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비리와 아이들의 성적을 맞바꾼 거네."

타 지역에 사는 친구가 인터넷을 통해 광주광역시 관내 사립학교들의 비리 뉴스를 들었다며 부러 전화를 걸어 건넨 조롱이다. 성적만 올릴 수 있다면, 웬만한 비리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인식이 학교마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탓 아니겠느냐며 나름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주와 더불어 해마다 수능 성적 1등을 다투고 있는 광주가 이젠 조금도 부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최근 온갖 비리가 터져 나오면서, 시교육청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내걸었던 '실력 광주'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족벌 경영과 채용 장사에다, 얼마 전엔 명문대 진학 실적을 늘리기 위해 상위권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를 무단으로 수정했다는 의혹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 시의회 의장이 구속되는가 하면, 해당 학교에선 시교육청 감사팀은 물론 경찰까지 불러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단체들은 '사학비리척결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지역 여론은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다.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분위기마저 읽힌다. 우리나라 교육 전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시민들에게 이 정도의 비리쯤은 웃어넘길 수 있는 '면역력'을 길러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교육 개혁은 백년하청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자리 잡았다.

재학생 학부모들이 나서지 않는 이유

상위권 학생들의 내신 관리를 위해 학생부를 '배려'하는 교사들의 노력은 이미 대세가 된 학종과 정비례하며 확산되어왔다.
 상위권 학생들의 내신 관리를 위해 학생부를 '배려'하는 교사들의 노력은 이미 대세가 된 학종과 정비례하며 확산되어왔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시교육청 감사와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해당 학교 학부모들의 분노가 한데 모아지기는커녕 드러나지도 않는 점부터가 놀랍다. 비리는 결국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는데도, 시민단체의 열혈 활동가가 아닌 다음에야 선뜻 나서는 재학생 학부모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되레 이미 졸업한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집회에 앞장서 참여하는 모양새다.

대놓고 문제를 제기했다가 당장 '보복'을 당할까 우려해서다. 그들은 재학 중인 자녀를 '볼모'로 여기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색한 처지다. 더욱이 대학입시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하 학종)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마당에 '교사에게 찍히면 그걸로 끝'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져 학부모로선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약자'에게 가장 익숙한 선택지는 '침묵'이다.

사실 돈으로 교직을 사고 파는 채용 비리가 여기저기서 터졌을 때, 해당 학교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분노와 동요로 인해 학사일정 자체가 마비될 줄 알았다. 교사의 도덕적 권위는 교육의 밑절미이며, 학교의 존립 기반 아닌가. 돈으로 산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어찌 떳떳할 수 있겠으며, 더욱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마당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잠자코 있진 않을 거라 여겨서다.

물론, 기우였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술렁거렸을지언정 아이들에겐 절체절명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교실에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수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비리 여부와 상관없이 학교와 교사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겐 여전히 '갑'이었다. 그들에 대한 인사권마저 교육청이 아닌 법인 이사회가 쥐락펴락하는 마당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학종의 부작용과 교사들 사이에 만연한 무기력함

그런데, 학교 교무실 출입문 두드리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학부모들의 '침묵'이야 그렇다 해도,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거나, 최소 짐작 정도는 하고 있을 교사들의 '외면'은 적잖이 충격적이다. '동업자 의식'의 발로이거나,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일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공고한 '침묵의 카르텔'이다.

증거를 찾기 위해 인사기록과 회계장부까지 들여다봐야 하는 족벌 경영과 채용 비리 문제라면 모를까, 권한을 넘어 학생부 기록을 무단 수정하는 것은 동료교사들의 무관심과 묵인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기 등 단순한 실수라고 해도, 해당 연도의 교과나 학급 담임교사가 아니면 임의로 수정해서는 안 되며, 단순 조회 등을 위해 다른 권한이 필요할 때도 결재 과정을 거쳐 권한 담당자로부터 부여 받도록 규정돼 있다.

경찰의 수사선상에 오른 해당 고등학교의 경우, 교장과 교감, 권한 담당자, 해당 학년 담임교사 어느 누구도 학생부 무단 수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거칠게 말해서, 모두가 '공범'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다. 그저 규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눙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학생부가 대학입시의 당락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상위권 학생들의 내신 관리를 위해 학생부를 '배려'하는 교사들의 노력은 이미 대세가 된 학종과 정비례하며 확산되어왔다. 수상경력을 채워주기 위해 경시대회를 늘리고, 진로와 연결지어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과 종합의견이 '소설'이 돼가고 있는 건 아이들마저 인정하는 바다. 곧, 학생부를 무단으로 고친 불법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 유혹에 쉽사리 빠져들게 하는 학종의 부작용과 교사들 사이에 만연한 무기력함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학종의 운명

교사들 중 이번 일을 두고 "욕심이 과하다 보니, 선을 넘어버렸다"고 혀를 끌끌 찰지언정 "우리 학교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위권 학생들을 위해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대학마다 전공적합성을 내세워 내신 성적을 '참고'하는 마당에, 학종이 상위권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다.

아이들조차 학교마다 학종 지원이 가능한 내신 성적이 애초 정해져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석차 백분율이 20% 이내에는 들어야 학생부를 채우는 데 선생님들로부터 배려 받을 수 있다고 자조하듯 말했다. 내신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은 학종을 준비하는 친구들 앞에서 "남자라면 '정시'지!"라며 호기롭게 말하기도 한다. 기실 학생부를 배려 받는 친구들이 부럽다는 뜻의 반어적 표현이다.

학종은 내신 성적과 수능 등 계량화된 점수로 담아내기 어려운 개개인의 적성과 흥미, 재능 등을 전형 자료로 활용하겠다며 야심차게 도입한 입시제도다. 그러나 지금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아이들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되레 성적을 '반영'하지 않고 '참고'만 한다는 홍보 영상을 보며 대학이 순진한 고등학생들을 기만하는 짓이라며 발끈한다. 성적은 '기본'이고, 거기에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증명해야 하는 입시제도, 그것이 학종이라고 여긴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학종은 결국 '변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셈이다. 내신 성적으로 공공연히 배제된 많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부를 배려 받는 상위권 아이들에게도 학종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입시제도가 됐다. 이것저것 챙기는 것도 힘들지만, 수능에 '올인'한, 곧 학종을 포기한 친구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은 그런 복잡한 심경을 이렇게 영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학종? NO, thank you!"

그런데도 교사들은 눈 가리고 귀 막은 채 학종에 매달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명문대 진학 실적으로 학교 교육의 질을 평가받는 현실에서 '변화'든 '대세'든 거부할 수 없다는 거다. 굳이 차이라면, 전엔 수능을 대비해 지금껏 죽기 살기로 문제풀이만 했다면, 학종이 대세가 된 지금은 학생부에 무엇을 어떻게 쓸까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

문제라도 함께 푼 수능보다 학종이 고약한 건, 과정이야 어떻든 학생부 기록이라는 결과만 잘 포장되면 된다는 거다. 잘 가르치는 교사보다도, 아이들과 소통이 되는 교사보다도, 학생부를 잘 꾸며주는 교사가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는 건 학종이 몰고 온 씁쓸한 변화다. 수학교사도, 체육교사도 담임을 맡으려면 글 쓰는 능력이 절실하다는 이야기가 슬프게 들리는 이유다.

요 며칠 사이에 몇몇 방송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학생부 무단 수정 의혹이 불거진 근본적인 이유와 함께, 대세라는 학종이 정작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불신을 조장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최근 학종에 대해 워낙 많은 글을 쓰고, 발언을 하다 보니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댄 것일 테지만, 기실 그 답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그저 현직 교사의 입을 통해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빤한 나의 답이며,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온존한 학벌 구조 속에서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건학 이념'은 동일하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명문대에 더 진학시켜야 한다는 맹목적인 교육 목표가 교사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듯 더께처럼 쌓인 무기력은 교사들을 그릇된 관행과 왜곡된 현실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눈앞의 비리에 애써 모른 채하고 되레 자기 합리화하기 바쁜 '찌질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운데, 학교는 시나브로, 결과가 과정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버리는 반교육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예상컨대, 방송사에서 나와의 인터뷰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드러난 비리를 발판 삼아 우리 교육의 병폐를 공론화시키려는 노력은 박수 받을 만하나, 더 이상 일을 진척시키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방송사 역시 취재원 확보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여기서 취재원이란 다름 아닌 관내의 현직 교사들이다. 그들은 웬만해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와 다른 교사들의 일을 입에 담으려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좀처럼 학교가 변하지 않는 이유이며,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들이 학교 개혁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도 된다. 학교에서 교사는 독립된 주체다. 교사가 교육 개혁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면, 학종에서 절감하듯 아무리 좋은 대안이 마련된다 해도 관행과 현실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다. 욕먹을 각오로 단언하건대, 교사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는 이야기다.


태그:#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