에서 또 한 번. 월정리역에서 여행을 시작해보려고 삼세번을 시도했다. 이제 미련도 없다. 비장한 시작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어쨌든 여행은 시작되었다. 노동당사로 가자.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뒤는 무너지고 앞부분만 겨우 구색을 갖춰놓은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검게 그을린 시멘트 건물과 대비되는 새파란 잔디밭에 배낭을 내렸다. 동송과 백마고지역을 잇는 버스에서 내린 후 세 시간 만에 벗는 배낭이다. 배낭이 떨어져 나간 어깨가 징, 하고 울렸다. 두 팔을 쭉 뻗으니 우두둑, 근육인지 뼈인지 모를 것이 어깨 안에서 무너져내렸다. 봉긋 솟은 어깨 근육을 주물렀다. 뭘 해봐도 뻐근함은 그대로다.

덩치 큰 관광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하얀 밥알처럼 머리가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쏟아져나왔다. 창이 긴 모자, 목에 두른 디지털카메라, 반팔 셔츠, 긴 바지, 운동화. 철원 단체관광 안내문에 적혀있었을 법한 필수 준비물과 복장을 충실히 따른 할머니 할아버지가 관광가이드를 따라 노동당사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철원은 전쟁 직후에는 북한 땅이었어요. 노동당사는 그 당시에 북한에서 지은 건물입니다. 여기에서 공산당 사무도 보고, 사람들 고문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건물 벽에 구멍 보이시죠? 사람들을 가둬놓고 총을 쏴서 남은 자국이에요."

 노동당사 내부.
 노동당사 내부.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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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말을 엿들으며 노동당사를 한 바퀴 돌았다. 가이드의 설명은 흥미로웠다. 노동당사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지은 건물이라는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장소가 여기라는 것도 몰랐던 일자무식이라 더 그랬다.

할아버지들은 "빨갱이 놈들!" "사람도 아니야!" 등의 맞장구를 치며 건물 벽에 난 자국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나도 들여다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일자무식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가이드가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어깨의 통증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말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 가이드의 설명은 이내 배경소음으로 변질되어 내 머릿속에서 웅얼거릴 뿐이었다. 모든 게 배경이고 소음이 되어버린 내 머릿속에 빙하처럼 오롯이 남은 견고한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어깨 아파.'

배낭을 지키고 있는 더스틴에게 돌아간다는 건 다시 그 끔찍한 배낭을 메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노동당사 벽에 난 구멍 개수를 다 세어볼 만큼 최대한 시간을 끈 후 잔디밭으로 돌아갔다. 더스틴은 주차장 쪽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려 절반 이상이 무너져내린 노동당사 앞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세상에 다시 못 볼 절경 앞에서 세상에 다시 없을 반쪽과 함께 하는 소중한 순간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서로를 부여잡고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포토 포 미? 옆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더스틴에게 물었다. 미 투!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할머니 한 분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양어깨를 주무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사진 찍어주는 더스틴. 바쁘니까 어깨나 주무르란다.
 사진 찍어주는 더스틴. 바쁘니까 어깨나 주무르란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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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보더니 냉큼 사다리에서 내려온 할아버지

"웨어아유프롬?"

장흥리 미곡도정장을 지나는 중이다. 할아버지는 도정장 앞 담벼락에 세운 사다리 위에 서서 가로등을 손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아래를 내려다본 할아버지가 어이! 하더니 사다리 아래로 냉큼 내려왔다. 그리고는 따지듯이 물었다. 웨어아유프롬?

"여기(한국)서 살아요."

내가 말했다.

"아니 아니. 웨어아유프롬!"

할아버지는 첫째, 신기하게 생긴 외국인 대신 내가 대답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둘째, 공들여 영어로 물었는데 한국말 대답이 들어온 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셋째, 뭐 한국? 고향이 어디냐니까? 이 외국인 고향이 어디냐고. …. 글쎄요.

"아이엠 프롬 엘에이."

더스틴이 대답했다. 하! 엘에이는 무슨. 고작 6개월 머문 엘에이가 네 고향이면 내 고향은 제주도게?

"아! 아! 엘에이! 엘에이 알지 엘에이!"


할아버지는 더스틴이 결승전 퀴즈의 정답이라도 맞춘 양 기뻐하며 어깨를 툭 쳤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이려 입을 벙긋대는 내게 더스틴이 눈짓을 보냈다. 그만둬. 엘에이가 마음에 드신다잖아.

그래, 그만두자. 네 고향을 설명할 재간은 나도 없으니. 고향이 엘에이라는 대답은 뭐랄까, 낯선 한국 사람 응대용이다. 한국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미국 도시니까. 그렇다면 더스틴의 진짜 고향은? 없다. 더스틴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태어난 곳은 오클라호지만 갓난아기 때 떠난 그곳을 고향이라고 부를 순 없다.

워싱턴 주와 사우스다코타주에서 몇 년 살았지만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은 아니다. 그렇게 치면 엘에이에서 왔다는 말도 말짱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든, 짧은 기간이라도 그곳에서 머물렀으니까. 고로 더스틴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왔다. 오클라호마, 사우스다코타, 워싱턴, 엘에이, 그리고 서울에서 왔다. 서울에서 왔다는 걸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미곡도정장 내부. 친절하게 투어까지 시켜주셨다.
 미곡도정장 내부. 친절하게 투어까지 시켜주셨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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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에게 고향, 혹은 근본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이동이다. 일궈놓은 일상, 그 일상 속에서 얽힌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이동과 자유의 속성이 그의 근본이다. 대학 입학 전까지 20여 년간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며 25번을 이사했다. 그에겐 떠남이 쉽다. 오히려 정착이 어렵다.

서울 A동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 다니고 생활해 온 나에겐 A동에서 고작 지하철 20분 거리인 B동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만 해도 센치해지는 일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여행도 그랬다. 더스틴에게 서울이란 언젠가 떠날 도시였고, 나에겐 삶의 기준이었다. 나의 한 부분이었다. 나에게 떠남은 더 어려웠다.

나에게 떠남이 더욱 어려웠던 이유

나는 A동에서 태어나 스물 다섯해를 살았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걸 도와준 산부인과 의사는 아직도 A동 같은 자리에서 아기를 받는다. 어린 나에게 A동 골목은 하나의 세계였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금은방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철물점, 그 옆에는 중국집, 옷가게, 신발가게, 주차장 골목, 약국이 있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1km 남짓 되는 A동 상가 거리 가게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두겠다. 옛 동네 생각을 오랫동안 붙들고 싶지는 않다. 한동네에서 오래 사는 건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다. 변화, 그리고 쓸쓸한 끝을 봐야 하기 때문에.

철물점 아저씨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몇 년 전 엄마가 동네를 지나다 철물점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저씨가 없어 너무 쓸쓸하다고, 길가에서 엄마를 붙잡고 우셨단다. 네발자전거로 시장터를 활주하던 개구쟁이 꼬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내 과외 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오래전 일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지도 한참이 되었을 터다. 꼬마의 아빠는 재작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늘 나에게 상냥했던 아주머니께 안부 인사도 못 드렸다.

엄마는 길 건너에서 옷 가게를 하던 수희 엄마와 친했다. 나는 동갑인 수희와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 이따금 저녁이 되면 이제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어른이 우리를 통닭집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수희와 나는 어둑한 통닭집 구석에 앉아 유리컵 한가득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주스 대신 생맥주를 마셨다. 언제까지고 가게 문 옆에서 묵묵히 닭을 튀길 것만 같았던 아저씨는 재작년에 자살했다.

은행 앞 떡볶이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떡볶이 판 돈을 몇 년간 모아 번듯한 가게를 장만했다. 아빠가 금은방을 하던 시절, 엄마는 빨간 바구니에 식사 거리를 담아 떡볶이 노점이 있는 은행 앞길을 매일 걸었다. 2층 창문에서 빨간 바구니를 들고 가는 엄마를 내려다보곤 하던 중국집 아주머니는 엄마가 참 부지런도 한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식당을 연 후 중국집 아주머니와 자주 어울렸다. 아줌마는 지금도 짜장면을 만들며 점점 어려워지는 장사를 불평하시고, 우리 엄마는 아프다.

일찌감치 동네를 떠났다면 철물점 아저씨의 중년만, 쌀집 아저씨의 웃음만, 통닭집 아저씨의 성실한 모습만 기억할 수 있었을 거다. 어린 나에게 세계의 전부였던 A동은 이제, 하나의 완고한 세계가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웃음도 행복도 있지만 아쉬움과 쓸쓸함, 그을음과 고통이 더 많은, 찬란한 시작과 씁쓸한 끝이 모두 담긴 하나의 완고한 세계.

 말로만 듣던 철원평야
 말로만 듣던 철원평야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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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로만 듣던 철원쌀
 말로만 듣던 철원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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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집 딸이여?"
"여기 딸 아니에요 할머니.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으잉?"

챙이 긴 모자를 쓴 할머니 한 분이 도롯가에 쭈그려 앉아 텃밭을 매고 있다. 할머니는 모자 아래 작은 눈을 들어 우리를 올려다봤다. 커다란 꽃무늬가 그려진 셔츠. 흙 묻은 바지. 바지를 감싼 장화. 팔에 낀 토시와 장갑 낀 손에 든 호미.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으잉? 그럼 어디 마을 사람이야? 오덕리?"
"아니요 할머니! 이 근처 사람 아니고. 서! 울! 서 울 에 서. 왔 어 요!"
"이이잉? 여 사람도 아님서. 여긴 왜 왔어?"
"철원에서 부산까지 걸으려고요."
"으잉? 철원에서 서울까지 걸어간다고?"
"아니요 할머니! 서울에서 철원까지는 버스 타고 왔고! 철원부터 걸어서 부산까지 가려고요."
"으으으잉? 허이쿠…! 아이 여기 연고지는 있겄지…."
"연고지요? 철원에? 없어요!"
"허이쿠!"


더스틴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할머니 사이의 친밀한 공기를 바라봤다.

 노동당사 가는 길
 노동당사 가는 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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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서울 아가씨여어어? 나도오. 나도 서울서 살았어. 10녀언. 글케 살다 다시 고향 왔지. 여가 우리 집이여. 집에 앉아있다가 하도 적적해서 나왔어. 티비도 봤다가 가만히 누워서 천장에 벽지 무늬도 봤다가…. 워낙 적적해야지…. 그래 이렇게 이쁘게 걸어 다니는구만. 하도 보기 좋아서. 그래서 물어봤어."

속이 묵직해졌다.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묵직함 속에, 할머니의 첩첩한 외로움과 깜깜한 그리움이 오래된 고목의 살결처럼 단단히 쌓여 있을 것만 같아서. 찬란한 시작과 씁쓸한 끝이 모두 담긴 완고한 세계가 하나, 둘, 셋, 그렇게 맥없이 쌓여 있을 것만 같아서. 할머니는 누굴 잃었을까. 무엇을 그리워할까. 나는 김이 새어 나오는 묵직한 덩어리의 뚜껑을 얼른 닫아버리고 할머니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할머니. 사진 한장 찍어도 돼요?

"나 같은 늙은이는 찍어서 뭐해."
"할머니가 너무 예쁘셔서요."
"별말을…. 히히히…. 그럼. 모자는 벗을까?"

아니 모자 안 벗어도 예뻐요. 할머니는 머리를 다듬고 모자를 바로 썼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할머니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더스틴에게 고향, 혹은 근본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이동이다.
 더스틴에게 고향, 혹은 근본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이동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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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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